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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은 뒤로 주제 사라마구라는 작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돌뗏목>이라는 작품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포르투갈 문학이 쉽게 접할 수 있지 않다보니 다음에 이 작가의 작품을 찾는다면 가능하면 포르투갈의 색채가 짙게 묻어나는 글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 아마도 포르투갈을 여행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이 책의 소재는 바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자리하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이고, 그것도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대서양 위를 표류하는 이베리아 반도의 이야기다. 그렇다, 이베리아 반도가 어느날 뚝, 하고 피레네 산맥으로부터 분리되더니 아조레스 군도와 충돌할 위기를 겪기도 한다.
작가의 상상이 다분히 가미된 소설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야기를 앞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 서술자(전지적 시점의 주제 사라마구 자신)의 개입이 자주 이뤄지는 편인데 그리 거북하지는 않았다. 꽤 파격적인 발상이어서 그런지 여정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서, 사실 포르투갈 사회에 천착한 문제점들이나 문화적 정체성이 뚜렷하게 그려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는 포르투갈 뿐만 아니라 스페인 역시 자리하고 있다보니, 포르투갈 하나가 아닌 스페인을 포함한 이베리아 전체를 크로키한다. 참고로 안달루시아에서 시작한 주인공들의 여정은 리스본과 코임브라, 포르투, 갈리시아, 바야돌리도, 피레네 산맥의 소도시를 거쳐 다시 안달루시아로 되돌아오는데,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낀 소공국 안도라까지 다루는 걸 보면 매우 면밀하게 이베리아 반도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흥미롭게 읽기는 했는데 사실 '이베리아'와 관련해서 어떤 메시지를 추려야 할지 잘 모르겠다. 역사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책은 아니고 외교적인 언급도 간헐적이다. 미합중국과 유럽연합의 성명이 중간중간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다만 유럽대륙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대서양을 항해한다는 모티브 자체가, 유럽대륙에서 이베리아 반도가 점하고 있는 지리적 고유성, 대서양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나라로서 겪은 파란(波瀾), 고립이 극한으로 치달았을 때 예견되는—<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익히 다뤄졌던—사회의 붕괴를 다루고 있다.
덧붙여 출항을 시작한 이베리아 반도는 맨 처음 피레네 산맥에 작별을 고하고, 다음으로는 영국령 지브롤터에 안녕을 고한다. 이윽고 아조레스 군도와 맞닥뜨릴 위기에 처하고, 이를 모면하고 나니 캐나다와 부딪칠 위험에 처했다가, 다시 대서양의 적도 부근으로 항로를 바꾼다. 반도 하나가 통째로 움직인다고 할 때, 이것이 아주 대단한 해류의 영향인지 아니면 지각(地殼)의 변동 때문인지는 모른다. 두터운 돌로 바다에 물수제비를 뜬 조아킴 사사 때문인지, 땅바닥에 지워지지 않은 금을 남긴 조아나 카르다 때문인지, 어딜 가든 찌르레기 떼를 몰고 다니는 주제 아나이수 때문인지, 도무지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파란 털실로 양말을 짜던 마리아 과바이라 때문인지, 이도 아니라면 땅을 통해 반도(半島)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페드로 오르세 때문인지 알 길은 없다.
의외로 아주 동양적인 방식으로 상황을 해석할 수 있다. 이베리아 반도가 이 긴 여정을 떠난 것은 그냥 순리(順理)—서양식으로 말하자면 운명(destiny)—인 것이다. 태아가 자궁을 서서히 빙글빙글 돌다가 머리부터 세상밖으로 나오듯, 이베리아 반도는 반시계 방향으로 대서양을 돈 뒤 자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는 것이다. 책에서 여성—조아나 카르다와 마리아 과바이라—들은 주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먼저 로맨스를 쟁취하고 자신들의 갈 길을 정하고 살 방도를 찾는다. 반면 남자들은 엄마 품에 안긴 갓난아기처럼 애정을 갈구하고 시기하고 좌충우돌한다. 쉴새 없는 남녀의 시행착오와 우연에 우연을 거듭한 죽어감과 살아감들로 오늘의 이베리아 반도는 태어났다, 라고 소설은 말하는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이든 현자(賢者) 페드로 오르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리스본에 살면서 한 번 가볼만 한 가치가 있다고 한 게 왜 그런지 알겠다는 대목에서, 어쩐지 찍었던 사진 대부분을 잃어버렸던 포르투갈에 다시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의 죽음과 출생에 관한 가설은 우리가 그것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인정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나오는 아이가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일단 땅의 자궁으로 들어간 사람도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누구나 자기 자신이 모든 결과의 원인이라고 판단할 만한 많은 이유가 있다고 설명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방금 말한 결과의 원인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자기 덕분에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나는 정말이지 사람들이 없어지고, 그래서 사람들이 원인이 되는 결과도 없어지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런 흉악한 일은 생각하지 않는 게최선이다. 아주 작은 동물, 어떤 벌레들만 살아남아도 세상, 개미의 세상과 매미의 세상은 그래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찔어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커튼을 걷지도 않을 것이고,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지도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이 무슨상관이랴. 결국 유일하게 위대한 진리는 세계는 죽지 않는다는 것인데.
