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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삶과 죽음일상/book 2021. 11. 20. 11:52
이번 달 들어서 읽은 두 번째 책이다. 번역도 잘된 책인데 처음 4분의 1정도를 읽고 그만 내려놓을까도 생각했다.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글에 프랑스사람들은 비유나 메타포를 많이 집어넣어서 현기증(?)을 느끼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서구 가톨릭이 동쪽의 비잔티움 문화권보다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된 이야기까지는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사실 이미지를 바라보는 시선을 기준으로 문화권을 나눌 생각을 못해봤기 때문에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비잔티움 세계 너머 유럽 기준으로 더 동쪽으로 가면, 그러니까 이슬람 문명에서는 마호메트에 대한 소묘나 조각이 엄격히 금지된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그래서 회화보다는 캘리그라피나 모자이크가 발달해 있다.
이미지에 대한 서구적 시선은 이후에 로고스페르(우상과 상징의 시대)-그라포스페르(인간과 표현의 시대)-비데오스페르(탈인간적-광고의 시대?)로 이어진다. 뭔가 딱 한 문장으로 글의 요지를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정리를 하자면 서유럽 사람들이 이미지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위의 세 가지 시기를 거치며 변화해 왔다.
이렇게 도식화를 해놓고 나니 또 막상 너무 허전하다. 레지스 드브레는 이러한 변천을 설명하기 위해 굉장히 다양한 설명과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가령 서구인들이 그라포스페르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라는 방아쇠가 있었지만 동시에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에서는 풍경과 인물에 천착한 (그러니까 처음으로 신이 아닌 것을 대상으로 한) 그림들이 그려지기 시작하는 현상이 목격된다. 사실 이들 북유럽 지역은 라틴 문화권과는 달리 보다 추상적인 것을 좋아했던 지역이고, 그런 까닭에 음악이 융성하고 신체에 대한 묘사는 희귀했던 곳이다. 뒤이어 프랑스의 절대왕정에서는 표준어를 내세워 지역 방언을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구텐베르크 활자는 글자를 대중적으로 보급하면서 이미지의 상대적 위치를 변화시킨다. 기술의 발달로 근대적인 도시들이 등장하면서 손(농촌의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눈(시선)이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수요가 점증한다. 고대나 현대나 변함없이 '돈'으로 매개된 예술활동이 이미지에 대한 수요를 옮겨놓았고, 사진술의 발명은 다시 이미지의 입지를 바꾸어 놓는다 등등등.
단연 주목해서 볼 만한 것은 비데오스페르에 관한 대목이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 이미지에 대한 시각이다. 이 책 자체는 서구적인 시선에 관한 것이라고 주제에 단서를 달고 있지만, 레지스 드브레가 말하듯 헐리웃 영화와 같은 매개물을 통해 이미지가 세계적인 언어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비서구라고 해서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레지스 드브레의 표현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나만 있을 수는 없듯이 타인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미술작품에 손(만드는 이)과 눈(보는 이)이 있어야 이미지의 존재 가치가 발생하는 것처럼, 결국 나와 너가 매개될 때라야 존재로서의 의미를 띨 수 있다. 이러한 문구를 떠올리는 것은 비데오스페르에 접어들면서 오로지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만이 자가증식하고, 의미와 인간을 매개해야 할 이미지가 오히려 인간을 주변부적 존재로 내몰고 있는 오늘날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의적절한 문구인 것 같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서는 예수의 입상 하나가 (그것이 잘 빚어졌든 못생기게 빚어졌든) 신의 현전을 기정사실화하는 지표이었다. 그리고 근대의 여러 풍경화와 성화(聖畫) 속 여러 기호들을 더듬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개성적인 고유의 시선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 인간에게 예술 또는 이미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드라마를 보다보면 갑자기 중간광고가 끼어든다. 