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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 요법일상/book 2021. 9. 11. 21:36
처음으로 접하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은 『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 요법』이다. 원래는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책을 먼저 읽고 싶었지만, 마침 남아 있는 재고가 이 책뿐이었다. 총 스물다섯 개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언뜻 기괴스러우면서도 유머러스한 글들이라 읽는 재미가 있다.
「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 요법」은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편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작위적으로 가르는 한 인물의 광기를 통해 인간의 합리성에 물음표를 던진다. 「단평에 X넣기」, 「작가 싱엄 밥 씨의 일생」, 「블랙우드식 글쓰기」, 「곤경」은 젠체하면서도 속물적인 출판업계의 현실을 고발하는 글들이다. 「기묘천사」, 「종탑의 악마」, 「오믈렛 공작」, 「봉봉」은 재치있는 방식으로 악마를 묘사하고, 악마와 주인공의 대화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지식이 사실은 공허한 신념에 가깝다는 것을 폭로한다. 「안경」, 「작은 프랑스인은 왜 팔걸이 붕대를 했나」 등은 사물 또는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색안경이 세상에 관해 어떤 착시를 일으키는지 풍자한다. 「미라와의 대담」, 「멜론타 타오타」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문명의 발달과 퇴보를 조망하는 다소 실험적인 글쓰기 방식이 활용되고 있다.
에드거 앨런 포라는 이름이 익숙해서인지, 나는 그가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걸쳐 활동한 작가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가 40세라는 짧은 생애를 보냈던 시기는 18세기 초반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의 글이 더욱 현대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의 단편에서는 그가 전형(典型)을 마련했다고 하는 탐정소설들은 빠져 있다. 그의 탐정소설은 다음 기회를 기다려볼 일이다. [fin]
“광인이 완전히 제정신처럼 보일 때야말로 구속복을 입혀야 할 때죠.”
—p. 28
플라톤에게 한 질문은 매우 적절했다. 털 뽑은 닭은 분명 ‘깃털 없는 두 발 동물’인데, 그렇다면 왜 그의 정의대로 인간이 아닌 것인가? 하지만 나는 그 비슷한 어떤 질문에도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사기 치는 동물이며, 인간을 제외하고는 사기 치는 동물은 없다. 이걸 논파하려면 닭장 하나의 닭들 털을 몽땅 뽑아야 할 것이다.
—p. 48~49
사실 나는 지금 생활과 19세기의 생활 전반이 다 지긋지긋하다. 모든 것이 다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게다가 2045년에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도 정말 알고 싶다. 그러니 면도를 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포노너 박사의 집으로 가서 몇 백 년 동안 미라로 만들어달라고 할 작정이다.
—p. 155
이 둑일인들, 이 프린스인들, 이 용국인들, 이 머국인들이 저지른 오류는 물건을 눈에 바짝 붙일수록 더 잘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얼간이의 오류와 같은 것이었죠. 이 사람들은 세세한 것을 보느라 전체를 보지 못했어요. ……그들이 말하는 ‘사실’은 항상 사실은 아니었어요. 그것이 사실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실이고 사실이어야 한다는 가정만 없었다면,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죠. ……실제로 공리라고 볼 수 있는 공리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추론 경로는 마치 양의 뿔처럼 구부러져 있었어요.
—p. 210
모든 사람이 소위 ‘투표’를 했대요. 그러니까 공무에 참견을 했다는 거죠. 그러다가 결국 만인의 일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공화국’에서 정부가 사라져버릴 때까지 그런 체제를 유지했답니다. 하지만 이 ‘공화국’을 건설한 철학자들의 자아도취를 처음으로 흔든 건, 보통선거를 통해서 사기 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뻔뻔한 정당이 언제든지 원하는 수의 투표를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사전에 방지하거나 감지해낼 수 없기 때문에 사기를 칠 기회가 생긴다는 걸 깨달은 사건이라고 해요.
—p. 243
수학적으로 보았을 때 원은 무한한 직선이 모여 이루어진 곡선이에요. 하지만 원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사실 따지고 들면 실질적인 신념이에요.
—p. 245
“우린 어느 날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만났는데, 생각이 안 떠올라 괴롭다고 하더군. 그래서 ‘ο νους εοτιν αυλος(마음은 휘파람이다)’라고 쓰라고 했지. 플라톤은 그러겠다며 집으로 갔고 나는 피라미드로 넘어갔어. 하지만 아무리 친구를 돕기 위해서라지만 진실을 말해 버렸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다시 서둘러 아테네로 돌아가 철학자의 의자 뒤에 딱 도착했더니, 마침 ‘αυλος’를 쓰고 있더라고. 그래서 손가락으로 람다(λ)를 튀겨서 거꾸로 뒤집어놨지. 그래서 그 문장이 이제 ‘ο νους εοτ αυγος(마음은 빛이다)’가 됐고, 자네도 알겠지만 플라톤 형이상학의 기본학실이 된 거야.”
—p. 279
이제 계단을 다 올라서 이제 우리와 꼭대기 사이에는 서너 계단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올라갔고 이제 계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딱 하나! 조그맣고 조그만 계단 하나! 인생이라는 길고 긴 계단에서 저런 조그만 계단 하나에 종종 얼마나 커다란 행복과 불행이 달려 있는가!
—p. 295
그 순간 끔찍하게 충격적이고 경악스럽게도 나는 내 숨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 315
죽은 자의 자격을 가지고 살아 있는, 산 자의 성질을 가지고 죽어 있는, 몹시 차분하지만 숨이 없는 지상의 변칙적 존재
—p. 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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