—p. 16~17
본능이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처럼 제멋대로 나타나는 모호한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본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성과 동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 인생은 사람이 태어난 때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하루하루가 새로 얻은 날일 것이다. 인생은 훨씬 뒤에 시작된다. 너무 늦게 시작되는 경우도 많은데, 시작하자마자 끝나 버리는 인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한 시인은 탄식한 것이다, 아, 아쉽게 이루어지지 못한 일의 역사는 누가 쓸 것인가.
—p. 20~21
생각해 보면 사물이나 사람이나 시작은 없다. 어느 날 시작된 모든 것은 사실 이미 그 전에 다 시작된 것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예만 들더라도, 이 종이 한 장의 역사를 진실하고 완전하게 규명하려면 세계의 기원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기원이라고 말하지 않고 기원들이라고 말한 것은 의도적이다. 그러나 또 우리는 그 첫 기원들 역시 단순히 전환점, 어떤 진입램프가 아니었을까 하고 물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혹사를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가엾은 머리. 온갖 이유로 미쳐버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런 이유로는 미치지 않는 감탄할 만한 머리.
—p. 69
거기 도착했을 때쯤이면 아마 유럽은 보지 못하실 겁니다. 그게 안 보이면 그런 곳이 원래 없었기 때문이겠지. 결국 로케 로사노가 절대적으로 옳다. 사물이 존재하려면 두 가지 필수적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p. 100~101
나는 베네치아 이야기를 하는 거야, 베네치아가 사라지다니. 베네치아가 사라진다면 그건 모든 사람들 탓이야, 지난 몇 세대 동안 그 도시는 태만과 투기 때문에 쇠락했잖아. 나는 그런 원인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그런 원인들이라면 온 세상이 파괴되어야지, 내가 말하는 건 내가 한 짓이야, 나는 바다에 돌을 던졌잖아,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반도가 유럽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고 생각해. 만일 언젠가 자네한테 아들이 생기면, 그 아들은 결국은 죽을 텐데 그건 자네가 태어났기 때문이지, 아무도 자네한테서 이 죄를 면해주지는 못해, 만들어 짜는 손이 곧 부수고 푸는 손이야, 옳은 것이 틀린 것을 만들어 내고, 틀린 것이 옳은 것을 낳지. 괴로운 사람한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외로로군. 이봐, 슬퍼하는 친구, 위로라는 건 없어, 인간은 위로할 수 없는 존재거든.
—p. 102~103
그러나 이베리아의 두 나라의 사회적 외형이 위에서 아래까지,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완전히 바뀌는 데는 딱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사실과 동기를 모르는 관찰자, 피상적인 모습에 속아 넘어간 관찰자라면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들이 순식간에 갑자기 가난해졌다고 결론을 내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부자가 사라졌다는 것이며, 그들이 사라지자 통계가 곧 극적인 하강을 보인 것이다.
지나가는 구름밖에 없는 곳에서도 올림푸스의 신과 여신 전부를 볼 수 있는 관찰자들, 또는 거꾸로 눈앞에 번개를 든 유피테르를 보면서도 그를 그냥 대기의 증기라고 부르는 관찰자들에게는 일어난 사건 이야기만 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고, 선례와 결론이라는 양극으로만 나누어 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쉬지않고 지적을 해야 할 것이다. 정신적 노력을 그런 두 가지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례와 결론 사이에 놓여 있는 것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한번 그것을 올바른 순서대로 이야기해 보자. 시간, 공간, 동기, 수단, 사람, 행위, 방법. 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고려하지 않는 한 우리는 첫 번째 의견에서부터 치명적인 실수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론 지능을 가진 존재지만, 원하는 만큼 지능이 뛰어나지는 않다. 이것은 겸손의 증거이자 고백이며, 겸손은 누구한테 책망을 듣기 전에 먼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올바른 의미의 자선이 그래야하듯이.
