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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누구에게나 재난을 골고루 나누어주고야 끝나리라. ・・・・・・거의 광적이고 앙칼진 이런 열망과 또 문득 덮쳐오는 전쟁에 대한 유별난 공포. 나는 늘 이런 모순에 자신을 찢기고 시달려, 균형을 잃고 피곤했다.
—p. 49
남의 불행을 고명으로 해야 더욱더 고소하고, 맛난 자기의 행복・・・・・・.
—p. 63
설사 그들의 부가 전통이나 정신의 빈곤이란 약점을 짊어졌다손치더라도 부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두려운 것일까?
—p. 76
“그런 거리를 실감할 수 있느냐 말예요? 짐작이라도 할 수 있어요? 게다가 몇천, 몇만, 심지어 몇억 광년 따위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나 말예요?”
—p. 115
수복 후의 나날들. 텅 빈 집과 뒤뜰의 은행나무들. 그 자지러지게 노오란 빛들. 바췻빛 하늘을 인 노오란 빛들. 아낌없이 쏟아지던 노오란 빛들. 지금도 눈이 부시다. 그때도 아니다. 그럼 그전, 그렇다. 그전, 그러나 나는 여기서 기억의 소급을 정지시켰다. 몇십 년이나 묵은 은행이 그 가을엔 왜 그렇게 처절하도록 노오랬던가. 난 그것을 보며 왜 그렇게 살고 싶고, 죽고 싶고를 번걸아가며 격렬하게 소망했던가. 지금도 그것이 궁금할 뿐 내 기억의 소급은 노오란 빛 속에 용해되어 다시는 헤어나질 못했다.
—p. 124
“엄마. 우린 아직은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 건 변화하게 마련 아녜요. 우리도 최소한 살아 있다는 증거로라도 무슨 변화가 좀 있어얄 게 아녜요?”
—p. 127
혼자가 된 나는 배에 힘을 주고 고개를 오버 깃 속에 깊이 묻었다. 그리고 비로소 시선을 내 내부로 돌렸다. 고개를 딱지 속에 처넣은 달팽이의 시계(視界)만큼이나 어둡고 협소한 나의 시계. 그러나 내 옹졸한 시선은 그런 좁디좁은 시계에서만 당황하지 않고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p. 161
나는 심하게 찢기고 있었다. 새롭고 환한 생활에의 동경과 지금 이대로에서 조금도 비켜설 수 없으리라는 숙명 사이에서 아프게 찢기고 있었다. 또한 나는 이 찢김, 이 아픔이 전연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아픔을 통해 내가 조금도 새로워질 리가 없을 테니까.
—p. 178
그러나 나는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 속에 감추어진 삶의 기쁨에의 끈질긴 집념을 알고 있다. 그것은 아직도 지치지 않고 깊이 도사려 있으면서 내가 죽지 못해 사는 시늉을 해야 하는 형벌 속에 있다는 것에 아랑곳없이 가끔 나와는 별개의 개체처럼 생동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p. 182~183
그는 어디까지나 후하게 자기를 나에게 나누어주려 들었을 뿐 그의 전부를 주려 들지는 않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그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나로부터 은닉하고 있음 직했다.
—p. 217
그러고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곧이어 살고 싶다고 고쳤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두 상반된 바람이 똑같이 치열해서 어느 쪽으로도 나를 처리할 수 없었다.
—p. 218
여기까지의 내 회상에는 ‘나’가 없다. ‘우리’가 있을 뿐이다. 특별히 나라는 개체가 필요 없는 가족이란 ‘우리’를 통해서 사고하고 우리의 애환이 곧 나의 애환이었다.
—p. 289
이렇게 나는 뿌리를 상실한 채 무성한 모순만을 넘겨받아, 그 모순이 나를 찢게 내맡기고 있었다.
—p. 307
나는 내 허물을 딴 핑계들과 더불어 나누어 갖기를, 나아가서는 내가 지은 허물만큼 그동안 나도 충분히 괴로워했다고 믿고 싶었다.
우상 앞에서 한껏 우매하고 위축됐던 나는 진상 앞에서 좀 더 여유 있고 교활했다. 나는 오빠들의 죽음에 나 말고 좀 더 딴 핑계를 대기로 했다. 그리고 나에겐 좀 더 관대하기로. 관대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미덕일까.
—p. 321~322
나는 문득 어머니가 회복돼가고 있다는 게 두려웠다. 어머니는 지금 행복한데, 깨어날 것이, 어머니의 정신과 육체가 유명을 달리 할 것이 두려웠다.
—p. 341
“어렸을 땐 맴을 돌고, 커가면 술을 배우고, 사람들은 원래가 똑바로 선 채 움직이지 않는 세상이 권태롭고 답답해 못 견디게 태어났나 봐.”
—p. 366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p.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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