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印
-
마곡사(麻谷寺)주제 없는 글/印 2023. 6. 9. 08:51
서울을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하늘에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는데, 곡두터널을 지날 즈음에는 두터운 구름이 걷혀 있었다. 곡두터널은 천안과 공주시를 이어주는 짤막한 터널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린 차는 천안을 빠져나온 뒤부터 내내 구불구불 국도를 달렸다. 차머리 위로 흘러가는 나뭇잎은 벌써 한여름을 예고하고 있었다. 내가 이날 향한 곳은 마곡사였다. 내가 마곡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산사'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의 일이다. 안동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봉정사라는 곳을 찾게 되면서 산사의 존재를 알았다. 우리나라에 산 속에 자리잡은 사찰이야 한두 곳이겠냐마는 나는 이때의 여행을 계기로, 영주의 부석사와 보은의 법주사를 차례차례 찾았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지방에 자리한 통도사와 선암사, 대흥사도 거..
-
바다, 바다들—동해주제 없는 글/印 2023. 6. 5. 00:33
# 망상(望祥)의 바다는 몽롱한 은빛 하늘로 인해 푸르름이 바래 있었다. 그럼에도 동해안에서도 큰 축에 속하는 해수욕장인지라, 때 아닌 더위를 피하기 위해 해안가 앞에 파라솔을 펼치고 진치고 있는 행락객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피서철 대목을 준비하는 상점가에서도 슬슬 분주함이 느껴졌다. # 나곡(羅谷)의 바다는 하천이 끝나는 지점에 대롱대롱 매달린 형상의 외진 해안이다. 해안가가 넓다고 할 수도 없고, 그마저도 들쑥날쑥 솟아오른 바위들로 인해 해안선이 흐트러져 있다. 그런 한적한 해안가에서 대여섯 명 정도가 바다낚시를 즐기고 있다. 사장(沙場)을 복원하기 위함인지 모래더미가 한가득 쌓아올려진 이곳은 방비되지 않은 채 버려진 곳 같기도 하다. # 구산(邱山)의 바다를 나는 좋아한다. 월송정의 서사는 고려 시..
-
출장(出張)주제 없는 글/印 2023. 5. 12. 18:15
출장을 다니며 좋은 경치를 구경해도 결국 드는 생각은 여행이란 내 돈 주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사실 내 옆에 있던 K 팀장의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곧바로 수긍했는데, 처음 가는 출장이 아무리 설렌다 하더라도 장거리 운전을 하고 익숙치 않은 길을 다니다보면 지치게 마련이다. 출장을 가지 않았더라면 사무실에서 했어야 할 업무 전화들은 여지 없이 걸려 온다. 결국 업무의 연장선상인 것이다. 그래도 잡학다식한 K 팀장과의 동행은 그렇지 않으면 심심했을 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부산과 거제를 거쳐 통영에 왔을 때 비는 시간을 이용해 잠시 한산도에 다녀왔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앞바다에서 처음으로 학익진 전법을 구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작전이 구상되고 훈련이 이뤄졌던 곳이 바로 제승당(..
-
철원(鐵原): 백마고지로부터주제 없는 글/印 2023. 4. 29. 12:20
철원은 멀지 않았다. 나는 최근 우연한 기회에 DMZ에 걸쳐 있는 열 개 지자체에서 DMZ 투어가 열리는 것을 보고, 가장 적당한 곳을 고르다가 집에서 가장 가기에 편리한 철원을 택했다. 철원 코스는 백마고지뿐만아니라 전사자 유해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화살고지도 둘러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간 시점에는 작년 여름 수해로 인해 화살고지를 잇는 비마교가 유실되면서 화살고지까지 둘러볼 수는 없었다. 도착해서 가장 먼저 둘러보는 곳은 백마고지 전적지다. 전쟁 당시 이곳에서는 10일간 12번의 쟁탈전이 벌어져 7번 주인이 바뀌었고, 국군과 미군, 프랑스군이 참전했다. 전적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물론 수많은 태극기가 수놓은 오르막길과 그 끝에 우뚝 선 거대한 태극기다. 합장(合掌)한 형태의 ..
-
파주, 여의도, 신림주제 없는 글/印 2023. 4. 25. 19:22
# 필름 카메라를 집어든 동기는 뚜렷하지 않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인터넷으로 필름 카메라를 찾아보던 중, 30년도 훌쩍 넘은 아버지의 니콘 카메라가 떠올랐다. 나는 보는 즉시 그 카메라가 마음에 들었고, 필름 두 개를 주문했다. 필름 하나에 이만 원 돈이라니 필름 카메라를 쓰던 시절 삼천 원이면 충분히 필름을 구하던 때와 비교하면 비현실적인 가격이다. 하지만 나는 카메라를 찍는 동안 이 카메라가 더 좋아졌는데, 셔터스피드와 조리개, 줌을 하나하나 조절하고 필름을 아껴가며 사진을 남기는 맛이 있었다. 최고와 최대만을 눈여겨보며 숨가쁘게 살아온 내가 다른 호흡 방법을 찾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나는 36장 필름에 파주와 여의도, 신림에서 사진을 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살아남은 필..
-
목련은 피고 지고주제 없는 글/印 2023. 4. 11. 03:13
올 봄에는 목련보다도 벚꽃이 더 빨리 폈다. 그래서인지 땅바닥에 어수선하게 떨어진 두꺼운 목련잎이 더욱 처연해 보인다. 자신을 채 내보이기도 전에 주위의 변화에 휩쓸려버린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이 탐스럽고 도타운 꽃잎은 다른 나무에서 떨어진 것들보다도 목직해 보이는 까닭에 이 세상의 중력을 더 많이 감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슷썬 생감자를 닮기도 한 새하얀 목련잎에서 향기와 함께 알싸한 냄새가 올라온다. 커다란 꽃잎이 빨아들인 봄의 피. 낙화함으로써 생채기가 난 것처럼 선혈 냄새같은 것이 올라온다. 이 한 송이 목련 잎은 가장자리부터 피딱지처럼 메말라감으로써 이제는 여름으로 아물어 갈 것이다.
-
나의 작은 호수주제 없는 글/印 2022. 12. 26. 22:02
# 한번은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호수같은 친구였다고. 바다같이 넓은 마음, 바람처럼 변덕스런 마음, 해바라기처럼 한결같은 마음 등등 귀에 익을 법한 하고많은 표현을 제쳐두고 나를 '호수'에 빗댄 친구의 말을 들으면 속으로 조금 비웃었던 것 같다. 호수라는 낱말 뒤에 친구가 붙인 형용사는 고요함, 흔들리지 않음, 늘 그 자리에 있음 따위의 것들이었고, 나는 다시 한번 속으로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호수같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 안에는 항상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오리가 있었다. 그 회오리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거셌고 내 마음을 아프게도 했다. 그래도 그가 보기에 내가 호수같았다면, 어느 누군가에게는 콩코드 호수가 되어주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 올해는 가을이 길어진 만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