—p. 152
……상상할 수 있는가. 그들은 가능한 모든 각도에서 이 문제를 토론해 보고 변함없이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너무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상적 상태가 과거에 정상적으로 여겨지던 것을 대체해 버린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어떤 경련이나 충격이나 색깔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뭐가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런 일을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다. 극과 비극에 대한 우리의 취향 탓이다. 숭고한 것과 극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요구 탓이다. 우리는 예를 들어 출산 광경을 보고 놀란다. 그 모든 신음과 끙끙거림, 그리고 외침, 그러다 몸이 익은 무화과처럼 열리며 다른 몸을 내놓는 광경. 물론 이것은 놀라운 광경이지만,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것보다 놀랍지는 않다. 여자의 몸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뜨거운 방출, 씨앗들의 숙명적인 경주, 그리고 홀로 인간이 형성되는 그 긴 과정. 분명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만, 그것이 누구일까. 더 멀리 갈 것도 없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도 당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불가피하게 모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p. 180~181
……자네의 지혜에 비하면 내 지혜는 초보적인 수준이군, 하지만 자네도 방금 보았듯이 나는 그 여자 이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어, 나의 내적인 자아가 이 문제에서 거리낄 게 전혀 없다는 증거지. 자네가 속으로는 보기보다 훨씬 더마키아벨리적이지 않다면 그렇지, 자네가 진정으로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의 반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르잖냔 말이야, 그러면서 나한테는 자네가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이 자네가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과 똑같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거지, 내가 내 뜻을 분명히 전달했나 모르겠군. 전달 못했네, 하지만 상관없어, 분명함과 모호함은 빛과 그림자가 똑같으니까, 모호한 것이 분명한 것이고 분명한 것이 모호한 것이지, 누군가가 자신이 느기고 생각하는 것을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이 그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럴 수 없기 때문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는 걸까. 우리가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라서 그렇지, 말하는 거, 어쩌면 말도 아닐지 몰라, 그냥 모든 것이 시행착오의 문제일지도 몰라.
—p. 191~192
믿어지는가. 포르투갈에서는 오늘날에도 일상 언어에서 의고체를 제거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인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한 결론은, 물주전자가 우물에 너무 자주 가더니 손잡이가 아예 그곳에 그냥 있으려 한다,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에게 혼란만 주는 비유였다. 지금 손잡이나 우물이나 물주전자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반복이라는 요인 또는 원리를 인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복이라는 것은 그 본성상, 빈도가 높아지면 어디에 이를지 결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현상의 지속성, 이런 작용의 축적된 결과에 달려 있다. 그러니까, 물이 줄기차게 떨어지면 단단한돌도 닳아 버린다,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 공식은 컴퓨터에서 출력된 적이 없다. 그러나 컴퓨터에서 충분히 나올 만한 것이 앞의 비유와 뒤의 비유 사이에는 유사점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앞의 경우에는 물주전자에 물이 무겁게 들어 있고, 두 번째 경우에도 물이 등장한다. 물론 이번에는 방울방울 자유롭게 떨어지는 물이지만.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 요소인 시간이 있다.
—p. 193~194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예의바른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창피스럽게 생각하던 유럽 국가들을 털어냈다고 생각하는 일부 유럽인들에게는 이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애초에 넘보지 말았어야 할 대양을 표류하는 것이 그 자체로 개선이며, 끼리끼리 모여 사는더 행복한 시대를 약속해 주는 일이었다. 이들은 말한다. 우리는 마침내 유럽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혹시 조만간 떨어져 나갈 서자같은 땅덩이가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결국 우리가 하나의 나라로, 유럽 정신의 정수로, 단순하고 완전한 절정의 상태로, 유럽으로, 즉 스위스와 같은 유럽으로 갈 것이라는 데 내기를 걸어도 좋다.
그러나 이런 유럽인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유럽인들도 있다. 불안의 종족, 악마가 뿌린 효소, 예언자들이 아무리 죽어라 예언을 해대도 쉽게 소멸되지 않는 종족. 그들은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결코 하지 못할 여행에 대한 갈망으로 서글퍼지는 사람들이며, 하늘의 새만 보면 독수리처럼 솟아오르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사람들,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만 보면 가슴으로부터 떨리는 한숨을 쏟아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환희에 사로잡힌 채 너무 아슬아슬하게 놓쳤기 때문에 이런 아쉬움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그들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과감하게 그 놀라운 말,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이베리아인이다(Nous aussi, nous sommes ibériques), 하는 말을 처음 쓴 것도 그 비타협적이고 불안한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p. 233
총리는 포르투갈 국민에게 말했다. 포르투갈 국민 여러분, 최근 며칠 동안, 특히 지난 스물네 시간 동안, 우리나라는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로부터 압력을 받았지만, 과장 없이 말하건대, 본인은 그 압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런 나라들에서는 엄청난 수의 시위 군중이 반도의 나라와 국민들에게 유대감을 보여주고자 열광적인 태도로 거리로 쏟아져나와 공공질서가 붕괴되었지만,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이런 사태 발전은 이제 우리는 속하지 않은 유럽 정부들 사이의 논란 속에 감추어져 있던 심각한 모순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자국의 심각한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고민하던 차에, 우리가 시작하게된 이런 역사적 모험에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 간단히 말해서, 인류 갱생의 희망을 봅니다, 그러나 이들 정부는 이제 우리를 기본적인 인간성과 유럽 문화에 대한 진정한 자각의 증거로 옹호하는 대신, 그들 내부 문제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반도 표류를 막으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표류라는 말보다는 항해라는 말이 더 적절하고 정확할 것입니다.
