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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未完)의 제국 이야기일상/book 2022. 11. 25. 17:39
한때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불렸던 정체(政體)는 오늘날의 독일이나 미국만큼의 연방제로도 발달하지 못한, 아주 느슨한 형태의 나라였다. 책에 나온 문장대로, 소련의 붕괴가 러시아 역사에서 책의 한 챕터가 종료되었다는 걸 의미했다면, 양차대전 사이에 공중분해된 합스부르크의 역사는 한 권의 책 자체가 완결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난립한 제후국의 권한이 고스란히 유지되었던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체제가 도저히 단일한 정치적 성격으로 묶일 수 없는 괴물같은 실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제국 또한 끝끝내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실패한다.
그럼에도 1814~1815년 빈 회의를 거치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냈던 한 국가가 불과 100년 사이에 지도상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다. 오늘날에는 오스트리아를 필두로, 헝가리, 체코에서 그 후신을 어렴풋이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역시 합스부르크 일가가 영향력을 행사했던 옛 유고연방 일대는 다시 자잘한 군소국가—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로 나뉘었다. 이후 1990년대 세르비아 내의 코소보 자치구는 거대한 화약고가 되었고, 마케도니아는 국호(國號)를 둘러싸고 그리스와 분쟁을 겪었으니, 이 지역의 문화적・정치적・종교적 복잡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나는 얼마전 우크라이나에 관한 역사책을 읽으면서, 우크라이나의 서쪽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국가들에 관한 역사를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 책을 집어들었다. 러-우 전쟁이 한창인 지금도 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럽의 일원이기를 바라고 서방세계에 열렬히 구호를 요청하고 있듯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의 국가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유용한 지렛대가 되어 주었다.
거꾸로 말하면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늘날 국가로서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그 국가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중유럽과 동유럽 일대의 복잡다단한 정치적 지형을 아우르는 완충지대였음을 의미한다. 이곳이 거대한 완충지대(Buffer Zone)였다는 건 서유럽 세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분리시켜 주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유럽 각지에서 '민족' 개념이 고안되고 태동되던 19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완충지대로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역할은 그 기능을 다했고, 시대적 변화는 빨랐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은 그 변화를 버티기에 허약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국가로서는 유효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의 원형은 사라지지 않는 예술로 석화(石化)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브람스나 베토벤,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은 물론이고,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 전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프라하에서 연금술을 연마했던 튀코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는 새로운 우주의 법칙을 발견했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법칙을 찾았다.
합스부르크의 초창기 역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포틴브라스 효과' 대한 부분이다. 합스부르크는 가문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주변국과의 결혼 정책을 공격적으로 단행했을 뿐만 아니라, 취약한 정통성을 벌충하기 위해 칙서(勅書)나 유언장을 날조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합스부르크는 자신들의 서사에 정통성을 부여해줄 대상을 주로 옛 로마 제국으로부터 찾았는데, 이러한 '정통성 구하기'는 유럽에서 비단 합스부르크 제국에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다. 파리 근교의 중세 소도시 프로방(Provins)을 갔을 때 세자르 탑(Tour César)를 들른 적이 있었는데, 카이사르에서 이름을 따온 이 탑은 이 도시의 연원을 로마에서 찾고자 했던 당시 위정자의 바람이 투영된 것일 뿐 이 지역이 로마 제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고문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런 걸 보면 정통성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미국이나 독일, 스위스처럼 연방제가 성공적으로 안착한 국가들과 그렇지 못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결정적 차이가 무엇이었까 생각해보게 되기도 하고, 폴란드나 발칸반도 등 인접지역의 역사가 더 궁금해지기도 한다.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다. 예술사, 사회사, 생활사를 비롯해 거시적으로 쉽게 조망되지 않는 미시적인 역사들이 방대하게 소개되는 입체적인 역사서다. 연금술(鍊金術) 안에서 자신의 은신처와 세계관, 정치 전략을 발견한 루돌프 2세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어휘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번역 또한 정말 좋았다. 이렇게 좋은 책을 또 한 권 발견한 것에 감사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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