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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도 번뇌요 시냇물도 번뇌요, 산새들 짐승울음, 철 따라서 피고 지는 산꽃들, 그 어느 하나 소리와 형체를 겸하지 않는 것이 없을 터인데 심산유곡이라고 현세가 아니란 말이가, 사시장철 목숨의 소리들은 충만하여 있거늘,"
—p. 97~98
김주사도 되고 김선생도 되고 김길상 씨도 되고 면전에서 웃고 굽실거리는 얼굴들이 돌아서면은 퇴! 하고 침 뱉어가며 하인 놈 푼수에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더라고 거들먹거리는 꼴 눈꼴시어 못 보겠다, 고작 한다는 말이 그 말일 터인데. 서희라고 예외일 수 있는가. 시기와 조롱을 면전에서는 교묘히 감추는 뭇시선 속에 상처받기론 마찬가지다. 그 상처를 서로 감추고 못 본 첫한다. 왜 드러내 보이고 만져주고 하질 못하는가. 길상은 가끔 옥이네와의 생활을 생각할 때가 있다. 올망졸망 바가지를 달고 보따리를 인 유랑민들을 생각할 때가 있다. 혹은 만주 벌판을 횡행하며 싸우는 사내들 무리에 몸을 던지고 이따금 바람처럼 찾아가는 옥이네를 상상할 때가 있다. 공상은 옥이네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다. 연민 때문도 아니다. 사랑의 고통, 사랑의 질곡에서 빠져 달아나고 싶은 마음, 옥이네는 아무것도 길상에게 걸어놓은 것이 없다. 만주의 벌판은 넓다. 황사가 나는 공간은 무한하며 말굽 소리가 가슴을 떨리게 하는 대륙이다. 강물도 산림도 얽매이기에는 너무나 광활하다. 길상은 또 하동의 지리산, 그 지리산 속의 절을 생각할 때가 있다. 상자 속에 들앉은 불상처럼 답답함이 재생되는 추억이다. 산밖에는 세상이 없는 줄 알았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우관스님의 애정, 그런 애정의 형태밖에는 몰랐었던 어린 시절을 길상은 아픔 없이 되새길 수가 없는 것이다.
—p. 140~141
"그곳에 사는 여진족 중의 한 족속이오. 아주 깨끗하게 남아 있소, 깨끗하게 말이오. 중국 본토로 따라들어간 여진놈들은 불알까지 다 썩었지마는. 아, 그뿐이오? 가깝게는 용정촌에 사는 놈들도 도방이랍시고, 흥! 본시 오랑캐라 일컬은 사람들을 말할 것 같으면 말 잘 타고 수렵에 능통하고 물을 찾아 짐승들을 몰고 다니면서 정처 없는 생활을 하니만큼 재물을 탐내지 않고 인심이 후한단 말이오. 도시 그 사람들은 의식에 소용되는 것 이왼 내 것이다 하는 생각이 엷단 말이오. 철 따라 수렵하고 어망 풀어 고기 잡고. 그게 그런데 근래외 와서는 중국땅 한인들이 슬금슬금 기어들어 갖은 술수로 망쳐놓더니 글쎄, 이제는 조선놈까지 덩달아 아편을 팔아볼 생각이라니? 천하에 온 그런 죽일 놈의 죄가 또 있겠느냐 그 말이오."
—p. 153
'이들 날품팔이도, 연해주의 이동진 그 양반도, 최서희, 김두수, 용이, 영팔이아재, 김훈장, 모두 허상이란 말이냐. 조준구도 봉순이도 이상현 모두 다 허상이란 말이냐. 악인도 선인도 모두 허상이란 말이냐. 좋은 일 나쁜 일 남의 일이라면 거리에 굴러 있는 개똥 보듯 오로지 꿀벌처럼 불개미처럼 제 일족의 성을 쌓고 먹이를 비축하고 그게 실상이란 말이냐? 크게는 한 국가 한 민족도 그래야만 오래 살아남는다. 지금은 허허한 곳을 많은 조선백성이 방황하는데 꿈을 위해서, 원수들 때문에, 한과 정 때문에・・・・・・ 살아남으면은 얼마나 더 살아남을 것이며, 허허헛・・・・・・'
—p. 181
기화는 어느덧 자신이 지난 역사의 운행(運行) 속을 흐르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피의 운행이요 남의 피인 동시 자신의 피. 서희가 간도로 떠난 후 오 년간은 망실의 폐쇄의 세월이었음에 틀림없다. 하동에서 진주로, 진주에서 다시 서울로 격변한 생활의 오 년간은 해 저문 날 낯선 길손이 휘적휘적 걸어가던 세월임이 분명하다. 과거에 걸어놓은 고리가 오늘 이 손때 묻은 베틀 위에서 처음으로 연결되고, 과거를 운행하던 피는 비로소 지금 이 자리에서 이어져 흐르고 망실된 오 년간, 안개처럼 침침하며 까마득하며 떠나버린 밤배처럼 자취가 없다. 이상한 일이다. 한데 이 격렬함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이 안쓰러움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밑바닥에서부터 거슬러 오르는 삭막한 바람 소리는 어디서 오는 것이며 아아 또 이 한(恨)은 어디서 연유되어 맺힌 것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기화는 알지 못한다.
