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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안티 오이디푸스』가 대면하는 세 부류의 적이 있게 된다. 이 적들은 똑같은 힘을 갖고 있지 않고, 다양한 정도의 위험을 대표하며, 이 책은 그들에 대해 상이한 방식으로 전투한다.
1. 정치적 금욕주의자들, 미친 투사들, 이론의 테러리스트들. 이들은 정치와 정치 담론의 순수한 질서를 보존하고자 한다. 이들은 혁명의 관료요 진리의 공무원이다.
2. 욕망의 서툰 기술자(技術者)들, 즉 정신분석가 및 모든 기호와 징후의 기호학자들. 이들은 욕망이라는 다양체를 구조와 결핍의 이항 법칙에 종속시키려 한다.
3. 끝으로 특히, 주요한 적수이자 전략적인 적은 파시즘이다. 대중들의 욕망을 동원하고 매우 효과적으로 이요할 줄 알았던 역사적 파시즘,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즘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우리의 머리와 우리의 일상 행동 속에 있는 파시즘, 우리가 권력을 사랑하게 만들고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바로 그것까지도 욕망하게 만드는 파시즘이다.
—서문
……<온갖 형태의 깊은 삶과 접촉하는 것, 돌들, 금속들, 물, 식물들과 영혼을 교감하는 것, 달이 차고 기욺에 따라 꽃들이 공기를 빨아들이듯 꿈에 잠겨 자연의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것, 렌츠는 이런 것들이 무한한 지복의 느낌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엽록소 기계 내지 광합성 기계이기, 또는 적어도 이와 유사한 기계들 속에 자기 몸을 하나의 부속품으로 슬며시 밀어 넣기. 렌츠는 인간과 자연의 구별보다 앞서, 이 구별이 설정한 모든 좌표보다 앞서 자리해 있다. 그는 자연을 자연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으로 산다. 더 이상 인간도 자연도 없다. 오로지 하나 속에서 다른 하나를 생산하고 기계들을 짝짓는 과정만이 있다. 도처에 생산적 즉 욕망적 기계들, 분열증적 기계들, 유적(類的) 삶 전체로다. 자아와 비-자아, 외부와 내부의 구별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p. 24
……처음 기계는 그 나름대로는 절단 내지 채취 같은 작동을 통해 관계를 맺는 또 다른 기계에 연결되기 때문에, 이항 계열은 모든 방향에서 선형(線形)이다. 연속된 흐름들과 본질적으로 파편적이면서도 파편화된 부분대상들의 짝짓기를 욕망은 끊임없이 실행한다.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한다. ……머리칼의 흐름, 침의 흐름, 정액과 똥오줌의 흐름. 이 흐름들은 부분대상들에 의해 생산되며, 다른 흐름들을 생산하는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부단히 절단디고,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재절단된다. 모든 <대상>은 흐름의 연속성을 전제하며, 모든 흐름은 대상의 파편화를 전제한다. 물론 각각의 기관-기계는 자기 고유의 흐름에 따라, 이 기관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에 따라 전 세계를 해석한다. 가령 눈은 모든 것을, 즉 말하기, 듣기, 똥 싸기, 씹하기 등은 보기의 견지에서 해석한다. 하지만 하나의 횡단선 속에서, 어떤 다른 기계와 늘 하나의 연결이 설립된다. 이 횡단선 속에서, 저 처음 기계는 다른 기계의 흐름을 절단하거나, 다른 기계에 의해 자신의 흐름이 절단되는 것을 <본다.>
—p. 29
……비생산적이고 소비될 수 없는 것인 기관 없는 몸은 욕망의 생산의 모든 경과를 등록하는 표면 노릇을 하기에, 욕망 기계들과 기관 없는 몸을 관련시키는 외견상의 객관적 운동 속에서 전자가 후자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모든 생산력과 생산기관을 자신에게 귀속하고 이것들에다가 외견상의 운동을 전달함으로써 준-원인으로서 작용하는 마법적 기입 내지 등록 표면의 확립이다(물신). 분열자가 정치경제학을 한다는 것도, 성욕 전체가 경제의 사안이라는 것도, 그야말로 진실이다.