휴대폰을 가로로 손에 쥐고 앞을 보지도 않은 채 횡단보도를 건넌다. 아기자기하게 예쁘게 꾸민 카페는 도시에 차고 넘친다. 간단한 터치 한 번으로 원하는 스타일의 옷을 구매한다. 업로드한지 얼마 되지 않은 영상클립이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조회수 몇천만 명을 기록하는 것은 이제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SNS를 통해 보기 좋게 편집된 타인의 일상을 예의주시한다. 이미지는 언제나 글보다 손쉽고 안락하다. 시간과 공간의 단축과 압축이 빨라진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어느 것이든 볼거리가 된 시대에 그것은 더 이상 볼거리라 할 수 없다. 나와 이미지를 매개한 뒤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매개는 생략된다. 모든 것은 순간적이고 쉽게 휘발되어 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새벽을 맞이하는 황혼'처럼 고대의 우상숭배와 맞닿아 있는 것일 수 있겠다고 레지스 드브레는 말한다. 수많은 아이돌과 이콘의 탄생. 온라인으로 화형식을 치르고 며칠 뒤면 말끔히 잊혀질 간단한 구경거리들. 고대와 현대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고대의 서구인은 이미지를 통해 신의 현현을 확신했지만, 현대인들은 이미지로부터 더 이상 어떠한 확신도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레지스 드브레가 말하듯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오늘날의 저널리즘도 마찬가지다. 과연 여러 언론매체가 전달하는 영상과 보도는 어디까지가 우리의 시각이고 어디까지가 되짚어볼 만한 부분인가?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정기적으로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며 오늘 하루가 잘 마무리되었다며 안심할 이벤트를 찾을 뿐, 뉴스 화면 속에서 살갗으로 와닿는 의미를 찾지는 않는다. 영 지루하면 리모컨으로 꺼버리면 그만인 세상이다. 별 게 없다 싶으면 어플을 종료하면 될 일이다.
읽을 때는 좀 퍽퍽하게 읽히기도 했지만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조금 힘든 독서도 다 끝난 다음에는 크고 작은 보람이 있다. 갓 떨어진 단풍나뭇잎을 책갈피 삼아 페이지 사이로 끼워넣으며 총총. [fin]
묘소가 박물관이 없던 문명에서 박물관 노릇을 했듯이 우리의 박물관은 더는 분묘를 세우지 않는 문명에서만 볼 수 있는 무덤인 셈이다.
—p. 23
저 너머의 저승이 있으려면 현실 세계의 중개가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배경이 없이는 보이는 형태도 없다. 덧없는 것에 대한 고뇌가 없다면 기억이란 것도 필요하지 않으리라. 불멸의 것은 사진에 찍히지 않는다. 신은 빛이고 오직 인간만이 사진을 찍는다. 왜냐하면 사라져가는 자만이, 또 그 사라짐을 아는 자만이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p. 33
기술과 신념은 함께 진화하면서 우리를 보이는 것의 세 단계의 역사적 시기로 안내한다. 즉 마술적 시선과 미적 시선 그리고 경제적 시선이다. 첫 번째 것은 우상을 불러내고, 두 번째 것은 예술을, 세 번째 것은 영상을 불러냈다. 비전 못지않게 바로 여기에 세계를 조직하는 방법이 있다.
—p. 63
기호가 있는 곳은 문인이 있는 곳 저 너머이다. 즉 그에게는 약속의 땅이라기보다 잃어버린 낙원이다.
—p. 71
나만 존재할 수 없듯이 타인만 존재할 수 없다.
—p. 97
‘I(정보)×C(통신)=상수’, 이것이 상징 요소에 대한 ‘보일의 법칙’일 것이다. 이미지들이 더 빈곤할수록 거기에 동반되는 ‘통신’이 더 많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의미하는 것이 적을수록 언어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p. 99
무신론자이든 신자이든, 우리가 이슬람식으로 하느님의 주문을 외어대며 축원을 반복하지 않게 된 것은, 우리가 천사의 성별이나 따졌다며 경시했던 이 ‘비잔티움 사람들’ 덕이다. 그들의 까다로움 덕분에 금욕주의의 불길이 서구를 삼키지 못했다.
“하느님의 상상력”이 강생의 길을 깔아주었다. 그것은 신성의 세계적 분배를 주도했고 섭리의 경제를 주관했다. 니케포루스는 “이미지를 거부하는 자는 경제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여기에서 나중에 “좁은 문을 통해 큰 것을 얻는다”는 예수회의 것과 비슷한 교리가 나온다.
—p. 129~130
가톨릭 지역에서 최소한의 것이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최대한의 것이다. 신체를 더 경멸하는 문화일수록 형상을 더 혐오한다.