—p. 244~245
옆방에서 지친 연인들은 서로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순수한 환희는 안타깝게도 예상한 만큼 짧으며, 결국 내 몸은이 몸이지 다른 몸은 아니다. 몸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살갗에서 시작해서 살갗에서 끝난다. 그 안에 든 것은 그 몸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몸에는 휴식, 독립성, 그 기능의 자율성이 필요하다. 서로의 품에 안겨 자는 것은 튀어나온 곳과 들어간 곳의 조화가 요구되는데, 이것은 두 사람의 잠 때문에 헝클어진다.
—p. 254~255
……하지만 우리가 뭔가를 간절히 원할 때는 흔히 그러듯이 환각을 일으킨 것이 틀림없다. 우리의 지혜로운 몸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 자체 내에서 우리의 욕망을 만족시키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이것이 꿈의 의미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일 그렇지않다면 우리가 이 견딜 수 없는 삶을 어떻게 견디어낼 수 있을지 말해보라……
—p. 259
……죽음은 만물의 최고의 존재 근거이며 만물의 확실한 결말이다. 우리가 속는 것은 우리 자신도 끼어있는 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줄 때문이다. 이 줄은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냥 이름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래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우리는 미래로부터 계속 새로운 존재들을 모으고, 오래된 존재들은 남겨두고 떠난다. 우리는 그 오래된 존재들이 과거로 부터나타나지 않도록 그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불러야만 했다.
……세상은 발걸음, 숨, 마찰 소리로 꽉 차 있다. 이제 산꼭대기 뒤에서 비록 막힌 소리이기는 하지만 바다의 시끄러운 소리가 분명하게 들린다. 점점 커지고 점점 분명해지다가 마침내, 눈앞에 거대한 수면이 떠오른다. 달빛도 없고 별도 거의 없는 밤하늘 밑에서 희미하게 반짝거린다. 저 아래에서는 밤과 죽음을 나누는 살아 있는 줄처럼 눈부신 흰색의 거품이 끊임없이 흩어졌다가 다시모인다.
—p. 277~278
그녀는 남자가 깊은 숨을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뼈의 골수로부터 새로 힘을 끌어내는 것 같았다.
—p. 284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을 하게 하라, 스스로 상상을 하게 하라. 사랑의 언어가 비록 제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모두 상상하지는 못할 것이다.
—p. 285~286
……구름 낀 하늘, 납빛 대기, 음침한 풍경은 종말에 이른 세상이 죽어가면서 내쉬는 숨 같았다. 세상은 수많은 슬픔과 피로, 수많은 살아감과 죽어감, 수많은 결연한 삶과 그 뒤에 이어지는 죽음 끝에 마침내 쓸쓸하게 숨을 거두고 있었다.
……나는 여기 있을 거다, 너희들은 겁이 나면 떠나라. 그들에게 대단한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다. 인생의 이 시점에 이르러 마침내 용기와 두려움은 저울의 진동하는 두 접시일 뿐, 눈금은 감정이나 느낌의 쓸데없는 호들갑에 놀라 마비된 것처럼 꼼짝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일 뿐이다.
—p. 318~319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절망은 인간적인 것이다. 자연사에 동물이 절망한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절망과 헤어질 수 없는 인간은 절망과 더불어 사는 데 익숙해져 그것을 극한까지 견디어 낸다.
—p. 332
……그들은 만일 대격변의 위협을 받으며 얼마가 될지 모르는 동안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면 행복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기회를 한껏 활용하고 있다. 그들은 시인이 훈계한 대로 현재를 즐기라(Carpe diem)고 주장할 것이다. 이 오래된 라틴어 인용문의 장점은 이 말에 잠재되어 있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의미는 빼놓더라도, 제이의 또 제삼의 의미로 이루어진 세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 말을 예를 들어, 인생을 즐겨라, 하고 번역하면 왠지 약하고 미지근해 보여, 큰 성과를 거둔 번역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그냥 Carpe diem이라고 말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면 마치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자신의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하여 영원히 사는 것을 포기한 신이 된 듯한 느낌이 드니까.
—p.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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