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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이란…… 발에 맞아야 하고…… 사람의 짝도 푼수에 맞아야 하는 법인데…… 훈장어른 말씀이 옳습니다. 옳다마다요. 야합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일 있을 수 없지요…… 서희 그 아이가 실리에 너무 눈이 어두워서…… 네에. 야합이 아닌 다음에야. 옳은 말씀이오. 옳다마다요.’
함성 같은 것이 목구멍에서 꾸럭꾸럭 소리를 내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서운 심연을 본 어제 충격이 가슴 바닥에서 아직 울렁거리고 있다. 두 어깨가 축 처지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 같았던 이동진의 얼굴이 크게 커다랗게 눈앞에서 확대되어 간다. 차츰 바닥에서 울렁거리고 있는 것은 실상 충격이기보다 두려움이다. 오싹오싹해지는 공포감이다. 도둑이 칼을 들고 덤비는 것보다 더한 무서움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미움도 사랑도 없는 비정(非情) 그것이 아닐까. 칼 든 도둑 한 사람마저 없는 오직 한 사람이 남은 세상을 상상해보라. 하늘과 산이 무서울 것이며 들판과 시냇물도 무서울 것이다. 비정이기 때문이다. 한 남은 사람은 차츰 들판을, 산을 닮아가고 사람이 아니게 되어갈 것이다. 한 그루 나무같이 되어갈 것이며 한 덩이의 돌같이 되어갈 것이다. 사람이 사람 아니게 되어가는 공포. 처음, 서희가 길상이하고 혼인할 것은 원한다는 얘기였었소 하고 이동진이 꺼내었을 때는 충격이었다. 평소 서희의 마음을 짐작했으면서도 전혀 처음 듣는 놀라움이었다.
—p. 80~81
“귀마동, 말은 돌아온다는 뜻이오. 돌아온다는 것은 강을 못 건넜다는 게 아니겠소? 이곳을 찾아드는 사내와 여인은 아름답고 씩씩하고 그리고 젊지. 아암, 젊고말고. 샛별 같은 눈들을 하고 있지. 여인은 장다리 순같이 연한 발목이요 사내는 참나무같이 단단한 몸집……흐흠.”
……“사내와 여인이 이곳을 찾아오면 나는 말 두필을 마구간에서 내어주는 게요. 그네들이 말에 오르고 나란히 떠날 때 이르는 것은 말고삐를 놓으면 죽는다는 말인데 그 말을 세 번 되풀이하지. 말고삐를 놓으면 죽는다구. 해가 떨어질 무렵, 그들은 건너갈 강을 향해 떠나는 게요. 나란히 떠나는 말 두 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명경 같은 둥근 달이 떠오르지. 벌판 저 너머 말 두 필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저녁 이슬을 맞으며 나는 바라보는 게요. 제발 이번에는 돌아오지 말아라 빌면서 말이오. 그러나 그들은 어김없이 돌아왔었소. 말 한 필은 서쪽에서 돌아오고 다른 한 필은 동쪽에서 돌아오는 게요. 실은 그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말이 돌아오는 거지만. 한데 사내와 여인은 옛날의 그들은 아니오. 아니거든. 머리칼은 햇볕에 타서 삼올 모양으로 누렇게 뜨고 얼굴에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굵은 주름, 거미줄 같은 잔주름, 이빨은 빠져서 양 볼이 꺼지고 파파할멈 할아범의 모습들이오. 허나 그보다 슬픈 것은 사내와 여인이 서로를 알지 못하며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일이었소. 그네들은 타인이며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요. 제가끔 자기 갈 길을 탄식하는 게지.”
—p. 138~139
‘늙었구나.’
옥이네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마음 바닥에 날카로운 손톱 자국을 남겨놓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문다.