—p. 38
물음은 이렇게 된다. 독신 기계는 무엇을 생산할까? 독신 기계를 통해 무엇이 생산될까? 내공(內鞏)량들이 답일 듯싶다. 순수 상태에서의, 거의 견딜 수 없는 한 점에서의, 내공량들에 대한 분열증적 경험이 있다. 즉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예된 아우성처럼 최고의 지점에서 체험되는 독신의 비참과 영광, 강렬한 이행감(移行感), 형태와 형식을 벗어 던진 순수하고 생생한 내공 상태들이로다. 사람들은 종종 환각들과 망상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환각 현상과 망상 현상은 더 깊은 차원의 나는 느낀다를 전제하며, 이것은 환각들에 대상을 주고 생각의 망상에 내용을 준다. <나는 내가 여자가 된다고 느낀다>, <내가 신이 된다고 느낀다> 등은 망상이나 환각이 아니며, 오히려 환각을 투사하거나 망상을 내면화할 것이다. 먼저 내공들, 생성들, 이행들만을 체험하는 참으로 1차적인 감정에 비하면, 망상과 환각은 2차적이다. 이 순수 내공들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것들은 밀쳐 냄과 끌어당김이라는 앞서의 두 힘에서, 이 두 힘의 대립에서 유래한다. 내공들 자신이 서로 대립하고 있고 어떤 중립 상태 주위에서 평형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와는 반대로, 내공들은 기관 없는 충만한 몸을 지칭하는 내공=0에서 출발해서 모두 플러스 값을 갖는다. 또한 내공들은 그들 간의 복잡한 관계에 따라 또 그들의 원인이 되는 끌어당김과 밀쳐 냄의 비율에 따라 상대적으로 그 값이 하강하거나 상승한다. 요컨대 끌어당기는 힘[引力]과 밀쳐 내는 힘[斥力]의 대립은 항상 플러스 값을 갖는 내공 요소들의 열린 계열을 생산하는데, 이 요소들은 한 체계의 최종적 평형상태 말고 한 주체가 경유하는 무수한 준(準)안정적 멈춤 상태들을 표현한다.
—p. 48~49
……여기서 한 번 더 맑스의 경고를 상기하자. 밀의 맛에서 누가 그것을 재배했는지 맞힐 수 없고, 생산물에서 생산 체제와 생산관계들을 알아맞힐 수 없다. 생산물을 그것이 의존하는 현실적 생산의 경과가 아니라 인과나 이해나 표현이라는 관념적 형식들에 관련시킬수록, 그만큼 그것은 특유하게, 말할 수 없이 특유하게 보인다.
—p. 57
욕망이 생산한다면, 그것은 현실계를 생산한다. 욕망이 생산자라면, 그것은 현실 속의, 그리고 현실의 생산자일 수 있을 따름이다. 부분대상들, 흐름들, 몸들을 기계 작동하며, 생산의 통일로서 기능하는 수동적 종합들, 욕망은 이런 수동적 종합들의 집합이다. 현실계는 수동적 종합들에서 생겨난다. 현실계는 무의식의 자기-생산으로서의 욕망의 수동적 종합들의 결과물이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체이다. 또는 고정된 주체를 결핍하고 있는 것이 욕망이다. 탄압을 통해서만 고정된 주체가 생기는 법이니 말이다. 욕망과 그 대상은 일체이며, 즉 기계와 기계로서의 기계이다. 욕망은 기계이며, 욕망의 대상 역시 연결된 기계이다. 그래서 생산물은 생산하기에서 채취되고, 생산하게서 생산물로 가는 중에 뭔가가 이탈하며, 이것이 유목하고 방랑하는 주체에게 여분을 준다. 욕망의 대상적 존재란 현실계 그 자체이다. ……욕망은 항상 대상적 실존의 조건들 가까이에 있다. 욕망은 이 조건들에 합류하고 또 뒤따르며, 이 조건들보다 오래가지 않으며, 이 조건들과 함께 이전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욕망은 너무도 쉽게 죽으려는 욕망이 된다.
—p. 60~61
……집단 환상에는 두 종류가 있다. 동일성이 두 방향에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욕망 기계들이, 이것들이 형성하는 거대 군중 속에서 파악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기계들이, 이것들을 형성하는 욕망의 요소적 힘들에 관련되는 방향이다. 따라 집단 환상에 있어서는, 리비도가 가장 탄압적인 사회 형식들을 포함해서 기존 사회장을 투자하거나, 또는 반대로 리비도가 기존 사회장에 혁명적 욕망을 연결하는 대체-투자로 진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욕망 기계들과 사회·기술 기계들 사이에는 결코 본성의 차이가 없다. 구별이 있긴 하지만, 그건 단지 크기의 비율(rapports)에 따른 체제의 구별이다. 그것들은 체제의 차이를 제외하면, 같은 기계들이다. 그리고 집단 환상들이 이를 보여 준다.
—p. 66
……첫째로, 기술 기계들은 분명 고장 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기능한다. 그것들 고유의 극한은 마모이지 고장이 아니다. ……욕망 기계들은 작동하면서 끊임없기 고장 나며, 고장 난 채로만 작동한다. 언제나 생산하기는 생산물에 접붙으며, 기계의 부품들은 연료이기도 하다.
