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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 주 정도 번아웃이 왔던 것 같다. 결정내리지 못한 채 차일피일 미뤄온 문제들도 있었고 해야 할 거리도 많았다. (또는 많다고 느꼈다.) 잠시 숨돌릴 시간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던 지난 주 집어든 책이 「쇼코의 미소」다. 최대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았던지라, 무라카미의 짧은 에세이라도 원서로 읽어볼까 했지만 서점에 소개된 게 그리 많지 않았고, 온라인으로 주문한 페렉의 「인생사용법」은 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 두께가 꽤 나가서 조금 읽다가 말았다. 결국 번역을 거치지 않은 우리말이면서 서정적인 서사를 담고 있을 것 같은 「쇼코의 미소」로 손이 갔는데, 사실 이 책은 성석제의 글과 더불어서 꽤 오래전부터 읽고 싶은 책이었다.
책의 말미에 문학평론가는 무덤덤하게 꾸밈없이 글을 쓰면서도 흡입력을 갖춘 것이 최은영 작가의 강점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글에서 가장 강렬하게 받은 인상은 소재나 등장인물이 다채롭다는 점이다.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온 일본학생 쇼코, 독일 이민자 사회에서 만난 베트남 꼬마 투이, 프랑스의 한 수련캠프에서 만난 케냐 청년 한지, 러시아로 문학을 공부하러 떠난 대학선배 미진까지. 과연 소설로 엮어낼 수 있을까 싶을 만한 소재들로 연결고리를 만들어내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그려낸다.
소설에서 주로 다뤄지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관한 것이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관계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멈추지 않고 칭동(秤動)한다. <쇼코의 미소>에서 쇼코의 병약한 모습을 발견한 '나'는 잠시 우위에 선 기분을 느끼지만, 후일에 자신과 쇼코가 사실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씬짜오, 씬짜오>에서는 역사 속에서 선인(善人)을 자처했던 한국의 일가족이 누군가에게는 악인의 그림자로 비추어질 수 있으며, 과거의 어느 사건이 집단의 기억 속에 영속할 수 있고 그러한 기억이 현재의 관계에 상흔을 남길 수 있음을 암시한다. <언니, 나의 언니, 순애 언니>에서는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고 사상만을 좇는 남자와 그를 바라지하는 순애 언니를 바라보며 상대적으로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 화자가 마음의 위안을 얻지만, 삶의 무게와 가치란 것이 그렇게 단면적으로 풀이될 수 없다는 것이 순애 언니의 시각을 통해 드러난다. <한지와 영주>에서는 마음을 쉬이 열지 못하는 두 청춘의 조우(遭遇)와 이별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말문을 닫아버린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소통에 대한 갈구를 열린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또한 <먼 곳에서 온 노래>는 자신에게 늘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었던 한 대학선배에게 느꼈던 이율배반적인 감정과, 그러한 선배의 부재가 다가왔을 때 화자가 느끼는 선배의 존재감을 그리고 있다. <먼 곳에서 온 노래>를 읽으며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고 반가웠다.
끝으로 뒷쪽에 수록된 <미카엘라>와 <비밀>은 앞선 수록작들보다 현실 속 사건을 반영한 글이다. 영화 <벌새>에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그렸던 것처럼, 두 작품 <미카엘라>와 <비밀>은 세월호 참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등장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앞선 수록작들과 마찬가지로 마음, 관계, 유대를 그리고 있다는 점은 똑같다. 지금에 와서 2014년의 그 사건을 아무런 굴절 없이 바라보기에는 그 동안 오며가며 접한 정치적 수사와 흥분한 미디어의 논조들로 나의 렌즈 역시 얼룩져 있을 테지만, 앞으로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데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매일마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한국사회라는 거센 물결 위에 굵고 커다란 동심원을 그렸던 당시의 사건과, 그로 인해 마음의 퍼즐 하나가 빠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미카엘라>와 <비밀>은 그리고 있는 것이다.
번아웃된 시기에 이 책을 읽은 건 좋은 선택이었다. 읽는 동안 마음이 누그러졌다. 대신에 조금 더 한국소설을 찾아 읽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끝]
대부분의 시간은 무기력했고 가끔씩 정신이 맑아질 때는 내가 내 정신을 연료로 타오르는 불처럼 느껴졌어.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것들에 화가 났어. 그렇게 화를 내고 보면 몸이든 정신이든 재처럼 부서져버리는 거야. 그런 과정들을 반복했어. 사람들은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를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말하더라. 나는 하루하루 죽고 싶었던 기억밖에 없었는데도.
—p. 41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p. 89~90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p. 115~116
두려움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나를 추동했고 겉보기에는 그다지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 어른으로 키워냈다. 두려움은 내게 생긴 대로 살아서는 안 되며 보다 나은 인간으로 변모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었다. 달라지지 않는다면, 더 나아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계에서 소거되어버릴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에 머물기를 택했다.
—p. 129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p. 164
그 눈물은 고독이 없었던 시간에 대한 애도였다.
—p. 179
나에 대한 선배의 끝없는 관심과 조언이 고마웠지만 그 고마움만큼이나 불쾌감도 커졌다. 선배가 ‘나’의 테두리를 짓밟고, ‘나’라는 공간을 무례하게 침입하는 것 같았다. 선배는 멀리레 있으면서도 내게 너무 가까웠다. 나는 나의 가장 추한 얼굴까지도 거부하지 않는 선배의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애초부터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이었으니까.
—p. 206'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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