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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 : 들뢰즈와 과타리의 글을 읽고일상/book 2020. 3. 7. 01:38
현대철학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은, 뭘 어떻게 잘못 먹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한다면,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은 1%쯤 이해했다면 들뢰즈와 과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는 넉넉잡아 10%쯤 이해했다는 점. '기관 없는 몸'의 '절단'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똥을 끊으며'라는 묘사를 읽을 때, 글쎄 뭐라 해야 할지 철학책에서 기대할 법한 표현이 아니라서 내심 피식하기도 했지만 야릇하게 구미를 당기는 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별개로 글이 어려웠다 뿐이지 번역은 좋았다'~') 철학이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다루는 학문이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어렵게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대물리학을 떠올려보면 현대철학이 일반인들이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모양이 바뀐 것도 수긍할 만하다. [또는 현대예술의 난해함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고대(古代)에 일반인들이 터득했던 초보적인 기하학(예를 들어 피타고라스의 정리)은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 맥스웰 방정식,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현대 양자역학으로 넘어올수록 불가해한 영역은 점차 넓어진다. 물론 “특정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양자역학의 공리는 그 문장만 놓고 봐서는 아주 기계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고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 설명하는 물리적 현상을 측정하거나 관찰할 줄도 모르고, 수학적으로 표현 줄도 모르며, 결정적으로 써먹을 줄 모른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散播術)이나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금새 [표면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난이도가 낮다고 해서 철학의 깊이까지 얕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들의 글을 읽는 게 부담스럽거나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데카르트, 칸트, 헤겔로 넘어오면서 아리송해지고, 사르트르나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서 잠시 가닥을 잡는 건가 싶다가 현대철학에서 깊은 수렁에 빠져버리고 만다. 특히 일군의 프랑스 철학자들이 펼친 현대철학은 인접학문, 가령 민족학, 문화인류학, 언어학, 심지어 경제철학까지 뒤범벅되어 있다보니, 서사(敍事)나 생각의 흐름이 담긴 글이 아니라 두꺼운 사전(辭典) 하나를 꾸역꾸역 읽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덧붙여, 철학에 관해서라면 자괴감마저 드는 또 하나의 대목은 정작 동양철학(이슬람 철학과 인도 철학을 포함하여..)에는 무지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세상을 이해하는 보편적 학문으로서 물리학과 철학이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인데,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밝혔듯, 이른바 과학이라는 것은 패러다임이 바뀔지언정―예컨대 만유인력-일반상대성이론-특수상대성이론으로 나아가는 것처럼―그 시대의 지배적인 과학원리를 적용함에 있어서 지역적 편차가 있지는 않다. 반면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이와 상황이 좀 달라서, 고대(古代)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동서양간 인식체계의 차이가 크고,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수렴해가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각각의 사회에 수용되는 과정이나 방식은 여전히 큰 차이를 보인다.
이 책은 라캉의 욕망이론을 다루고 있으므로 적어도 프로이트의 글은 읽어봐야 하지만, 모든 순서를 다 지키기 위해 아무 책도 안 집느니 하나라도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 어쨌든 제일 궁금했던 건 프랑스 현대철학이었으니까. 그래도 이미 제목에서부터 ‘오이디푸스’가 떡하니 명시되어 있으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해서는 개념만이라도 미리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안티-오이디푸스’라 자칭하는 이 책은 프로이트가 사수하려 했던 오이디푸스 철옹성의 안과 밖을 까발리고 낱낱이 해부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과타리(DG)가 지적하는 프로이트식 오이디푸스 해석의 한계는, 그것의 경직된 적용으로 인해 사태(事態)의 입체적인 면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에게는 ‘X 아니면 Y’라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인데, DG는 ‘X이건 Y이건’으로 생각의 틀을 바꿀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이런 주장을 펼치기 위해 논거를 아주 현학적으로 장황하게 다루고 있지만, 가장 주된 논거는 프로이트가 인위적으로 도식화하고자 하는 삼위일체―오이디푸스 신화 속 아버지-어머니-아이의 관계―의 설정이 말만큼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찰자는 내담자(來談者)를 과거 또는 현재에 거세 콤플렉스를 경험했거나 또는 경험중인 인물(삼각형의 구도 안에서 아이)로 상정한다. 하지만 사실 이 내담자는 아버지에 가까울 수도, 어머니에 가까울 수도 있다. 더군다나, 상황적 맥락이라는 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굴절을 겪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이로 상정되었던 것이 어느 시점에 이르러 아버지 또는 어머니로 해석되어야 마땅한 경우가 있다. 거세 콤플렉스에 기반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언제까지고 남과 여, 삶과 죽음, 어른과 아이 사이에 선명한 선을 그어버림으로써, 인간 본성에 관해 대단히 단조롭고 제한적인 논의를 낳는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방식을 거부하는 대신, 인간 본성과 사회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도치(倒置)된 욕망 개념을 도입한다. 인간을 욕망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시키는 이들의 논의는, 보다 과격하게 말해 욕망을 숙주로, 인간을 기생충으로 묘사한다. 종래에 인간은 욕망을 지닌 존재였다면 이제 인간은 욕망을 위해 존재한다. 프로이트가 인간에 내재된 뒤틀린 욕망을 오이디푸스의 삼각형 안에서 마치 공식을 적용하듯 정형화된[닫힌] 설명을 제공한다면, 들뢰즈와 과타리가 말하는 욕망은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꿔가며 매우 열린 설명을 제공하는 한편, 그만큼 별도의 부연(敷衍)을 필요로 한다.