……체제의 두 번째 차이가 여기서 유래한다. 욕망 기계들이 반생산을 생산하는 것은 자신들 자체를 통해서인 데 반해, 기술 기계들에게 고유한 반생산은 경과의 재생산의 외래적 조건들 속에서 생산될 뿐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기술 기계들은 하나의 경제적 범주가 아니며 언제나 하나의 사회체 내지 사회 기계와 결부되어 있다. 사회체 내지 사회 기계는 기술 기계들과 혼동되지 않으며 기술 기계들의 재생산 조건을 짓는다. 따라서 기술 기계는 원인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 생산의 일반적 형식의 지표일 따름이다.
—p. 67~68
욕망 기계들은 어떤 점에서 그 어떤 은유와도 무관하게 참으로 기계들인 걸까? 기계는 절단들의 체계라고 정의된다. 현실과의 격리라고 여겨지는 절단은 여기서 전혀 상관이 없다. 절단들은 고려되는 성격에 따라 다양한 차원에서 작동한다. 첫째로 모든 기계는 이 기계가 자르는 연속된 물질적 흐름(휠레(hylè))과 관련을 맺고 있다. 모든 기계는 햄을 절단하는 기계처럼 기능한다. 즉 절단은 연합적 흐름에서 채취를 수행한다. 가령 항문과 이것이 절단하는 똥의 흐름, 입과 젖의 흐름, 또 공기의 흐름, 소리의 흐름, 음경과 오줌의 흐름, 또 정액의 흐름. 연합적 흐름 각각은 관념적인 것으로, 돼지의 큰 넓적다리의 무한한 흐름 같은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p. 74
모든 것은 욕망 기계들 속에서 동시에 기능하지만, 또한 중단들과 단절들, 고장들과 결함들, 단속들과 합선들, 거리들과 분산들 속에서, 결코 그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로 재통합하지 않는 총합 속에서 기능한다. 여기서 절단들은 생산적이며, 그 자체가 재통합들이기 때문이다. 분리들은, 분리인 한, 포괄적이다. 소비들 자체는 이행들, 생성들, 회귀들이다. ……실사(實辭)로서 사용되며, 하나[一者]는 물론 여럿[多]도 넘어서고, 하나와 여럿의 술어 관계를 넘어서는 다양체(multiplicité)라는 범주만이 욕망적 생산을 설명할 수 있다. 욕망적 생산은 순수 다양체, 말하자면 통일체(unité)로 환원될 수 없는 긍정이다. 우리는 부분대상들, 벽돌들, 잔여물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고대 조각상들의 조각들처럼 완성되고 다시 모여, 기원(起源)에 있는 통일체 같은 통일체를 만들기를 기다리는 저 사이비 파편들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더 이상 우리는 기원의 총체성도 목적지의 총체성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조각들을 평화롭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칙칙한 변증법적 진화의 잿빛 어조를 더는 믿지 않는다. 우리는 총체성들을 곁으로 밀려났을 때에만 믿는다.
—p. 83~84
따라서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전체는 생산된다. 그것 자체는 부분들 곁에서 하나의 부분으로서 생산된다. 그것은 통합하지도 않고 총체화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부분들에 적용되면서 통하지 않는 관들 사이에 엉뚱한 소통들만을 설립하고, 자기의 고유한 차원 속에서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보존하는 요소들 사이의 횡단적 통일들만을 설립한다.” ……기관 없는 몸은 하나의 전체로서 생산되지만, 다만 자기 장소에서, 생산과정 속에서, 그것이 통일하지도 총체화하지도 않는 부분들 곁에서 생산된다. 기관 없는 몸이 부분들에 적용되고 부분들로 복귀할 때, 기관 없는 몸은, 기표 사슬들의 절단들 및 거기서 눈에 띄는 주체의 절단들을 통해 부분대상들의 기능적 절단들의 끊임없는 재절단이 일어나는 자기 자신의 표면 위에서, 횡단적 소통들, 초한적 총합들, 다의적·횡단담론적 기입들을 생겨나게 한다.
—p. 85
아이가 자기 삶을 체험하고 또한 산다는 게 뭔지 자문하는 것은 부분대상들 가운데서요 욕망적 생산의 비가족적 관계들 안에서이다. 이 물음은 분명 부모와 <관련>되고 가족 관계 안에서만 잠정적인 답을 얻을 수 있지만 말이다. <나는 여덟 살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늘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인지, 왜 사는지 자문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여섯 살 때 마르세유의 블랑카르드 거리의 어느 집에서 어머니라 불리는 어떤 여자가 준 초콜릿 빵을 먹으면서, 존재한다는 것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숨 쉬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했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위해 또 그게 나한테 어울리는 일인지 또 어떤 점에서 어울리는지 알아보기 위해 마침내 숨을 쉬려 했던 기억이 난다.> 여기에 본질적인 것이 있다. 한 물음이 아이에게 제기된다. 그 물음은 아마 엄마라 불리는 여자와 <관련될> 테지만, 그 여자와 관련해 생산된 것은 아니며, 욕망 기계들의 작동 속에서, 가령 입-공기 기계나 미각 기계의 차원에서 생산되었다. 산다는 건 뭘까? 숨 쉰다는 건 뭘까? 나는 뭘까? 내 기관 없는 몸에서 숨 쉬는 기계란 뭘까? 아이는 형이상학적 존재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처럼 부모는 이 물음 속에 없다.