—p. 249
“바로 그거요, 요령 소리 듣고 따라간다는 거ㅡ것, 따라가는 백성이 많았으면 우린 내 나라를 빼앗기진 않았을 게요. 오소리 감투가 둘이라는 말이 있지만 어중간히 눈 밝은 자들이 큰일이라. 결국은 순결한 마음 순박한 열정만이 저어 수만 리 장천을 나는 철새처럼 목적한 곳에 당도할 수 있는 게요. 그리고 수만 리 장천같이 왜놈이 망하여 내 땅에서 물러가는 날도 멀고 험난하니 우리는 우리 당대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싸우다 죽으면 우리의 아들딸들이 독립정신을 이어주어야 하고 양전옥답 물릴 어리석은 새각 말고 피땀 나게 자손들을 가르쳐야 하는 게요.“
—p. 274
그는 많은 사람, 군중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하고나 어울리어 시국을 논하고 이상을 말하는 일이 없다. 비분하여 눈물짓는 일이 없다. 호탕하게 터널웃음을 웃는 일이 없다. 천군만마를 질타하며 황야를 질주하는 그를 상상할 수 있을까? 구렁이 담 넘어가듯 교활한 관용을 그에게선 바랄 수 없다. 그는 생래가 수줍은 사내였는지 모른다. 과대한 몸짓 과대한 변설,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은 그 많은 자칭 타칭 독립지사 영웅들, 권필응의 수줍음은 그러나 영웅심에 대한 강한 제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며 항상 환상을 배제하며 정확하고 적확하게 사고를 집중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론 그 정확함으로 하여 그를 호나상하게 된다. 믿게 된다. 불가사의한 힘을 느끼게 한다.
—p. 333~334
“큰 몫들을 노리는 투전판에서 망이나 보아주고 구전 먹는 날건달이라도 좋다! 방편으로 한다면은.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너 죽으면 나 죽게 되고 나 죽으면 너 죽게 된다는 바로 그 점에서만이 손을 잡는 게 정치야! 친면이 어딨어? 이해관계야, 이해관계! 하물며, 음, 우리에겐 정치할 한 치의 영토도 없어. 각박하고 가혹한 싸움이 있을 뿐인데 누구에게 감사하고 누구에게 은혤 느껴? 신뢰는 더욱 금물, 그따위 자질구레한 잡티가 붙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아!”
—p. 337
“우린 개척민들에게는 군식굽니다. 그들을 계몽하여 그들에게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하고, 그거 망상입니다. 처음부터 잘못이었단 말입니다. 똑똑히 기억해야 할 일은, 그렇지요, 개척민 그네들은 조선 위정자 밑에 살 수 없었던 가난뱅이들이었고 우린 왜적 치하에서 살 수 없었던 민족주의자들입니다. 그네들은 확망한 무인경(無人境)을 피땀으로 일쿠었습니다. 피땀으로 일쿨 때 그들에겐 보호해줄 정부도 호소해볼 위정자도 없었습니다. 민족주의자 조옿지요, 독립투사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 훌륭한 양반들이 나라 잃고 이곳 타국에 와서 개척민들, 일찍이 버림받았었던 그네들을 언덕 삼아 비비댄 거지요. 비비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래 그네들에게 호령하고 지도할 푼수가 되나요? 애국애족이면 단가요? 국토회복이면 단가요? 염치없는 짓 아니고 뭡니까? 그들에겐 피땀 흘려 일쿤 땅보다 버림받았던, 은덕이라곤 받은 일이 없는 조국이란 게 더 소중할 리 없지 않습니까? 제가 무슨 얘길 하는고 하니 그네들에게 주도권을 주라 그 얘깁니다. 그래야만 수십만 이민들은 한 깃발 밑에 모일 거란 그 말입니다.“
—p.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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