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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의 작품은 흡인력이 있다. 그래서 『마의 산』을 읽은 뒤로 그의 작품을 더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단편집을 집어들게 되었다. 단편선에는 비교적으로 그의 초기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미 단편을 쓸 당시부터 '요양'이라는 소재는 토마스 만의 흥미를 끌었던 것 같다. '요양'이라는 소재는 결국 심신이 병약한 등장인물들이 자연스레 등장하는 구실이 된다. 그리고 작가는 이들 병약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미추(美醜), 선악, 생사에 관한 고뇌를 진솔하게 진술한다.
『마의 산』에서는 요양지의 무대가 스위스의 산악지대에 자리한 평화로운 마을이었다면, 이 단편선에는 본거지인 독일의 대척점으로 '남국'이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남국'이라는 것은 로마나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지역으로 흔히 표상화된다. 그런 까닭에 소설 이곳저곳에 차갑고 정제된 느낌을 지닌 북독일의 분위기와 느슨하고 열정적인 남국의 정취를 대조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작가 본인의 개인적인 내러티브와도 관련이 있다. 토마스 만은 북독일 출신의 아버지와 남미 이민자 출신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남국의 습윤하고 몽롱한 분위기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사하라 지역에서 지중해로 불어오는 바람 '시로코'로 상징되고 있다.
북독일-남국의 대비는 소설의 다른 정황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인식-미(美)의 대조가 그렇다. 시민적인 교양-예술가적인 열정의 대조 또한 그러하다. 작가 토마스 본인은 시민적인 삶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예술(문학)이 펼쳐보이는 열락의 세계를 집요하게 탐닉한다. 진부한 인식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추종한다. 하지만 작가 자신이 신이 될 수 없듯, 예술가는 그저 신이 빚어놓은 아름다운 무언가를 희구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 예술가가 된다는 사실이 그를 낙인 찍는다. 보통의 사람들 틈에 있어도 그가 언제나 느끼는 것은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과 낯섦이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을 차갑게 식혀 얼음 위에 올려놓는 것이 아니겠소?(p,104)'라고 애인에게 반문하는 토니오 크뢰거의 말 속에는, 인간 세계에서 근원적인 한계를 마주한 작가 자신에 대한 회의적인 조소가 담겨 있다.
어느 작품 하나 빠질 것 없이 인상적이지만, 아무래도 분량이 가장 많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자신을 프리드리히 대왕에 비견할 만큼 절도 있는 삶을 지켜왔던 명망 있는 작가는, 어쩌다 노년에 이르러 에로스적인 아름다움에 홀려 자신의 삶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마의 산』만큼 번역이 잘 되어 있고,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문도 실려 있어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다:) [fin]
인생은 우리가 행복한지, 행복하지 않은지 말하기 이전에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키 작은 프레데릭 씨>
—p. 12
“지난 몇 년 동안 난 수천 번도 넘게 죽음과 대면해 왔어. 그런데도 죽지 않았어. 무언가 날 붙잡아 주는 게 있어. 난 벌떡 일어날 때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오직 한 문장에만 매달려 그걸 속으로 스무 번이나 되뇌어. 눈으로는 주변의 모든 불빛과 생명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면서 말이야…… 이러는 날 이해할 수 있겠어?” <행복에의 의지>
—p. 61
물론 자신이 지켜 온 맑고 순결한 사랑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던 제단을 조심스럽게 맴돌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어떻게 해서든 그 불꽃을 살리려 애쓰기도 했다. 변치 않겠다던 그 첫 마음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뒤 자기도 모르게 그 불꽃은 소리 없이 꺼지고 말았다.