—p. 145
“그러니까 간악한 왜놈들이 셈을 놔본 거지요. 양민들이야 어떻게 시달림을 받든지 간에 제놈들에게 오히려 유리하다는 것 아니겠소? 첫째는 백성들이 의병에 넌더리를 낼 것이라는 셈이고 실컷 시달린 끝에 토벌대가 들어간다면 환영을 받을 것이란 속셈이겠지요. 화적 놈들 목표가 왜놈들 아닌 백성일진대 얼마 동안 관망한다 해서 손해볼 것 없잖습니까. 결국 그러니 불 지르고 재물 뺏고 여자를 겁탈하고 그런 포악한 행위 그것도 가증스럽기 짝이 없으나 그것에 못지않게 근심스런 것은 일본에 저항하는 일체 행동에 대해서 민심이 멀어져갈 것이란 점이오. 악랄한 왜놈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것, 민심이 깨어지고 흩어지고 종래는 왜병들에게 협력하는 사태까지 빚어진다.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요.”
—p. 246
“……내 말이 어디가 글러? 나를 친일파로 몰려고 너희 놈들이 기를 쓰지만 말이야, 알고 보면 나라는 이놈이, 더 내 나라를 잘 안다 그거라구. 자네는 몰라. 모른다 그 말이라구. 민속이라는 것도 학문이거든. 내가 일본 있을 적에 민속학을 한다는 일본인한테 들은 얘기가 있어. 말이 그럴듯하더라 그거라구. 민속이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라는 게지. 때문에 그것은 그 민족의 전통이다, 이거야.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손 치더라도, 경제 사정이 윤택해진다손 치더라도 전통이란 물건이 아니다, 그거야. 그러니 기계로써도 그거를 맨들 수 없고 돈으로 그것을 살 수도 없는 게야. 그래 그 일본사람이 말하기를 이렇게 기계만 돌아가는 세상이니 소중한 민족의 오랜 유산들이 날로날로 소멸해가는 판국이라 슬프다! 일본도 이러하거늘 침략을 당하고 정복을 당한 나라에서야 오죽하랴, 그러더란 말이야……”
—p. 268
그 순간 석이는 이 사람들 시키는 대로 하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석이는 민감하게 느꼈다. 두 사람이 다 평범치 않으며 그 말도 평범하게 지나쳐버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면 옳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선 복종하는 것이 또 당연한 일로 석이는 판단한 것이다. 하물며 그들은 큰일을 경영하고 있으며 그 큰일을 향한 길을 가는 것은 동시에 아비 원혼을 위로해주는 것, 석이는 뚜렷하게 자각한다. 뻐근하게 양어깨가 내리눌리는 짐의 무게를 느낀다. 그 짐을 지고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앞으로 가리라 결의한다. 어미의 가랑잎 같이 야윈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등잔불 밑에서 물레를 돌리던 젊은 날의 어미 얼굴이 스치고 간다. 낚싯대를 메고 나가면서 석아 니도 따라갈라나? 하던 아비 모습이 스치고 간다.
—p. 362
술상을 가지로 온 것은 자정이 지나고도 훨씬 후 사경(四更)이 가까워졌을 무렵이다. 과부한테선 동백기름 냄새가 풍겨왔다. 허리를 구부리고 긴 두 팔이 술상 쪽으로 뻗치는 순간 여자의 눈은 환이 이마빼기에 와서 화살처럼 꽂혔다. 외면할 겨를도 없이 아래로 미끄러진 시선이 환이의 눈동자를 쏜다. 여자의 눈동자가 파들거린다. 필사적으로.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절망의 몸부림이다. 사내의 눈동자는 바위벽이었다. 잡지도 놓아주지도 않는다. 여자의 흰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쓸고 그리고 사라졌다. 강쇠의 입술에선 풀무질이 요란했다. 정좌한 채 환이는 깜박거리는 호롱불을 쳐다본다. 호롱불은 미친 듯, 춤을 추 듯 관솔불로 둔갑한다. 아득한 그날의 관솔불로 둔갑한다. 잠든 것철머 죽어서 누워 있던 여자, 관솔불은 춤을 추고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여자는 죽어서 누워 있고 환이는 앉아 있는 것이다.
—p.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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