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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일상/book 2021. 11. 29. 10:52
오늘 새벽 운동을 하다가 오늘이 11월 29일인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 사람들이 인삿말로 다음달에 보자고 하는데 잠깐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 (왜 벌써 다음달이지?!!)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흐르고 바쁜 건 바쁜 거지만 11월이 다 지나가기 전에 북리뷰를 하나 더 남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소설은 모처럼(?)만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다.현대 일본문학이 밍밍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허무주의가 싫다 싫다 하면서도 무라카미의 글을 참 많이 읽었던 것 같다. 이참에 궁금해져서 리스트업을 해보자면, 작품이 발표된 순서대로 『코끼리의 소멸 단편집』, 『노르웨이의 숲』, 『어둠의 저편』,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기사단장 죽이기』, 그리고 이번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 에세이는 2007년도에 발간된 것으로 쓰여져 있다)까지다. 또 이렇게 써놓고 보니 많이 읽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한 게, 무라카미가 생각보다 다작을 한 작가다. 어쨌든 한 해에 한 편 정도는 일본어 원서를 꾸준히 읽자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최근 작품으로 올 수록 빠지지 않고 작품을 찾아봤던 것 같다. 일본어 원서를 읽는 것보다 영어 원서를 읽는 게 여러모로 더 유익할 텐데 하면서도 올해 들어 두 번째 일본어 원서를 집어들었다. 사실 진짜 문제는 원서를 읽는지의 여부보다는 책을 읽고 나서 머릿속에 잘 기억해두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점이지만.
무라카미의 '수필'은 처음이다. 무라카미가 하루에 딱 쓸 만큼 글을 쓰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책까지 썼던 만큼 소설가로서의 직업관을 꽤 명확히 갖고 있는 듯하다. 사실 나처럼 글을 소비하기만 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어쩐지 소설가는 한번 영감을 받으면 밤새도록 글을 써내려가고, 영감이 나타나지 않으면 나타날 때까지 고뇌에 빠져 술과 담배에 빠져 있을 것 같은(?) 스테레오타입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마치 샐러리맨처럼 정해진 시간에 글을 풀어내는 작업을 한다는 게 의외이면서도, 사실 의외라고 할 것도 없이 현대 작가들은 대체로 비슷한 작업 패턴을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니겠나 싶다. (정작 샐러리맨이야말로 칼퇴하지 못한다는 게 아이러니=_=)
수필인 만큼 자신의 개인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무라카미가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장사를 했다는 것도, 그가 교토 출신이라는 것도,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내용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들이다. 자신은 장사를 하며 온갖 사람을 상대하며 교훈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에드거 앨런 포 같은 작가에 비해서는 순탄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물론 작가라고 하면 모름지기 인생에 우여곡절을 겪어야 한다는 것도 하나의 선입관인 것이고, 오히려 평범한 커리어를 쌓아가던 그가 지금과 같은 소설가로 변모한 것이 어쩐지 더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그는 그런 자신의 삶이 일종의 '안티-클라이맥스'와 같다고도 묘사하는데, 말 그대로 자신의 인생과 본성(nature)에 대단히 극적이랄 만한 것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는 지고는 못사는 성격도 아니었고, 오히려 어느 정도는 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편이었다. 더는 지는 편에 서고 싶지 않아 달리기를 통해 자신을 연마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네이쳐'라는 그릇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는 손에 들린 보스턴백을 자신의 삶에 비유하면서, 대단히 눈에 띄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애착과 같은 게 있었다고 말한다.