그 뒤에도 토니오는 차갑게 식어 버린 제단 앞에 얼마간 서 있었다. 이 세상에서 변치 않는 마음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충격과 실망감으로 가득 찬 채. 그러다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기 길을 떠났다. <토니오 크뢰거>
—p. 89
“리자베타, 내가 ‘인식의 구역질’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소. 어떤 사안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만으로도 죽고 싶을 만큼 역겨워서 그것과 화해하고 싶은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 상태를 말하죠. 햄릿이 그래요. 전형적인 문학인이었던 덴마크인 햄릿 말이오. 그는 알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닌데도 알 수밖에 없는 운명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었소. 속울음을 삼켜야 하는 상황에서도 사안을 꿰뚫어 보고 인식하고 깨닫고 관찰하고, 몸을 껴안고 입술을 맞대는 순간에도, 또 감정에 눈멀어 시선이 굴절되는 순간에도 지금까지 관찰한 것을 웃으면서 모른 척해야 한다는 것, 그만큼 고약한 일이 있겠소? 비통하고 화가 치미는 일일 거요. 하지만 화를 낸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소?” <토니오 크뢰거>
—p. 104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는 순진한 것, 단순한 것, 생동감 넘치는 것 그리고 우정과 헌신, 신뢰,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은밀하고도 고통스러운 동경이 담겨 있다. 우리 평범하지 않은 인간들은 우리의 입장(入場)을 허용하지 않는 ‘삶’을 피비린내 나는 위대함이나 야생의 아름다움, 비범한 것의 환상으로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동경하는 것은 정상적이고 단정하고 사랑스럽고, 유혹적일 정도로 통속적인 삶이다.” <굶주리는 자들>
—p. 166
언젠가 아센바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직접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위대한 것은 ‘그럼에도’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위대한 것은 걱정과 고통, 가난, 버림받음, 육체적 쇠약, 악덕, 정염, 수많은 장애를 넘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소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체험이었고, 그의 삶의 명예의 공식이자, 그의 작품으로 들어가는 열쇠였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p. 225
무란 완전한 것의 한 형식이 아닐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p. 252
명심하라! 아름다움만이 우리가 감각적으로 수용하고 감각적으로 견딜 수 있는 정신의 유일한 형식이라는 것을. 만일 그 밖의 다른 신적인 것들, 즉 이성과 미덕, 진리가 우리 눈앞에 감각적으로 나타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p. 271
“우리는 분석적인 인식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파이드로스여, 인식에는 품위도 엄정함도 없기 때문이다. 인식은 신조도 형식도 없이 그저 알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고, 타락의 나락에 호의적이다. 아니, 나락 그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단호하게 인식을 배격한다. 대신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미뿐이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단순함과 위대함, 새로운 엄격함, 또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파이드로스여, 형식과 자유로움은 도취와 탐욕으로 이끌고, 타락의 나락으로 인도하고, 고결한 자까지 끔찍한 감정의 죄악으로 이끈다. 엄정한 아름다움이 극악한 것으로 여기고 배척하는 그런 감정의 죄악으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작가들이다. 우리는 고상하게 위로 올라갈 능력이 없고, 단지 일탈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간다, 파이드로스여. 너는 여기 남아라. 내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거들랑 그때 너도 떠나거라.”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p. 308
인간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고는 죽지 않는다. <죽음>
—p. 318
나는 바다를 처음 보았던 날을 자주 떠올리오. 바다는 크고 넓소. 나는 해변에서 바다로 눈을 돌리며 해방되길 바랐소. 그런데 저 뒤에 수평선이 있었소. 대체 수평선이 왜 있는 거요? 내가 인생에서 기대한 건 무한함이었단 말이오. <환멸>
—p. 329
사실, 겉으로 초연하고 세상에 무심하고 조용하게 사는 사람일수록 속으로는 더욱 치열하고 공격적이지 않을까? 물론 그래 봤자 소용이 없다. 사람은 어차피 살아야 하니까. 네가 행동하는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고 평화롭고 한적한 곳에 은둔하더라도 네 마음속에서는 변화무쌍한 삶의 기복이 비켜 가지 않을 것이고, 그 속에서 너는 너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웅이든 바보든 간에. <어릿광대>
—p. 333
아, 나는 옆으로 비켜나 앉아 이 세상을 무시할 권리가 없었다. 최소한 나라는 인간은 말이다. 너무 허영심이 강해 세상의 경멸과 무시를 견디지 못하고, 세상과 세상의 박수갈채가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것이 나라는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어릿광대>
—p. 369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기에 남에 대해서는 진지한 의견을 갖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크게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너 스스로 존중하는 만큼 너를 존중한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뻔뻔할 정도로 확신을 보여 주고,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버려라. 너를 경멸할 만큼 도덕적인 사람은 없다. 네가 너 자신과 하나 되지 못하고 스스로에 대한 애정과 만족감을 잃으면 그리고 스스로를 경멸하는 모습을 보이면 남들도 당연히 너를 그렇게 대할 것이다. 나는 그 점에서 실패했다. <어릿광대>
—p.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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