가령 신경증과 정신병을 구분하는 대목에서 ‘변태’는 이미 오이디푸스의 삼각형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전통적 방식으로 풀이될 수 없는] 영역을 병적으로 탐하는 존재인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변태가 그저 ‘그러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랬다’는 환원주의적 설명은 다음 논의를 막아버리기 때문에, ‘욕망’이라는 주춧돌 위에서 미적분[微積分], 공리계 등 수학적인 개념까지 동원하며 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런 학자연한 끝모를 개념들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은 ‘욕망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라는 주장일 것이다. 편집증적으로 인간을 제도 안에 가두는 지금의 배타적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어떻게 내공(內鞏) 안에서 분열의 흐름을 만들어낼 것인가? 이 책의 질문이다.
마침내 이들이 다다른 종착지는 자본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정면비판이다.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 위해 국가의 기틀이 닦이고, 법과 제도가 수립되며, 이데올로기들이 앙양(昻揚)된다. 더러 적나라하게 이뤄지기도 하지만, 제국주의적인 이들 기제는 아주 은밀하고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개개의 욕망을 단단히 죈다. 이 안에서 욕망의 통제권을 쥔 자와 통제 받는 자의 구분조차 모호(模糊)해지는데, 이는 산업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사회의 각 부문이 유기적으로 연결됨에 따라 상호 분리될 수 없는 기표들로 포화되었기 때문이다.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했던 제국과 달리, 시대상이 바뀔 때마다 시험대에 오르는 법과 제도와 달리, “자본주의는 자신이 확장된 규모로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고유의 내재적인 상대적 극한들로 분열증을 대체”함으로써 붕괴되지 않고 존속한다. 마르크스가 말했던 것처럼 자본주의가 불필요한 잉여가치를 과잉 생산하는 것은 맞지만, 이로써 자본주의가 자멸할 것이라는 예측까지 들어맞지 않았던 까닭은, 극한으로 치닫는 잉여가치를 상쇄할 만큼의 분열이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성질을 탈영토화와 탈코드화를 자본이라는 기표 사슬로 이뤄놓은 뒤, 성공적으로 재영토화와 탈코드화를 이뤄내는 시스템이라 표현한다. 이 분열, 또 다른 이름의 극한이라 할 수 있는 온갖 기표(記標)의 홍수 속에서 욕망은 다양한 형태로 주체할 수 없이 폭주한다. 때문에 자본주의의 연료는 충분하다. 아니, 무한하다.
사실 글이 굉장히 난해하기 때문에, 국내에 소개된 게 있다면 주석으로 달려 있는 레퍼런스들을 몇 개라도 읽어봐야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논지에 분명 일리는 있지만, 시간을 들여 책을 읽은 것은 비단 ‘안티-오이디푸스’에 대한 단면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논리적인 허점을 파헤치는 것 또한 겨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수학과 경제, 금융까지 종횡무진하는 이들의 논의는 읽는 과정에서 텍스트를 소화하는 것부터가 최우선 과제 되어가다보니 마음먹었던 만큼 빈틈을 꿰뚫을 겨를까지는 없었고, 인간 본성에 대하여 대안적인 설명을 접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내가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현대철학에 대한 붐이 일기 시작했었고, 이 얘기인즉슨 프랑스 사상계에서 이와 같은 철학적 논의는 이미 반 세기 전에 완료되었다는 뜻이다. 때문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논객의 철학을 접했다고 하기도 어렵지만, 종종 이들 철학자의 이름과 텍스트가 등장할 때 소소한 반가움을 느낀다면 그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