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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현대사>를 덮으며일상/book 2020. 2. 26. 01:34
근래 읽은 책 중 페이지수가 상당한 책이기도 했고,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는 부피나 무게가 상당한 책이기도 해서, 가능한 빨리 읽어버리고 싶으면서도 다 읽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독일 근현대사나 유럽 역사에 관해서는 몇 권의 책을 읽기는 했었지만, 독일 근현대사를 이만큼 집중조명하는 책은 처음인데 대단히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 근대 일본의 군국주의와 근대 한국의 내전과 분단이 연상되었는데, 이런 과거의 굴레를 모두 벗어던지고 지금의 통일독일을 일구어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방대한 책이다보니 몇 개의 작은 테마로 나눠 생각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A. 지리/환경
독일이라는 나라의 정체를 이해하기는 개인적으로 쉽지가 않다. 가장 먼저 이 책이 언급하는 것이 독일의 지리적 여건이듯, 이처럼 불분명한 인식은 독일이 자리한 지리적인 위치와 모양새에서 비롯된다. 동유럽, 서유럽, 남유럽, 북유럽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편의상 중유럽으로 분류되는 독일은 영국이나 일본처럼 지리적으로 고립된 지역은 아니지만, 유럽 동서남북의 세력이 충돌하는 완충지점에 놓여 있다. 영국이 대륙 유럽으로부터 거리를 두었고, 일본이 동아시아 질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은, 그들이 놓여 있던 지리적 환경이 부지불식간에 낳은 부산물이다. 반면, 독일은 자연적으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고립된 전제 조건 위에서 생존해야만 했다. 유럽에서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태동하던 시점에 독일이 유달리 팽창주의적 정책을 취하고 게르만 민족주의를 고취했던 것은, 자신을 둘러싼 열강들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와 그에 따른 반동에서 기인한다 할 수 있다.
또한 독일은 유럽열강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통일을 이룩한 나라로, 통일되기 이전의 독일지도는 굉장히 복잡해서 어떻게 이런 다양하고 수많은 정체(政體)들이 게르만이라는 기치 아래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을까 신기할 정도다. 실제로 독일 통일은 이른바 철혈 재상(宰相)으로 일컬어지는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추진력 위에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달성되고, 이는 향후 통일독일을 견인해가는 데 하나의 지향점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앙시앙레짐Ancien Régime에 비견될 만한 근대 독일의 삼계급 선거권 제도Dreiklassewahlrecht는 하나의 독일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끊임없이 걸림돌이 된다.
B. 정치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독일은 프로이센 이외의 연방을 소외시킴으로써 독일 정치의 진보를 한없이 지연시켰지만, 괄목할 만큼 경제가 성장하고 열강으로서의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통일독일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충분히 상쇄(相殺)되었다. (책이 결론 파트에서 언급하는 독일의 고질적인 '비대칭'이라는 것은 이런 점들을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고슬라비아를 위시한 동유럽에서 촉발된 정치적 불안정이 하나의 변인이기도 했지만, 이면(裏面) 동맹을 감수하면서까지 복잡한 외교전을 펼쳤던 통일독일의 외교혼선 역시 하나의 변인이기도 했지만, 후진적인 통일독일의 정치 기반과 취약한 정책결정구조 또한 하나의 변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여러 요인이 혼재된 전쟁 양상 속에서 정치체제의 결함과 비뚤어진 민족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자국내에서 명료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베르사유 체제가 강제하는 감당하기 힘든 배상금,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성장세를 유지했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경제여건, 그리고 결정적으로 프로이센 중심으로 통일독일을 결속하려는 보수주의 진영의 반동적인 정치 안에서, 모자람 없는 물질세계를 영위하고 있음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초조함이 대중 사이에 감돌기 시작한다.