조금 더 생각을 명료히 정리하기 위해, 이번 그의 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표현을 꼽자면, 122페이지에서 '나는 내가 쓰는 소설이 좋다(僕は自分が今書いている小説が、自分でも好きだからだ。)'고 하는 대목이다. 아주 평범한 문장인데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볼 때 가장 진실함이 와닿는 문장이었고, 자신이 빚어낸 생산물을 긍정하는 태도에 조금 놀랐다. 놀랐다는 것은 이름이 알려진 소설가라면 창작 과정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스스로를 괴롭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수긍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이토록 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직업으로써 소설을 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정말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늙었다고도 그러나 젊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에 소설가로서 커리어를 틀었기 때문에, 세월의 흐름 안에서 자신의 능력치가 조금씩 마모되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무라카미 그 자신도 알고 있다. 요절한 작가들처럼 짧은 시간에 집약적으로 천재성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다만 자신이 좋아해서 계속할 수 있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있었고 그러한 강점을 다져 나가겠다는 자세도 보인다. 물론 자신이 소설가로서 성공한 지금의 지위에 있기 때문에 좀 더 느긋하게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을 테고 얼마간 나르시시즘이 묻어나는 글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글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독자가 다시 한 차례 주관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내게는 와닿는 느낌이 분명했던 문장이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무라카미가 더 좋아졌다고는 못하지만 그의 소설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특히 중학교 때 읽어서 기억에서 거의 가물가물해진 『노르웨이의 숲』(당시에는 '상실의 시대'로 나왔었는데 요새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통일되어 출판되는 것 같다)을 원서로 좀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해변의 카프카』도 읽어보고 싶기는 한데 문고본조차도 두께가 상당해서 아직은 읽을 엄두를 못내겠다. 독서를 꾸준히 하기야 하겠지만 속도가 더딜 것 같다. 이번 북리뷰는 무라카미의 마라톤 사진(을 넣으려다가 영 마땅한 게 없어 아무 마라톤 사진을 싣는다. 무라카미가 뛰는 모습은 그리스 마라톤에서 찍은 사진 등등 멋진 사진이 책이 많이 실려 있음.)과 함께 마침표를 찍는 것으로. [終]
走り手としては極めて平凡なレベルだ。しかしそれは全く重要な問題ではない。昨日の自分をわずかにでも乗り越えていくこと、それがより重要なのだ。長距離走において勝つべき相手がいるとすれば、それは過去の自分自身なのだから。
—p. 26
他人と優劣を競い勝負を争うことは、僕の求める生き方ではない。つまらない正論を述べるようだけれど、いろんな人がいてそれで世界が成り立っている。他の人には他の人の価値観があり、それに添った生き方がある。僕には僕の価値観があり、それに添った生き方がある。そのような相違いは日常手に細かなすれ違いを生み出すし、いくつかのすれ違いの組み合わせが、大きな誤解へと発展していくこともある。その結果故のない非難を受けたりもする。当たり前の話だが、誤解されたり避難されたりするのは、決して愉快な出来事ではない。そのせいで心が深く傷つくこともある。これは辛い体験だ。
しかし年齢を重ねるにつれて、そのような辛さや傷は人生にとってある程度必要なことなのだと、少しずつ認識できるようになった。考えてみれば、他人といくらかなりの異なっているからこそ、人は自分というものを立ち上げ、自立したものとして保っていくことができるのだ。僕の場合でいうなら、小説を書き続けることができる。一つの風景の中に他人と違った様相を見てとり、他人と違うことを感じ、他人と違う言葉を選ぶことができるからこそ、固有の物語を描き続けることができるわけだ。そして決して少なくない数の人々がそれを手に取って読んでくれるという希有な状況も生まれる。僕が僕であって、誰か別の人間でないことは、僕に取っての一つの重要な資産なのだ。心の受ける生傷は、そのような人間の自律性が世界に向かって支払わなくてはならない当然の価値である。
—p. 37〜38
人生は基本的に不公平なものである。それは間違いないところだ。しかし例え不公平な場所にあっても、そこにある種の公平さを希求することは可能であると思う。それには時間と手間がかかるかもしれない。あるいは、時間と手間をかけただけ無駄だったね、ということになるかもしれない。そのような公平さに、あえて希求するだけの価値があるかどうかを決めるのは、もちろん個人の裁量である。
—p. 69〜70