……회화의 관능성과 어려운 음악의 이지적인 면에 주목해보자. 시력은 만지는 것보다 더 지능적이지만 듣기보다는 덜 지능적이다. ……보통 천사들은 연주자로 그림 속에 나타나지만, 그들이 이젤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p. 140~141
이미지는 글보다 전염성과 감염력이 크다. ……이미지에는 신념 공동체를 ‘땜질하듯 녹여 붙이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 집단의 이상적인 상(像)을 중심으로 그 성원들을 일체화한다. 접착제 같은 시각적인 재료가 없다면 조직적인 군중도 없다. 십자가, 목회자, 붉은 깃발과 마리안 같은 것이다.
—p. 154
구전문화에서 필기문화로의 이행이 종교적 특수어와 지역 방언의 용해를 거치면서 ‘영토의 민족적 통일’에 골을 새겨놓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각적 문화로의 이행은 상상력을 민족 산업에 녹이면서 ‘시선의 세계적 통일’ 속에 골을 파놓았다. ……첫 번째 르네상스는 민족어라는 모두를 위한 단 하나의 사전이었다. 두 번째 르네상스는 모두를 위한 유일한 거울인 제국의 영화, 우리의 “또다른 모국어”인 할리우드 영화이다.
—p. 173
말과 이미지의 역학은 본질도 다르고 같은 의미를 가리키지도 않는다. 말은 우리를 앞으로, 이미지는 뒤로 내몬다. ……글로 쓰인 것은 비판적이고 이미지는 자기도취적이다. 글은 깨우지만, 이미지는 경계심을 잠재운다. 심지어 달콤하게 정신을 홀리기도 한다.
—p. 188
왜 미술사는 각 시대의 감수성을 폭로하는 가운데, 사상사는 물론 심지어 사건의 역사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것일까? …..왜냐하면 감각적인 이미지는 ‘열등한’ 동력원에서 자양분을 취하며, 따라서 ‘우월한’ 정신활동보다 덜 감시받고 더욱 반칙적이며, 더욱 자유롭고 덜 통제받으면서 이 세상에 메아리치기 때문이다.
—p. 197
이미지라는 구경거리는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적인 세 가지 지속성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즉 느낌으로 느끼는 감정상의, 시간을 넘어선 시간이 있다. 또 이런저런 이미지가 자리잡는 주기의 수단이 되는 보통의 시간이 있다. 마지막으로 ‘흔적을 남길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인 ‘사피엔스’의 역사를 관통하는 직선적인 시간이 있다. ‘개인’이라는 장면, ‘역사’라는 시퀀스, ‘종(種)’이라는 영화와 같다. ……그 각각의 이미지는 세 사람의 철학자와 걸맞아 보이지 않던가? 즉 헤겔, 베르그송, 비코가 아닐까? 우선 열역학적 시간이다. 찬 것을 더운 곳으로 바래다주며, 차이가 나는 것을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개별적인 것을 혼돈 상태로 이끄는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은 ‘도약과 몰락’, ‘영광과 퇴폐’, ‘절정과 끝’이 있다. 그다음으로 에너지 집중적인 시간은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것으로, 새로운 것과 영속하는 것에서 나온다. 그것은 ‘혁신’, ‘발견’, ‘발명’이다. 끝으로 천문학적인 시간에서는, 모든 황혼이 새로운 여명을 알린다. 또 사이를 두고서, 상상의 어떤 주기를 그 출발점으로 돌아오게 한다. 또다른 성숙을 위한 여행이다.
—p. 261~262
인간이 자연에 새롭게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 수가 없다. 왜냐하면 독창성은 ‘인간의 저 위에 또 그보다 훨씬 먼저’ 오직 창세기라는 기원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람이나 중세 기독교도 사이에서, 그것이 어떻든간에 창조라는 관념은 단 한 발만이 장전된 권총이다.
—p. 292~293
묘사적 또는 설명적 태도에는 명백하게 손에 대한 봉사에서 벗어난 눈이 있어야 한다.
—p. 300
우리의 새로운 시각적 부주의는 주로 전기통신과 교통수단의 혁명에서 비롯된다. 거리를 제거함으로써 땅에 기대었던 감정과 사건,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외재성에 대한 실감이 동시에 상실된다. 모든 것이 노력하지 않고서도 재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된다.
—p. 331
넓은 의미로 우상 시대와 일치하는 ‘로고스페르logosphère’가 있다. 이 시기는 문자의 발명부터 인쇄의 발명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 있다. ‘그라포스페르graphosphère’는 예술의 시대이다. 이 시기는 인쇄술에서 컬러텔레비전이 등장할 때까지 펼쳐진다. ‘비데오스페르vidéosphère’는 영상 기기의 시각에 따른 시기, 즉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시대다.
