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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1337~1453)일상/book 2021. 12. 20. 14:06
1. 민족(民族)
백년 전쟁은 그 이름과 달리, 정확히는 100년 하고도 20년 가까이 더 이어진 전쟁이다. 또한 크레시 전투와 아쟁쿠르 전투가 이뤄질 때까지만 해도 당시의 크고작은 전투들이 후일 백년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될 거라 예견한 사람은 없었다. 데즈먼드 수어드는 이 시기를 영국과 프랑스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민족 개념이 태동했던 시기라고 서두에 밝힌다.
그래서 ‘민족’의 의미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염두에 두고 글을 읽었는데, 글을 다 읽고나서도 명쾌하진 않다. 백 년 넘게 두 나라가 치고박고 싸우는 과정에서 집단적인 자의식을 키워나갔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쟁에서 전개되었던 여러 국가와 공국들의 합종연횡은 이들에게 정말 ‘민족’ 개념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노르망디나 기옌처럼 영국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던 유럽대륙의 공국들을 제외하고도, ‘잉글랜드’와 ‘프랑스’ 외에 외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자들이 많다. 예를 들면 필리프의 부르고뉴 공국이 그러하고(물론 이는 왕족에게 영토를 할양하던 프랑스의 전통에서 비롯된 문제이기도 하다), 플랑드르 지역과 스코틀랜드 지역 또한 그러하다. 과연 이들 지역들은 잉글랜드 또는 프랑스의 우산 아래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던 것일까. 이 글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지만 백년 전쟁 당시 이미 잉글랜드가 영향력을 뻗치고 있던 아일랜드는 잉글랜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불현듯 궁금해졌다.
‘민족’ 개념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점은, 당시 유럽에서 전통적 강호로 군림하고 있던 프랑스—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교황청이 아비뇽에 위치함으로써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포함한다—는 잉글랜드의 침공에 수세적으로 프랑스라는 자의식을 키워나간 것에 반해, 잉글랜드는 사실 ‘우리 함께 버텨내야 한다’와 같은 긴요한 인식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오히려 잉글랜드는 프랑스를 ‘엘도라도’로 간주하는 실리적인 인식 위에서 비로소 잉글랜드라는 자의식을 형성해간다. 거친 과장을 보태 백년 전쟁 내내 잉글랜드가 했던 것이라곤, 전쟁자금을 대기 위한 징세, 프랑스에서는 슈보시(chevauchée)—닥치는 대로 점령한 지역을 약탈하고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초토화하는 전술—를 구사하고 파티스(pâtis)—보호세 명목으로 특정 도시가 군대에 납부하는 돈—를 강제하는 것이었다. 피비린내나는 승리를 기념하고 자축하는 과정에서 민족적 자각이 이뤄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정신을 못 가눌 정도로 흥청망청하는 국가적 잔치 속에서 또 다른 슈보시거리 파티스거리에 입맛을 다신다. 후일 잉글랜드는 전세계적인 제국으로 커가겠지만 그 민낯은 대단히 야만적이다.(이는 프랑스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백년 전쟁에서는 가스코뉴 지방 일대에서 프랑스 왕국을 괴롭혔던 '루티에(routiers)'—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약탈을 일삼는 도적—가 소개되는데, 이는 조선시대에서 해안에서 활동한 왜구와 매우 흡사하다. 루티에들은 처음에는 대체로 프랑스 땅에서 계약이 종료된 뒤 갈 곳을 잃은 잉글랜드 용병들로 이루어졌지만, 나중에는 프랑스의 부랑자들도 합류하여 민족을 기준으로는 정의내리기 어려운 집단이 된다. 어쨌든 이들은 프랑스 왕들에게 심각한 골칫거리였고 이들을 다스리고자 중앙집권적인 노력이 동원된다. 왜구 역시 초기에 일본 출신의 해적들이었지만, 조선과 동중국해 일대에 기거하던 여러 집단들이 합류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과연 백년 전쟁과 같은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말 또는 조선시대에는 일반 대중들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에게 민족 개념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까.