いずれにせよ、僕はそのようにして走り始めた。三十三歳。それが僕のその呼気の年齢だった。まだ十分若い。でももう‘青年’とはいえない。イエス・キリストが死んだ歳だ。スコット・フィッツジェラルドの凋落はそのあたりから既に始まっていた。それは人生の一つの分岐点みたいなところなのかもしれない。そういう歳に僕はランナーとしての生活を開始し、遅まきながら小説家としての出発点に立ったのだ。
—p. 74
最初にお断りしたことだが、僕は負けず嫌いな性格ではない。負けるのはある程度避け難いことだと考えている。人は誰であれ、永遠に勝ち続けるわけにはいかない。人生というハイウェイでは、追い越し車線だけをひたすら走り続けることはできない。しかしそれとは別に、同じ失敗を何度も繰り返すことはしたくない。一つの失敗からなんかを学び取って、次の機会にその教訓を活かしたい。少なくともそういう生き方を続けることが能力的に許される間は。
—p. 83〜84
このような能力(集中力と持続力)はありがたいことに才能の場合とは違って、トレーニングによって後天的に獲得し、その資格を向上させていくことが机の前に座り、意識を一点に注ぎ込む訓練を続けていれば、集中力と持続力は自然に身に付いてくる。これは前に書いた筋肉の調教操作に似ている。日々休まずに書き続け、意識を集中して仕事をすることが、自分という人間にとって必要なことなのだという情報を身体システムに継続して送り込み、しっかりと覚え込ませるわけだ。そして少しずつその限界値を押し上げていく。気づかれない程度にわずかずつ、その目盛をこっそりと移動させていく。これは日々ジョギングを続けることによって、筋肉を強化し、ランナーとしての体型を作り上げていくのと同じ種類の作業である。刺激し、持続する。刺激し、持続する。この作業にはもちろん我慢が必要である。しかしそれだけの見送りはある。
—p. 117〜118
いずれにせよ、ここまで休むことなく走り続けてきてよかったなと思う。なぜなら、僕は自分が今書いている小説が、自分でも好きだからだ。この次、自分のうちから出てくる小説がどんなものになるのか、それが楽しみだからだ。一人の不完全な人間として、限界を抱えた一人の作家として、矛盾だらけのパッとしない人生の道を辿りながら、それでもいまだにそういう気持ちを抱くことができるというのは、やはり一つの達成ではないだろうか。いささか大げさかもしれないけれど‘奇跡’と言ってもいいような気持ちさえする。そしてもし日々走ることが、そのような達成を多少なりとも補助してくれたのだとしたら、僕は走ることに対して深く感謝しなくてはならないだろう。
—p. 122〜123
僕はできることなら、そういう‘やつれ方’を避けたいと思う。僕の考える文学とは、もっと自発的で、急進テクなものだ。湖には自然な前向きの活力がなくてはならない。僕に取って小説を書くのは、峻険な山に挑み、岩壁をよじのぼり、長く激しい格闘の末に頂上にたどり着く作業だ。自分に勝つか、あるいは負けるか、そのどちらかしかない。そのような内的なイメージを念頭に置いて、いつも長編小説を書いている。
—p. 150〜151
もし自分が血も肉もある中身の人間だと考えたりしたら、苦痛のために途中であるいは潰れていたかもしれない。自分という存在は確かにここにある。それに付随して自己という意識もある。しかし今のところそれらはいわば‘便宜的な形式’みたいなものに過ぎないんだと考えようと努めた。それは奇妙な考え方であり、奇妙な感覚だった。意識のあるものが式を否定しようとするわけだから。でもとにかく自分を少しでも無機的な場所に追い込んでいかなくてはならない。そうするしか生き延びる道はないと、本能的に悟ったのだ。‘僕は人間ではない。一個の純粋な機械だ。機械だから、何を感じる必要もない。ひたすら前に進むだけだ。’
その言葉を頭の中でマントラのように、何度も何度も繰り返した。
どんなに走るスピードが落ちたとしても、歩くわけにはいかない。それがルールだ。もし自分で決めたルールを一度でも破ったら、この先さらにたくさんのルールを破ることになりやすいし、そうなったら、このレースを完走することはおそらく難しくなる。
—p. 164〜167
行為がまずそこにあり、それに付随するように僕の存在がある。我走る、故に我あり。
—p. 171
現実の人生にあっては、物事はそう都合よくは運ばない。我々が人生のあるポイントで、必要に迫られて明快な結論のようなものを求めるとき、我々の家のドアをトントンとノックするのは大方の場合、悪い知らせを手にした配達人である。‘いつも’とまでは言わないけれど、経験的に言って、それが雨巣ぐらい報告である場合の方が、そうでは内ばあいよりも遥かに多い。配達人は帽子にちょっと手をや李、なんだか申し訳なさそうなかおをしているが、彼がて渡してくれる報告の内容が、それで少しでも改善されることはない。しかしそれは配達人のシエではないのだ。配達人を責めるわけにはいかない。彼は襟首をつかんで揺さぶるわけにはいかない。気の毒な配達人は、ただ上から与えられた仕事を律義に成してるだけなのだ。彼にその仕事を与えているのは、そう、同じみのリアリティーである。
そんなわけで我々には、プランBというものが必要になる。
—p. 216
僕は空を見上げる。そこには親切心の片鱗のようなものが見えるだろうか?いや、見えない。太平洋の上にポッカリと浮かんだ、無頓着な夏雲が見えるだけだ。それは僕に何も告げてはくれない。雲はいつも無口だ。僕は空を見上げたりするべき手はないのだろう。視線を向けなくてはならないのは、おそらく自らの内側なのだ。僕は自分の内側に目を向けてみる。深い井戸のそこを覗き込むみたいに。そこには親切心が見えるだろうか?いや、見えない。そこに見えるのは、いつもながら僕の性格でしかない。個人的で、頑固で、協調性を欠き、しばしば身勝手で、それでも見つからを常に疑い、苦しい出そうとする、僕のネイチャーである。古いボストンバッグのようにそれを提げて、僕は長い道のりを歩んできたのだ。気に入って運んでいたというわけではない。中身の割に重すぎるし、見かけもパッとしない。ところどころにほつれも見える。それ以上に運ぶべきものもなかったからし方なく運んでいただけだ。しかしそれなりに愛着のようなものもある。もちろん。
—p. 223'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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