—p. 338
그리스 로마 ‘미술’은 지표를 성상으로 옮겨 놓는다. 현대미술은 지표를 상징으로 옮긴다. ‘영상’ 시대인 오늘날, 미술의 고리는 전도된다. 또 모든 상징적인 기호로부터 지표에 대한 절망적인 탐색으로 되돌아온다.
—p. 352
예술작품이 이렇게 값비싼 적은 없었고, 예술가들이 사회에 이보다 더 잘 적응한 적은 없었다. 또 오늘날처럼 많은 수집가가 있었던 적도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소비자가 박물관으로 밀려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을 맞이하는 기념비적 장소는 타지마할이나 에펠탑이 아니라 퐁피두센터이다.
—p. 388
일반적인 법칙에 따라 볼 때, ‘교회가 텅 빌 때, 박물관은 들어찬다.’
등대와 박물관과 거대한 도서관 사이에서 예술에 대한 ‘골동품’적 숭배가 만개했다. ……비대한 도시, 과도한 오락, 놀이와 구경거리에의 탐닉, 어릿광대와 격투사 숭배, 남성과 여성세계의 융합, 성적 교차성 부추기기, 만연하는 표절적 현학 취미, 인용이 불가피한 교차적 텍스트의 조장, 가축을 사람 대하듯 하기, 어린이를 바보로 만드는 일에 대한 예찬, 새로운 것에 대한 광증, 또 ‘잘되가는’ 것에 대한 광증, 곳곳에 산재한 에로티시즘, 거창한 토로.
—p. 409~410
어째서 원색 비디오이미지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절을 보게 되는 것일까? 누적된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음극관은 ‘투영’에서 ‘방사’로, 또는 ‘외부로부터 반사된 광선’에서 화면을 통해 ‘방영되는 광선’으로 옮겨갔다.
……비디오스페르와 더불어 우리는 ‘구경거리 사회’의 종말을 들여다본다. ……우리는 과거에 이미지 ‘앞에’ 있었지만 지금은 영상 ‘속에’ 있다. 형상의 분출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마비시킨다. 눈에 들리는 소음이라고나 할까? 우리 제3세기, 즉 영상 체제의 역설은 바로 여기, 청각의 우선권에 있다.
……청취에는 수동성, 비전에는 자율성의 원리가 있다. 우리는 어떤 책장을 건너뛸 수 있지만, 영화관에서 관객에게 그 전개 과정과 리듬을 부과하는 상영 중인 필름의 연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소리는 ‘파토스’의 편에 있고 이미지는 ‘이데아’ 편에 있다. 소리에는 감정, 이미지에는 추상이 있다.
—p. 438~440
영상은 서로서로 소통하고, 이제 그 자신에 대한 욕망밖에 지니지 않게 된다. 현기증 나는 거울이다. 즉 미디어는 점점 더 우리에게 미디어 자신을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가책으로서만 우리의 양심이 되었고 우리가 ‘현실’이라 불렀던 이 외적 결함, 이 빈칸을 지워버릴 정도로까지 말이다.
—p. 470
문제는 윤리란 타인이라는 사실이다. 타인이 사라지는 자리에서 어떻게 올바른 윤리가 가능할까? 우선 이미지의 윤리성이 문제이다. 대상이나 주체에 대한 존중 이외에도 시각의 상호 교류가 가능함을 전제로 해야 하는 윤리 말이다. 폭격기에서 내려다보고 폭격한 장면은 경제적인 시점을 반영한다. 폭격 장면과 번갈아며 연출된, 폭격당하는 사람들이 올려다본 폭격기의 장면은 윤리적인 관점을 이룬다.
—p. 473
영화 이미지는 가벼운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고, 비디오 이미지는 진지한 것을 가볍게 만든다.
—p. 488
텔레비전 영상은 인상기록적인 또는 상상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성장시키고 텔레비전은 퇴행시킨다. 큰 화면을 통해 청소년은 어른이 되고, 작은 화면을 통해 어른은 청소년이 된다.
