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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일상/book 2021. 8. 27. 02:23
책을 집어들고 저자 소개를 읽고 나서야 어릴 적 만화책으로 읽던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쓴 작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소설이 아닌 글을 읽고 싶은데 역사서를 읽자니 딱히 꽂히는 주제가 떠오르지 않아, 돌고 돌아 모처럼 수필을 읽게 되었다. 최근에 읽은 『오래된 질문』이나 『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기는 했지만, 대담집 형식을 하고 있어서 전형적인 수필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 가운데 하나는 영국에는 참 뛰어난 작가가 많은 것 같다는 점이다. 영국 안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중에 유명한 사람도 참 많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건 아마도 책의 글귀 중에 꽂히는 것들이 여럿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안에 담긴 챕터는 훨씬 다양하다. 사랑, 삶의 양가적인 측면, 늙어감 등등. 그저 형이상학적으로 주제에 접근하는 게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이야기를 풀어서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이런 수필을 읽다보면 결과론적으로 작가 자신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세상과 삶을 관조하는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상상력 가득한 글을 쓴 스티븐슨은 평생 지병인 폐렴으로 인해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 글 안에는 '아이'들이 현실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재창조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 할애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지병으로 일상에 제약이 많았던 작가 자신의 유아기적 체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글이 스코틀랜드 작가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을 안 뒤로, 뜬금없게도 맥스웰과 패러데이라는 두 위대한 물리학자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에서 스티븐슨이 주장하는 것들이 그저 궤변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면, 비슷한 시대에 같은 공간(맥스웰은 스코틀랜드, 패러데이는 잉글랜드 출신이다)에 살았던, 하지만 삶의 궤적이 상당히 달랐던 두 학자도 공감할까 내심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일종의 상상 속 대화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맥스웰은 케임브리지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학자였던 반면, 패러데이는 대장장이 견습생이나 실험실 조수로 일하면서 젊은 시절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둘 모두 전자기학에 빼어난 업적을 남겼고, 현대 물리학에 영감을 주었다. 만약 스티븐슨, 맥스웰, 패러데이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일과 사랑, 인생에 얘기할 때, 서로 어떤 얘기가 오갈지 궁금하다. 특히 패러데이의 의견이 궁금하다. 왠지 패러데이가 스티븐슨의 말에 수긍할 때라야 이 수필이 교과서적인 줄글이 아니라 보다 대중의 공감을 살 수 있는 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아주 엉뚱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fin]
모두가 돈벌이가 되는 직업에 종사해야 하고 이에 불참할 경우에는 책임 모독죄를 묻는 법령에 위촉되어 거의 열광적으로 노고를 기울여야 하는 바로 요즘 세태에, 충분히 가진 것에 만족하고 주위를 돌아보며 즐기자고 주장하는 다른 편의 외침은 허세와 허풍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리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게으름이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계층의 독단적 규정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p. 9
극도의 분주함은, 학교에서든 대학에서든 교회에서든 시장에서든 활력 결핍을 드러내는 증상이다. 빈둥거리는 재주는 폭넓은 욕구와 강한 정체감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우리 주위에는 죽은 거나 다름없는 진부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습관적인 일을 할 때를 제외하면 살아 있음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p. 16
진정한 행복은 어떻게 시작하는가의 문제이지 어떻게 끝내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p. 23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삶(life)이 아니라 생활(living)을 사랑한다.
—p. 35
노인은 한쪽에 서 있고 젊은이는 분명 다른 쪽에 서 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양쪽 다 옳다는 것이고, 그보다 확실한 것은 양쪽 다 틀리다는 것이다. 그들이 다르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하라. 다르다는 데 동의하는 것이 차이의 한 형태라기보다는 일치의 한 형태일지 누가 알겠는가?
—p. 57
솔직히 말해서 사람이 사랑에 빠져야만 결혼한다면 대부분은 결혼을 하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사랑에 빠져 결혼하더라도 집안 풍파를 겪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자는 동물의 왕이지만 집 안의 애완동물로는 적합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지나치게 격렬한 열정이라서 어떤 경우에도 가정에 적절한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p. 67
사실의 진위가 감정의 진위와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p. 109
우리는 남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함으로써만 우리 마음을 이해받을 수 있다. 인간 감정과 관련된 문제에서 가장 너그럽게 판단하는 사람이라야 가장 호소력 있게 간청할 수 있다.
—p. 112
낙오되는 것, 이 고요와 다른 이들의 방기는 무덤의 마지막 고요와 방기에 잘 어울리는 서곡이다. 이렇게 마비된 감각은 죽음의 궁극적 무감각을 서서히 준비해준다. ……우리가 침대에서 뒤척일 때 점점 기운 없이 조금씩 움직이며 더 편안하고 안온한 자세를 취하다가 마침내 한순간 잠에 빠져들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듯이, 그렇게 욕망이 하나둘 떠나가고 나날이 힘이 빠지고 활동 반경이 점점 더 좁아지면서, 그는 자신이 이처럼 부드럽게 삶의 열정에서 떨어져 나와 서서히 죽음의 잠에 빠져든다면 마침내 올 종말도 고요하고 적절하게 다가오리라고 느낀다.
—p.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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