애당초 보잘 것 없는 군소정당으로 출발했던 나치는 '돌격대'라는 선제적인 방식을 동원하여, 여전히 비스마르크 체제을 향한 노스탈기(Nostalgie)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보수주의 세력의 허점을 파고들어 단숨에 주류 정당으로 올라섰고, 몇 년 뒤 다시 한 번 전쟁을 감행한다. 세계관Weltanshcauung을 들먹이며 야심차게 이끌었던 히틀러의 유희극은, 책에서 적확하게 짚고 있듯이 민족적인 면에서는 유대인을 척살하는 방식으로 공간적인 면에서는 소비에트 진영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안타깝게도 나치당에서는 이 수준의 상식적인 사고체계조차 마비되었던 것 같지만—이는 확전(擴戰)을 피할 수 없는 매스게임(Mass Game)이었기 때문에 폴란드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와 베네룩스, 영국까지 전쟁통으로 끌어들인다.
전격전Blitzkrieg, 총력전Totaler Krieg, 소모전Stellungskrieg 등 온갖 전쟁개념을 낳았던 제2차 세계대전은 결국 제3제국의 무조건 항복으로 귀결된다. 여기서부터 혼란스러운 것은, 물론 미국의 마셜플랜을 등에 업고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고는 하지만, 나치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가던 독일인들이 그 어느 나라의 어느 국민보다 모범적인 시민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이다. 수치스러운 과거사와 관련해 일본과 다른 인식을 보이는 것도, 외세에 의해 이뤄진 분단을 이미 이루어낸 것도, 전후 독일인들의 부지런함과 솔선수범에 의해 빛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데, 독일인들의 이러한 강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성숙한 정당정치'라 하고 싶다. 프로이센 연방에 독일 전체의 정치가 좌우되는 기간 동안 독일의 정치가 '게걸음'을 쳤던 것은 사실이지만, 독일은 공산당과 나치당이라는 극단적인 진자(振子) 운동을 거치면서 매우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경험하고 이를 정당 안으로 녹여낸다. 반면, 한국은 식민지배와 독재정치를 겪는 과정에서 독일보다 한 세기 가까이 정당 정치가 늦어졌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입헌군주제라는 외양은 갖췄지만 전후 자민당이 일당우위를 점하면서 활력을 잃은 정당정치를 이어가고 있다.
C. 외교/통일
독일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냉전—특히 러시아의 일사불란하고 일방적인 외교방식은 서방국가와의 관계경색을 낳았다—의 희생양으로 분단이 되었고, 또한 독일은 2020년으로부터 꼭 30년 전에 두 번째 통일을 이루어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늘 연구대상이다. 동독을 실체로서 국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러한 전제 위에서 협상을 펼쳐야 하는가, 주변국(영국과 프랑스)의 공감대를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 하는 당시의 고민들은 오늘날 한국이 안고 있는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군다나 우리에게 북한이 그러하듯 서독에게 동독은 엄연한 적국이었기 때문에, 서독 내에서는 극단적인 좌파세력에 의해 살상을 포함한 테러활동이 전개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서독은 대내적으로는 나치가 태동한 바이에른 지역에서 극우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억눌러야 했고, 대외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영토의 변방에 머물렀던 국가들(특히 폴란드)에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죄를 표명하는 일로 분주했다. 요컨대 동쪽에서 불어오는 이념적 위협이 아니더라도, 서독에는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던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동독은 북한에 비해 서방세계에 개방되어 있어서 처한 기본적 환경 자체가 달랐다는 데에 방점을 둔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다. 독일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리적으로 완전히 주변국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고립되어 있다.) 여기에 여러 외교적인 행운—샤보프스키의 실언,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전폭적인 통일 지지—이 뒤따랐던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동독은 농업에 적합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사회에서 서독 경제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계속 놀라게 되는 대목들은 죄다 서독의 성숙한 정당정치에 관한 부분들이다. 