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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봤을 때는 현대적인 느낌이 들어서 2021년에 쓰인 소설일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전후 독일에서 쓰인 소설이다. 볼프강 보르헤르트라는 작가도 전혀 몰랐던 작가였는데, 제목(Generation ohne Abschied)이 주는 독특한 인상 때문에 일단은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아주 마음에 드는 글이었다. 26세라는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한 문장 한 문장마다 삶에 대한 깊은 관조가 묻어난다.
단연 보르헤르트의 글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는 전쟁에 관한 것들이 많이 보인다. 그 자신이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었고, 자해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1년도의 내가 그의 글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상황 때문은 아니다. 양차 대전이라는 사건이 빚어낸 참상, 인간성의 말소, 방향감각의 상실 같은 것들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주제들이고, 보르헤르트는 어렵지 않은 어휘와 문장으로 간결하게 글을 써내려간다.
가령 '이별 없는 세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만남이 있는 지점에는 반드시 이별이 함께 하지만, 보르헤르트의 세대—그것이 우리 세대가 될 수도 있다—에는 자연스레 귀결되어야 할 이별마저 박탈되어 버렸다. 마치 자신이 죽어 있는지 살아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보르헤르트의 글에는 러시아에서 전투하던 중 죽은 친구가 흙냄새를 들이키며 삭제된 존재를 재확인하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이별이 박탈된 세대에게 새로이 도래할 '도착(Ankunft)'을 노래하기도 한다.
보르헤르트는 2년 여간 병상 생활을 하며 대부분의 작품을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에 <민들레>라는 글이 있는데 보르헤르트 자신이 민들레 같다. 폐허뿐인 세상에서 가냘프게 살아남은 한 송이 꽃. 모든 권리와 사상을 박탈 당한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꼭 손아귀에 넣고 싶었던 그것. 나도 모르게 홀린듯 시선을 빼앗겼던 샛노란 점. 잠시 동안의 미소(微笑). 종이에 인쇄된 활자는 이별 없는 세대를 말하고 있지만, 그의 글은 어디까지나 따뜻하다. [Ende]
너 자신이 철로다. 녹슬고 얼룩이 진, 은빛으로 반짝이고 아름답고 막연한 철로다. 너는 정거장으로 나뉘고, 역과 역 사이에 묶여 있다. 정거장들에는 표지판이 있고 저기 여자가, 달이 혹은 살인이 잇다. 그것은 이 세상이다.
—p. 34
우리는 웃고 있지만 우리 삶은 우연에 내던져지고, 속수무책으로 내맡겨지고, 피할 길이 없어. 그 우연한 일에 말이야. 알겠니?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이 네게 닥쳐서 너를 짓누를 수도, 일으켜 세울 수도 있어. 우연한 사건이란 우연히 일어나거든. 우리는 그런 우연에 내맡겨지고, 그 앞에 먹잇감으로 내던져진 거야.
—p. 54
우리의 소멸과 해체와 무(無)는 확실하고 기록되어 있으며 지울 수 없는 것이야.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으리라는 우리의 운명이 바로 눈앞에 있어. 그런데도 우리는 존재하지.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용기를 가지고 있어. 우리는 존재하고 있어.
—p. 58
여기 이게 나인지, 네가 한번 말해봐. 어때? 끔찍하리만큼 낯설어 보이지 않아? 나라고 인정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더 이상 나인 줄 알아볼 수가 없잖아. 그런데 여기 이게 나야. 정말 틀림없이 나야. 그러나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끔찍하게 낯설다고. 이건 예전의 나와는 이제 아무 연관이 없어. 아니, 제발 웃지 마. 이 모든 것이 내게는 끔찍하게 낯설고, 너무나 불가사의하고, 너무나 막연해.
—p. 73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나 서로 함께 지낸다. 그런 다음 슬그머니 도망친다. 우리에게는 만남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이별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다. 마음이 내지르는 비명을 두려워하며 도둑처럼 슬그머니 도망친다. 우리는 귀향 없는 세대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곳도 없고 마음 줄 이도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 귀향 없는 세대가 되었다.
—p. 97~98
신은 단지 그들을 숨쉬게 할 뿐이었다. 끔찍하고 어마어마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숨 쉬었다. 거칠게, 탐욕스럽게, 걸신들린 듯. 하지만 고독했다. 희미할 뿐, 고독했다.
—p. 134
향수라는 짐승. 그 짐승이 우는 거야. 굶주림이라는 짐승, 그 짐승이 비명을 지르는 거야. 그리고 나라는 짐승—그건 달아나지.
—p.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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