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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시간은 상륙하지 않았다. 바다는 늘 처음이었고, 신생(新生)의 파도들이 다가오는 시간 속으로 출렁거렸다. 아침에, 고래의 대열은 빛이 퍼지는 수평선 쪽으로 나아갔다. 고래들이 물위로 치솟을 때 대가리에서 아침햇살이 튕겼고, 곤두박질쳐서 잠길 때 꼬리지느러미에서 빛의 가루들이 흩어졌다.
—p. 10
달이 밝은 밤에는 빈 것이 가득차 있었고 안개가 낀 날에는 가득찬 것이 비어 있었다.
—p. 30
사랑이라는 말은 이제 낯설고 거북해서 발음이 되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세월은 다시 세월을 풍화시켜간다.
—p. 129~130
우기에 열차들은 대가리로 빗줄기를 들이받아 안개를 일으켰다. 열차 지붕에서 물보라가 날렸다. 물보라는 집현전 건너편 언덕 사육신 묘지까지 끼쳐갔다. 열차는 비를 맞아도 젖지 않았다.
—p. 151
시간은 메말라서 푸석거렸고 반죽되지 않은 가루로 흩어졌다. 저녁이 흐르고 또 익어서 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말라죽은 자리를 어둠이 차지했다.
—p. 161
사람은 서서만은 살 수 없고 엉덩이를 붙여야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날 나는 이영자를 보고서 알았다.
—p. 166
백도라지꽃의 흰색은 다만 하얀색이 아니라 온갖 색의 잠재태를 모두 감추어서 거느리고 검은색 쪽으로 흘러가고 있지요. 저녁 무렵에 꽃술 밑을 들여다보면 하얀색의 먼 저쪽 변두리에 노을처럼 번져 있는 희미한 검은색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애써 보지 않아도 저절로 보입니다.
—p. 220
꽃 한 송이는 죽음의 반대쪽에서 피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꽃이 지는 것이 죽음은 아니었다.
—p.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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