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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자의 고독일상/book 2021. 3. 28. 21:27
이 책은 ‘죽음’이라는 주제에 민감한 나의 개인적인 관심에서 고른 책으로, ‘죽음’을 역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는 책이다. 요새 사회학 텍스트를 꾸준히 읽고 있어서, 죽음에 관한 그의 사회학적 분석은 여러모로 흥미로웠고 공감가는 대목도 있었다. 나에게 ‘죽음’은 멀리 하고 싶은 것이고, 낯설고, 알 수 없어서 무섭고, 슬픈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재화된 인식과 태도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을 일상의 그림자 뒤로 가려두고, 죽음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산업사회 이후—에 들어서야 나타난 사회적 현상이다. 산업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눈에 띄는 사회적 변화가 뒤따랐다. 첫째,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주거환경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죽어가는 노인과 동거해야 했던 주변인—대개는 가족—은 건축과 시설의 발달로 병자와 격리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의술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기아가 일상적이었던 과거에 죽음은 상투적일 만큼 어디서나 목격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죽음의 이미지는 점진적이고 평화로울 뿐만 아니라 예측가능하다. 셋째, 국가 권력이 폭력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던 전쟁은 억제되고 이를 대신해 조직화된 군대 또는 경찰력 형태로 대체되었다. 이는 과거 죽음의 주된 요인이었던 전쟁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졌음을 뜻한다.
이로써 과학기술의 발전과 국가권력의 통제 안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비공식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한다. (이는 성관념이 점점 개방의 길을 걸었던 것과 대비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죽음이 삶의 자연스러운 한 국면으로 받아들여졌던 중세가 더 낫다든가, 실체가 더욱 모호해진 죽음 개념 앞에서 사람들이 머리를 끙끙 싸매는 오늘날에 문제가 있다든가, 하는 가치판단을 엘리아스가 당장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전하는 죽음을 철저히 멸균하고 표백하려는 현대인들의 시도 이면에 어떠한 유아기적 심리기제가 작동하고 있고, 어떠한 사회적인 매커니즘이 뒷받침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다.
‘때 이른’ 죽음이라는 개념이 던지는 질문은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 있다. 중세에 죽음은 때로는 희화화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화형식이라는 이벤트를 통해 성대한 볼거리가 되기도 한다. 중세의 죽음에서 포착되는 것은 순간성이고 죽어가는 이의 개성이고, 살아남은 이들이 죽음을 자신의 살갗에 와닿는 경험으로 체험한다는 실체성이다. 하지만 요양원 또는 병원이라는 공인된 시설에서 노화를 맞이하는 오늘날, 늙은이의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앞당겨졌다. 죽음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사회적인 의미에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듦은 추하고 나쁜 것이며 죽음이 눈앞에 닥치기도 전부터 인간관계와 사회적 지위를 허물어뜨리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기대수명은 늘어났지만 역설적이게도 사회적 죽음은 상대적으로 앞당겨진 것이다.
물론 중세에도 죽음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은 존재했다. 또한 죽음을 꺼려하고 두려워하는 인식 또한 존재했다. 하지만 충성심이나 정절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자결하는 것이 허용되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전쟁상황에서 죽음을 목격할 기회가 흔했던 과거에는 죽음에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 반대다. 죽음은 절대다수의 시민들에게 ‘추상적’인 존재로만 남았으며, 체계적인 방식으로 은폐되고 처리된다. 장례식장, 화장터, 묘지의 분업과 매끄러운 업무처리는 죽음을 바라보는 이들로부터 죽음을 떼어놓는다. 또 엘리아스가 잘 묘사하듯, 외부의 세균을 차단한다는 의학적 목적에서 죽어가는 이와 가족들을 분리하는 행위가, 사랑하는 이들과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감정과 대화를 공유하고 싶어 하는 죽어가는 이의 정서적 욕구를 압도한다.