따지고 들면, 독일 통일 당시 이빨 빠진 호랑이었던 소비에트는 차치하고서라도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가 매우 거셌다. 뿐만 아니라 동방 정책은 회의적인 국내 여론에 의해 번번이 시험대에 올랐다. 서독이 일궜던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것도 80년대말이 되면 그 약효가 다되어 저성장기에 접어든다. 즉, 다시금 통일된 독일(실질적으로 서독에 의한 동독 흡수) 문제에 대해서독이라고 해서 충분히 준비된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대내외적 변수들을 지렛대 삼아 통일이라는 결과물을 도출해낸 건, 재차 독일 정당정치의 성숙함과 건강함에 그 원인을 두고 싶다. 불과 반 세기 전까지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깃발을 열성 신도들처럼 흔들어대던 독일 시민들이, (서독에 한하여) 정치조직을 통해 다원적인 의견을 표출함으로써 척박하고 획일적이었던 정치 토양을 빠른 시간 안에 비옥하게 변모시켰다. (반면 동독은 바이마르공국부터 이어져오던 기민련/기사련의 후신들이 잔존하기는 했지만 사통당의 교조주의적 정치 안에 통합되어 버리고 만다.) 물론 좌우 양극단에서 '다양성' 개념만으로 면죄될 수 없는 혐오범죄와 테러활동이 지속적으로 발생했지만, 정당정치의 축 자체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축의 평행을 이룬 정당이 사민당(SPD)와 기민련(CDU)/기사련인데, 계급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민당(중도좌파)이 대변하는 노동자 인구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서독에서는 중도우파 성향의 기민련/기사련 주도하에 꾸려진 내각이 더 많았다. 그리고 헬무트 콜이 이끄는 기민련/기사련 내각에서 마침내 분단대립에 종지부를 찍는다.
독일의 정당정치가 더욱 인상적인 것은, 기민련이든 사민당이든 과반득표를 넘긴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연정(聯政)을 구성해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 좌파당, 중앙당, 녹색당 등 다양한 교섭단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가톨릭교를 바탕으로 출현한 중앙당은 전후 서독에 꾸준히 내각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녹색당은 생태주의 이슈를 발전시키면서 유권자들에게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물론 이는 서독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바이마르 헌법이 지닌 치명적인 결함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나치당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정당으로 의회에 진출할 수 있는 득표 하한선을 정하고, 비례선출되는 의원수를 줄였으며, 미국의 헌법재판소를 모델 삼아 연방헌법재판수를 창설했다. 헌법적 고안 속에서 독일은 안정적인 다당제를 운영하면서, 극단적인 목소리를 배제하는 정치시스템을 구현하고 있다.
結
문화에 대한 단상(斷想)까지 정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마 한 가지 더 언급할 만한 대목이 있다면 '언론의 자유'일 것이다. 동독의 몰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동독 고위층의 호화로운 생활과 부실한 국채관리를 낱낱이 고발한 동독의 언론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독이든 동독이든 그 안에서 운영되고 있던 사통당, 사민당, 중앙당, 기민련/기사련의 스펙트럼은 바이마르공국 시절에 그 연원을 공통적으로 두고 있다보니, 통일 이후에도 정치지형을 정리하는 데 그리 진통을 겪지 않았다는 점 또한 언급할 필요가 있지만 이것까지 다루기에는 너무 길어질 것 같다.
정작 다뤄야 할 것들은 당면한 문제들로, 서독Wessi과 동독Ossi을 가로지르는 현저한 빈부격차와 해소되지 않은 문화적 위화감처럼 눈으로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는데 단기간에 풀어낼 수도 없는 문제들이다. 잠재된 불만은 다시금 독일내 이민자들(특히 노동공급 부족을 메우기 위해 초청되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정착해버린 터키인들)을 겨누기 시작했는데, 그릇된 앙심이 그간 여러 불만이 누적된 동독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독일의 탈나치화 노력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꽤 오랜시간을 들여 읽었던 책이어서 그런지 여운이 길게 남지만, 그 여운도 언젠가 가시기 전에 글을 남긴다. 역사에서 배울 것은 추리고 버릴 것은 과감이 폐기해야겠지만, 사실 비교대상을 설정하기에 앞서 우리사회에 대한 냉정한 분석 자체가 선행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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