2. 정치(政治)
잉글랜드에게 전쟁의 동기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모든 물자가 풍족하고 유서 깊은 가문이 많은 프랑스를 침공함에 있어서, 그들에게 위험부담이 될 만한 것은 징세의 어려움 외에서는 전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프랑스로 출정을 하고 오면 커다란 부가 보장되었고, 때로는 무훈을 통해 고관작위를 수여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장궁(longbow)이라 하는 웨일즈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잉글랜드의 뛰어난 무기와 전술도 있었겠지만, 목적(돈과 가문의 영예라는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는 잉글랜드인들의 성향도 크게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도륙(屠戮)으로 인해 남아나는 것이 없었고, 프랑스 민중들은 잉글랜드를 극도로 혐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 전쟁이 백년 넘게 이어질 만큼 장기화된 데에는 무엇보다 프랑스 내부의 정치적 실패가 기여한 부분이 가장 컸다고 볼 수밖에 없다. 프랑스 내부에서는 잉글랜드에 대한 적개심에 뒤지지 않을 만큼 내부의 정적(政敵)에 대한 증오심이 수도 파리의 정치를 좌우하고 있었다. 즉, 부르주아와 학계의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던 부르고뉴파와 이른바 기득권층인 귀족과 지주를 주축으로 구성된 아르마냐크파의 오랜 반목은 서로 쟁탈전을 벌일 구실만을 재공했을 뿐, 잉글랜드를 상대로 한 백년 전쟁에 아무런 타개책도 제공해주지 못했다. 결국 헨리 5세와 베드퍼트가 파리를 다스리는 동안 파리 시민들의 지지를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프랑스의 정치적 내분이 심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정치적 실패는 프랑스가 지녔던 풍족한 물자와 자금으로도 만회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잉글랜드라고 해서 백년 전쟁 기간 내내 내부 정치가 안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 작은 섬에 스코틀랜드라는 또 다른 불편한 동거인이 있었고 프랑스 군이 영국 해안에서 몇 차례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지만 여차저차 치명적인 위기를 잘 견뎌낸다. 여기에는 잉글랜드가 섬나라라는 지리적 특성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백년 전쟁에는 슬로위스 해전,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오를레앙 전투 등등 수많은 전투들이 촘촘하게 고리를 이루는데, 책의 후반부까지 가만히 읽다보면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병력이 작은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단지 내가 군사력과 관련해 오늘날과 같은 막연한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프랑스 인구가 2천만 명을 상회하고 있었다는 서술을 감안하면, 백년 전쟁을 구성하는 크고작은 전투들은 물리적인 피해보다 상징적인 파급효과가 컸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기서 파생되는 또 한 가지의 생각은 (그리고 뜬금없이 전쟁의 규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까닭은), 일찍이 의회정치가 발달했다고 하는 잉글랜드 쪽의 기록을 보면 이들의 정치체제가 체계적인 면이나 규모 면에서 매우 허술해 보인다는 점이다. 전쟁에 열을 올리는 왕권을 제약하려는 견제세력들이 옥신각신하는 집안싸움 같아 보이기도 한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좋은 말을 걷어내고 나면, 주요 행위자의 정치활동과 의사결정 과정이 오히려 비이성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많다. 하지만 오늘날에 비이성으로 보이는 것이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백년 전쟁 중 주술에 빠져 지내던 샤를 7세는 뒤늦은 나이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고, 잔다르크라는 주술적 인물이 그 계기를 마련해주었듯이.
3. 기술(技術)
결국 이 지난한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창의적인 전략도 초인적인 기지도 아닌 화기(火器)의 발달이었던 것 같다. 장궁을 이겨내지 못했던 프랑스의 석궁이 점점 소총(mousquet)으로 대체되어 가면서 프랑스군은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효과를 거두기 시작한다. 기술 변화가 도화선이 되어 한 세대 또는 몇 백년에 걸쳐 잉글랜드에 충복해오던 노르망디와 기옌이 프랑스로 통합된다. 특히 보르도 일대의 기옌 공국이 프랑스에 흡수되는 과정은 극적이기까지 한데, 기옌 공국은 노르망디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수백 년에 걸쳐 잉글랜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첨단기술이라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구나 싶다. 하지만 백년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유럽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기술이라는 것이 삶(또는 싸움)의 '방식'을 바꿔놓을 수는 있지만 다툼으로 점철된 삶 자체를 바꿀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저자 데즈먼드 수어드는 헨리5세와 베드퍼드가 통치하던 파리가 근현대사에서 히틀러 통치하에 있던 기간보다 짧은 기간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파리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고 말한다. 섬뜩한 가정과 비유다. 그만큼 파리 시민들에게는 아르먀나크파의 참정이 견디기 힘들었다는 의미다.
백년 전쟁의 종식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국가에 영속적이라 할 만한 영향을 남긴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두 국가 사이의 오래된 라이벌 의식이 포함된다. 탐욕을 채워줄 엘도라도를 상실한 잉글랜드로서는 그들 나름대로 장미 전쟁이라는 또 다른 내분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간다. 역사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아무리 외양이 달라져도 인간의 본성은 만고불변이라는 소결론을 재확인하면서 느끼는 묘한 안도감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야만스러운 것이든 고상한 것이든 결국 한끗 차이라는 것을. [end]
백년전쟁에 관한 현대의 뛰어난 권위자인 케네스 파울러 박사가 쓴 대로, “13세기와 14세기 초 프랑스 국왕들은 서서히 그러나 가차 없이, 어쩌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불완전하게 아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종주권suzerainty을 주권sovereignty으로 승격시키고, 공작의 영주 권력을 지주 권력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p. 29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인들이 스코틀랜드를 보는 것처럼 플랑드르를 바라보았다. 전쟁 발발 시 우군으로 여겼다는 의미다.
