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일상/book 2021. 12. 22. 09:58
최승자 시인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게 아마 영양(英陽)에서 (명칭이 조금 거창하기는 하지만) 북스테이를 할 때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끄럽게도 한국문학에 관한 내 지식은 고등학교 때 배운 범위를 크게 넘지 않는데, 북스테이 당시 그녀의 짧은 시를 읽고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정확한 문구나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꽤나 파격적이었던 인상이 남아 있다. 그녀 자신은 '가위눌림'과도 같은 세사(世事)에 저항하며 시작(詩作)이 이뤄졌다고 하지만, 강인한 인상으로 남아 있던 시(詩)와 달리 산문집은 담백하고 또 담백하다. 일상적인 서사를 담고 있지만 죽음, 자연, 고독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 담겨 있다.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부담스럽다기보다 맞아 그렇지.., 하면서 글을 읽게 된다. 멋지다, 진솔하다, 호흡이 길다, 같은 수식어보다는 많은 문장들에 아무 생각 없이 공감을 던지게 되었던 글이다. 또한 한 문장 한 문장 시선으로 꾹꾹 눌러담으며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읽은 글이다. [끝]
쓸쓸함이 뿌리를 내리고 인생의 뒤켠 죽음의 근처를 응시하는 눈을 갖는다.
—p. 13
죽음 앞에서 비로소 죽음의 환상을 깨뜨릴 수 있는, 깨뜨리고 난 뒤의 여유. 죽음 앞에서 비로소 숨을 가다듬고 살아야 할 명분과 살아야 할 힘을 얻어내는 이 부조리한, 뻔뻔스러운, 비인간적인, 그러나 지극히 인간적인 여유.
—p. 50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항시 삶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야 편안한 것인가.
—p. 95
다섯 자 여덟 치/내 뼈를 누일 곳 없어/빗발 스며드는 고분 속에 누웠다./곰팡의 색깔은 요염하고/그 속에서는 역사의 냄새가 난다.
—p. 115
말하자면 한 시대의 비판적 정신 자체가 그 비판의 근거를, 논리적 정당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려는 노력과 수고 없이, 명분만을 등에 업고 일방적으로 두드려 부숨으로써 오히려 흑백논리까지 넘어서 무비판적 정신에 기여하고 있다는 얘기다.
—p. 123
가위에 눌려본 사람은 알겠지만, 처음에는 아무리 소리치려 해도 비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얼마만큼의 힘을 쓰며 저항한 뒤에야 비명이 터져나오고, 그것이 자신의 귀에 들리게 되면서 비로소 그 가위눌림으로부터 깨어나게 되는 것이다.
—p. 142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공포가 꽃수레에 올라타고 자신의 목적지인 죽음에 이르는 과정인지도 몰라.
—p. 162
'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약국의 딸들 (0) 2022.01.08 달과 불(la luna e i falò) (0) 2022.01.01 백년전쟁(1337~1453) (0) 2021.12.20 사무엘상・하 (0) 2021.12.16 이별 없는 세대 (0) 2021.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