개인주의의 발달과 합리주의의 지배와 더불어 ‘외로운 죽음’이 파져나간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외적인 요인—전쟁이나 화형, 기근—에 의해 죽음에 직면할 가능성은 획기적으로 낮아졌지만, 여전히 인간은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개념은 어떤 식으로든 처리되어야만 했다. 인간이 언제나 영원히 명랑하고 행복하고 주위 사람들과 단란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퇴행적 사고에 갇혀 있더라도 말이다. 죽음 개념을 처리하기 위하여 국가 권력은 그렇다면 이 난점을 척척 해결해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엘리아스의 답변이다. 양차 대전을 거치는 동안 유태인인 그가 목격했듯, 인간은 바로 그 국가 권력의 통제 아래에서 광기를 분출하고 폭력을 정당화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미화하고 삶의 끝을 외면하려는 체계적인 기획의 그 취약성은 이만큼이나 여과없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인간과 사회의 시행착오는 멈춰서는 안 된다. 자연 그 자체는 무목적적이지만 인간은 목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며 다른 한편으로 드는 생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본인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생물학적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적 죽음은 어떤 의미로 앞당겨졌을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로 진화한 것 같’기도 하다는 점이다. 오늘날 사회적 죽음에 처하는 것이 비단 고령인구만은 아니다. 사회계층과 성별, 직업과 같은 여러 분류에 따라서 사회적 죽음은 뜻밖에 빨리 찾아오기도 한다. 젊은 사람들도 적절한 시기에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스스로 경제적인 부양을 할 수 없다면 사회적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인 질병에 처하게 된다. 한편 인터넷은 그 어느 곳보다 사회적 죽음—또는 살인—이 빈번하게 행해지는 곳이다. 중세의 화형식은 대개 교회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인터넷에서는 화형식의 공인된 주최자도 없이 익명의 군중에 의해 맹렬히 진행된다. 비록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 쓰인 것이 1985년이므로 그 이후에 변모한 사회상까지 반영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논리가 담고 있는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이 책의 핵심은 제목에 담겨 있다. ‘죽는’ 이의 고독이 아닌, ‘죽어가는’ 이의 고독을 생각해본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얼기설기 엮여 있는 관계와 실존적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실제로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간만이 죽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특히 이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즉 인간의 손에 붙들린 파리는 살인자의 손아귀에 있는 사람처럼 마치 자신이 처한 위험을 알고 있는 양 파들거린다. 그러나 생사의 위기에 처한 파리의 방어적 행동은 그 종이 가지고 있는 학습되지 않은 천성이다. 어미 원숭이는 새끼가 죽었는데도 어느 곳에선가 새끼를 떨어뜨려 잃어버릴 때까지 품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어미 원숭이는 자신의 새끼 혹은 새끼의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에 대해 알고 있기에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p. 11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어가는 이 앞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할 말을 알지 못한다. 이 상황에 쓸 만한 어휘는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고통의 감정이 앞서서 언어를 억제한다. 죽어가는 이들에게 이것은 괴로운 경험이다. 여전히 살아 숨쉬는데도 그들은 이미 버려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조차 죽어가는 것과 죽음이 남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문제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p. 31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족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인간은 왜 죽는가’라는 질문은 핵심적인 것으로 등장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로이’ 죽는다는 관념은 비교적 최근에 개인화와 자아인식이 발전한 단계의 것이다.
이 ‘외로이’라는 단어는 상호 연관된 복잡한 의미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죽어가는 과정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죽음으로 인해 나 자신의 소우주, 그것과 결부된 독특한 기억, 나만이 알고 있는 감정과 체험, 나 자신의 지식과 소망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죽어가는 과정에서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과 분리되어 혼자 남겨질 때의 느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온전히 자율적인 인간으로서, 타인과 다를 뿐 아니라 분리되어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이라는 자기 이미지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현대사회에서 외로이 죽어가는 것은 현대인이 반복적으로 겪는 체험 형식에 속한다.
—p. 66~67
자연적 사건들이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자연’은 어떤 의도도 가지지 않는다. 자연에는 목표가 없다. 자연은 완전히 무목적적이다. 우주에서 목표를 설정할 수 있고 의미를 생성하고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는 인간 자신이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다. 학습 기간은 길고, 중대한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며, 그 학습 과정에서는 자기 파괴의 위험, 자기 삶의 조건을 없애버릴 수도 있는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이 위험은 사람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마저 누군가 대신해주기를 바라는 유아기적 태도에 머물러 있을 때만 증가한다. ……인간은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 인간 외적 자연 과정은 학습 능력이 없다. 인간 사회 자체는 자연 발전 과정의 한 단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 공통의 경험과 개인적 경험의 결과, 즉 학습 과정의 산물로서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훨씬 더 큰 정도로 자신들의 행동과 감정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어떤 단계와도 구분된다. 이 변화의 능력은 인간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영생의 소망은 계속 인간을 오도하여, 인간 자신과 인간의 공동체적 삶의 발전, ‘자연’, ‘사회’ ‘인격’에 대한 통제 정도 및 양식의 변화보다 ‘자연’과 같이 불변하는 것으로 상상되는 불멸성의 상징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게 만든다.
—p. 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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