—p. 34
1337년 5월 24일 필리프 국왕은 특히 에드워드가 주술을 행한 아르투아의 로베르에게 도피처를 제공한 것을 거론하면서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와 짐에게 거역하고 불충을 저질렀기에” 에드워드한테서 기옌을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일반적으로 이 선언은 백년전쟁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10월 에드워드는 “프랑스 국왕을 참칭하는 발루아의 필리프”에게 정식으로 도전하며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공식 서한으로 응수했다.
—p. 40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를 일종의 엘도라도로 여겼다. 잉글랜드 전체가 프랑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으로 넘쳐났다. 1348년 연대기 작가 월싱엄은 이렇게 말한다. “캉이나 칼레, 바다 건너 다른 도시에서 온 의복이나 모피, 방석 같은 물건들을 갖고 있지 않은 여자가 거의 없었다.”
—p. 107
루티에들은 브레티니 조약 이후에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잉글랜드인, 가스코뉴인,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먹고살 게 필요하다고 말하며” 요새에서 철수하기를 거부하고 보호비를 뜯어냈으며, 그 지역의 단물을 다 빨아먹고 난 뒤에는 새로운 성으로 옮겨가 그곳을 접수했다. 그들은 잉글랜드인들의 발명품, 즉 슈보시와 파티스를 실천하고 있었을 뿐이다.”
—p. 143
프랑스, 특히 파리는 무장한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였다. 아르마냐크파는 지도자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Bernard, Count of Armagnac의 이름을 땄는데, 루이의 아들인 오를레앙의 샤를Charles of Orleans과 아르마냐크 백작의 딸이 결혼한 사이였다.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마냐크파는 왕가의 대신료들과 소수의 부유한 부르주아, 장의 영토 바깥의 대다수 귀족들과 다른 왕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에 반해 부르고뉴파는 파리의 부르주아와 학계의 지지를 받았다.
—p. 204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정복은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과 어느 정도 닮은 구석이 있었다. 비록 소수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충실한 종복이 되었지만 현지의 귀족들은 대체로 영지를 몰수당하고, 빼앗긴 영지는 잉글랜드인에게 넘어갔다.
—p. 245
헨리 5세는 공국의 획득을 그의 전체 “유산”을 정복해 나가는 일보로만 보았다. 귀족계급이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가망 없이 쪼개진 프랑스는 그러한 위협에 맞설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불쌍한 국왕 샤를은 더욱 심하게 미쳐갔다. 두 명의 도팽이 너무 일찍 죽었고, 1403년에 태어나 훗날 샤를 7세가 되는 세 번재 도팽은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신체적으로도 볼품없는 미덥지 못한 젊은이었다.
—p. 248
이미 수도를 상실한 아르마냐크파는 공작 살해 사건 때문에 광범위한 반감을 사 세력이 더욱 약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모든 불행을 그들 탓으로 돌렸다. 파리 부르주아the Bourgeois of Paris는 “노르망디는 여전히 프랑스일 것이며, 프랑스 귀족들의 피가 흐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왕국의 귀족들이 유배에 처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국왕이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친구를 그토록 많이 잃은 그곳 아쟁쿠르에서 그날 그렇게나 많은 훌륭한 자들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저주받을 이름 아르마냐크의 거만한 자부심만 없었다면”이라고 썼다. 아르마냐크파의 꼭두각시로 여겨진 도팽은 이러한 맹비난을 같이 받아야 했다.
—p. 249
잔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몽스트렐레는 도팽파가 파테 전투 이후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인들이 그녀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을 모두 믿게 되었다고 알려준다. 그녀는 파리로 진군하는 대신 자신과 함께 랭스로 가서 대관식을 치르자며 도팽을 설득했다. 1만 2,000명의 군사가 어찌어찌 모였고,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영토를 통과하여 랭스로 간 샤를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잔은 대관식 내내 하얀 깃발을 들고 그의 근처에 서 있었고, 의식이 끝난 뒤 처음으로 그를 프랑스의 국왕이라고 불렀다.
—p. 308
1435년 9월 20일, 베드퍼드가 죽은 지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샤를 7세와 부르고뉴의 필리프는 아라스조약을 체결했다. 필리프는 샤를을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마콩과 오세르, 퐁티외와 더불어 솜강 유역의 도시들과 솜강 유역 북쪽의 왕령지를 받았다. 샤를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동맹을 끝내고, 자신은 필리프의 부친 암살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함과 동시에 살아남은 암살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죽은 공작에게 바치는 기념비를 세우고 그의 영혼을 위한 미사를 올리는 데도 동의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아르마냐크파를 사실상 버린 셈이었다.
……아라스조약은 부르고뉴파에게 끔찍한 실수로 판명된다. 그것은 이중 왕국의 파멸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부르고뉴의 파멸도 뜻했다.—p. 33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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