상영된 이미지는 ‘전체화’의 논리를 따르고 방영된 이미지는 ‘단편화’의 논리를 따른다. 지속성과 장르, 사건과 대중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가 하나의 이야기나 담화를 제안하기 위해 잠재 집단, 즉 민중이나 대중과 시각적인 관계를 맺는 데 반해, 텔레비전은 접촉을 통해 국부적인 자잘한 강렬함을 뇌동시키기만 해도 된다. 텔레비전은 공동체를 만들지 않고 주민들을 범주와 분야에 따라 흩뜨려놓는다.
—p. 490, 492
이미지는 분리의 통사적 조작 장치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종속절도 모르고, 모순관계처럼 인과관계도 모른다. ……줄거리는 배우보다 덜 중요하다. 이미지는 논리의 상위 차원에 대한 가능성을 지니지 못한 채, 단 하나의 현실 차원에서 늘어놓고 덧붙이는 방식으로만 진행된다. 이미지에 의한 사고는 비논리적이 아니라 무(無)논리적이다.
—p. 503
“지성이란 거짓의 파괴와 판단력, 가정(假定)할 줄 아는 정신이 결합된 것이다.” ……연결되어 있고 선(線)적이며 객관적인 문자의 돈키호테는 주변에서 텔레비전 이미지의 냉소적인 유동성과 똑같이 냉소적이고 유동적인 사회를 보게 될 것이다. 머리도 꼬리도 없이 모자이크 된 우리의 프로그램과도 닮은, 논리도 연관성도 지니지 않은 근시안적인 정신을 보게 될 것이다. ……끊임없는 소음은 침묵과 유사하기 때문에 실어증은 이상적인 완전무결함이 된다. 반대로 비디오와 함게 저녁을 보내는 산초는, 다시 말해 이 얘기 저 얘기 횡설수설하며 흡족한 마음으로 리모컨 단추를 누르는 산초는 관점과 제안이 풍성하게 존재하는 창의력 있는 세상에 태어난 것에 만족해할 것이다.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자유로운 연상과 시적인 환기력으로 풍요로운 세상, 상황과 공감, 신체적인 참여에서 오는 감정적인 가치가 우리를 권태와 논리적 추상성의 냉소적인 비정함으로부터 구원하러 오는 세상, 그는 이런 세상에 태어난 것을 만족해할 것이다.
—p. 506~507
이런 것이 바로 행복감을 느끼는 비디오 병(病) 아닐까. 즉 ‘성가신 것’과 ‘뉴스’ 사이에서 짧은 확인 절차로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보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예상대로’ 잘 굴러가는 통제하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예술’이 가리키는 것이라면, 거기에서 예술은 더는 별것 아닌 그런 세계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보이는 데에서는 시선의 승리 못지않게 그 퇴색도 뚜렷하다. ……우리가 관광객으로서 풍경과 기념비를 더 많이 촬영해대면 해댈수록, 우리는 그것을 더욱더 생각하지 않게 된다.
—p. 512
모든 공공장소에서 결코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얼굴보다, 이미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의 우선권은 법이 된다. 질서 이쓴 사회의 기준이 되는 가시성이다. 즉 한편에 새로운 귀족인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 공인된 의견의 발신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무시당하는 사람들 또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화면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p. 518
민주주의는 다수의 법이 아니라 (히틀러는 민주주의적으로 선출되었다) 소수에 대한 존중이다.
—p. 519
보이는 것은 결국 글로 쓴 것보다 두 배를 이긴다. 우선 그것은 더 빠르다. 그리고 더 생생하다. 그것은 우리의 초조함과 혼자 남아 있는 것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진정시킨다. 모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위기의 시대에는 공동체적 연대를 다시 조이고 사회적 신체에 열기를 불어넣으며, 집단적 재집결을 촉진한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공명상자로서 그렇게 완비되었다.
—p. 530~531
비디오 화면 위에서 가장 적절한 ‘사실 효과’는 함정에 빠져 있다.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그 이미지 앞에서, 나는 화면의 또다른 편에서, 그 녹화된 현실 속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하지만 그 어떤 시선도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자동카메라도 인간 의지에 따라 설치되고 촬영되고 멈춘다. 어떤 사실이나 어떤 인물을 보여준다는 것이 그것을 존재하게 한다. 그러나 그 인정의 이면에는 보여주지 말기로 선택한 사회적 제거 과정이 있다. 바로 이런 선택적 제거가 문제화되지 않는다. 글쓰기에서보다 시청각 정보에서 그 정도는 훨씬 심하다.
—p. 533'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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