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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평온하게 쉬기 전까지 낙엽은 얼마나 많이 팔랑거리는가! 그토록 높이 솟아 있다가 얼마나 만족스러워하며 다시 흙으로 돌아와 나무 밑동에 누워 썩어가며 새로운 세대가 자신처럼 높은 곳에서 팔랑거릴 수 있도록 영양을 제공하는가!
낙엽은 우리에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불멸에 대한 믿음을 자랑하는 우리 인간에게 낙엽처럼 우아하고 원숙하게 눕게 될 날이 과연 올까? 화창하고 고요한 가을날, 평온하게 손톱을 깎고 머리카락을 자르듯 육신을 버릴 수 있을까?
—p. 42
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우리 시선이 닿는 곳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눈이 그쪽으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앞을 볼 수 없는 젤리처럼 눈 자체는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넓고 멀리 보는지, 아니면 얼마나 가깝고 좁게 보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연현상의 대부분을 평생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p. 65
넓게 퍼졌던 나무의 밑동은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서 마침내 사라진다. 너그러운 사과나무는 이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소들이 자기 그늘 밑으로 들어와 쉴 수 있게 해준다. 소들이 나무의 몸통에 대고 몸을 비벼대는 바람에 껍질이 벗겨져 벌개져도 내버려둔다. 이만큼 성장했으니까. 심지어 소들이 사과를 조금 따먹는 것도 눈감아준다. 그렇게 해서 씨가 퍼지니까. 소들은 이렇게 자기들만의 그늘과 먹이를 마련한 셈이고, 사과나무는 모래시계를 뒤집어놓고 말하자면 두 번째 삶을 살아간다.
……모든 야생 사과나무들은 자연 상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야생의 어린이들을 볼 때처럼 우리를 잔뜩 기대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 나무는 변장한 왕자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얼마나 적절한 교훈인가! 최고 수준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도 자신을 천상의 과일이라고 여기며 그런 열매를 맺기를 염원하지만, 운명에 뜯어먹히고 만다. 오직 가장 강하고 끈질긴 천재만이 스스로를 지키고 어려움을 극복하여 마침내 연약한 어린 가지 하나를 하늘을 향해 뻗는다. 그리고 자신이 맺은 완벽한 과일을 감사할 줄도 모르는 땅에 떨어뜨려준다. 시인과 철학자, 정치인들도 이처럼 시골의 풀밭에서 싹을 틔워 창의력 없는 수많은 사람들보다 더 오래 생명을 유지한다.
—p. 135~138
“달은 지구 쪽으로 이끌리고, 지구도 달 쪽으로 서로 이끌린다.”라고 노래한 시인은 달빛 속을 걸으며 달의 영향을 받아 생각이 파도치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파도치는 생각과 낮 동안의 산만한 일상을 서로 떼어놓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쓸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 내 생각을 낮의 햇빛을 기준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싶다. 내 생각은 밤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모든 것은 자신의 관점이나 시야에 따라 달라진다.
—p. 203~204
밤이 이슬과 어둠을 끌고 와서 축 늘어진 세상을 되살려놓지 않는다면, 낮은 얼마나 견디기 힘들고 지긋지긋할까! 어둠의 그림자가 우리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하고, 우리의 원시적 본능이 눈을 뜨면, 우리는 밀림에 사는 사람처럼 은신처에서 몰래 빠져나와 지성의 먹잇감인 고요하고 깊은 생각을 찾으러 돌아다닌다.
—p. 212
전투가 벌어졌던 자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곤 인간과 짐승의 뼈뿐이다. 반면에 지금 현재 전투가 벌어지는 자리에서는 살아 있는 심장이 고동치고 있다. 우리는 언덕에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겠지만, 해골이 제 발로 다시 서게 만들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은 이 해골이 사람이었다는 걸 기억할까? 아니면 그냥 뼈라고 기억할까? 고대사는 고리타분한 분위기를 풍긴다. 역사는 보다 현대적일 필요가 있다.
……그러니 우리도 경솔하게 역사가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말고, 찬란한 빛의 시대에 있음을 자랑스러워하자. 우리가 저 먼 옛날의 어둠을 간파할 수 있다면 충분히 그 시대의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우리 시대가 아닐 뿐이다. 어떤 생물은 어둠 속에서만 볼 수 있도록 태어난다. 그래도 세상에는 늘 같은 양의 빛이 존재한다.
—p. 220, 223
얼마전 버드런트 러셀의 글을 읽으면서 '사람은 땅에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와 비슷한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글의 취지는 인간이 삶의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부터 점점 동떨어지면서 행복의 요소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요즘처럼 디지털이 발달한 시대에 무슨 말인가 할 수도 있지만, 당시 나는 그 구절을 읽으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흙도 묻혀보고 코로 풀냄새도 들이켜라는 게 러셀의 말이기는 하지만, 요지는 실체가 있는 경험을 하라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에는 실체가 없는 것들이 많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화면들, 위풍당당하게 우뚝 솟은 마천루, 간단히 조리해서 먹는 레토르트 음식. 모두 편리하고 감각을 잡아끄는 것들이지만 체험하는 이의 참여가 빠져 있는 것들이 오늘날 우리의 삶의 대부분을 이룬다. 요새 세상이 각박해졌다든지 흉악범죄가 늘었다든지 하는 것들도 이런 대리된 경험에서 메우지 못하는 채워지지 않는 극단의 욕구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글은 마찬가지로 인간이 가장 인간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인물이다. 소로만큼 '용기 있게' 살기는 쉽지 않지만, 그는 나의 롤모델 중 한 명이다. 누군가는 숲속에 들어가 자족적인 생활을 하는 그를 쓸데없이 낭만적이고 한가한 사람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에서처럼 야생 사과 하나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는 그에게서는, 무게감 있는 성찰과 단호한 자기 확신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빈틈없는 내면의 성찰과 배움에 대한 열정이 느껴진다. 겨울이나 밤(夜) 같은 것들은 여름과 낮의 대척점에서 흔히 무가치하고 몰개성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소로는 그가 머물던 겨울이라는 공간을, 밤이라는 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다. 그에게는 겨울과 밤 모두 가치 있는 것들이고 다음을 채비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것들이다. 단순하지만 명료한 그의 생각들의 뒤를 밟으며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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