—p. 92
……프로이트에게는 사태가 늘 이렇다. 남녀 양성에 공통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두 성에다 각각 결핍을 주고, 비대칭적인 두 계열에 결핍을 분배하며, “너는 소녀 아니면 소년이다!”라는 분리들의 배타적 사용의 기초를 놓기 위합이다. 오이디푸스와 그 <해결>도, 소년과 소녀에게 서로 다르긴 해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그 두 경우에 거세에 대해서도, 거세와 오이디푸스의 관계에 대해서도 사태는 마찬가지다. 거세는 공통된 운명, 말하자면 우세하며 초월적인 남근인 동시에, 소녀들에게는 음경에 대한 욕망으로 나타나고, 소년들에게는 음경을 잃는 공포 내지 수동적 태도의 거부로 나타나는, 배타적 분배이다. 이 공통된 어떤 것은 무의식의 분리들의 배타적 사용의 기초를 놓아야 하며, 우리에게 체념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오이디푸스에 대한 체념, 거세에 대한 체념, 소녀들에게는 음경에 대한 욕망의 포기, 소년들에게는 남성적 항의의 포기, 요컨대 <자기 성의 인수>를 가르쳐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거세는 오이디푸스화의 완성이다. 오이디푸스화란 정신분석이 무의식을 거세하고 거세를 무의식 속에 주입하는 조작이다. 무의식에 대한 실천적 조작으로서의 거세는, 전적으로 정립적이고 전적으로 생산적인 욕망 기계들의 수천의 흐름-절단들이 하나의 똑같은 신화적 장소, 즉 기표의 단일한 자취 속에 투사될 때 얻어진다. 우리는 무의식이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신도송(信徒頌)을 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무의식은 오이디푸스도 모르지만 거세도 모른다. 무의식이 부모도, 신들도, 법도, 결핍도……
—p. 113~115
우리는 이미 변태가 잘 오이디푸스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오이디푸스의 영토성보다 더 인공적이고 더 몽상적인 영토성을 발명해 내고 있는데, 그가 무슨 이유로 오이디푸스화되랴? 우리는 분열자가 오이디푸스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는 영토성 바깥에 있고, 자기 흐름들을 사막까지 가져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토지에서마저도 히스테리 내기 강박 형식의 <저항들>이 욕망의 흐름들의 무오이디푸스적 질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질적 경제학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는 흐름들이 새어 나오고, 삼각형을 가로질러 지나가, 삼각형의 꼭짓점들을 서로 떼어 놓는다. 오이디푸스의 마개는 이 흐름들을 제어할 수 없다. 잼 속에서나 물 위에서는 마개가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흐름들은 용암의 저항할 수 없는 압력 내지 물의 꺾을 수 없는 침투력을 행사하며 삼각형의 벽면을 뚫고 바깥으로 나간다.
—p. 125
우리는 통계적 또는 그램분자적으로는 이성애자이지만, 인물적으로는 알게 모르게 동성애자이며, 결국 요소적으로, 분자적으로는 횡단 성애자(trans-sexués)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자신에 대한 해석들 중에서 오이디푸스화하는 모든 해석을 처음으로 거부한 사람인 프루스트는 동성애의 두 유형 또는 차라리 동성애의 두 영역을 대립시킨다. 이 두 영역 중 하나만이 오이디푸스적이고 배타적이고 우울증적이며, 다른 하나는 무오이디푸스적이고 포괄적이고 포함되며 분열증적이다. <필경 가장 소심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남자들은, 이들이 받는 쾌락을 남성의 얼굴과 관련시킬 수만 있다면, 그 쾌락의 물질적 종류에는 거의 개의치 않는다. 반면 필경 더 격렬한 감각을 가진 남자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쾌락에 절박한 위치 지정을 부여한다. 이들의 고백은 아마도 세상의 보통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리라. 아마 그들은 토성의 위성 아래서는 덜 배타적으로 살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겐 첫 부류의 남자들에서처럼 여성들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으니 말이다. …… 이 둘째 부류의 남자들은 여자들을 사랑하는 여자들을 찾는다. 이런 여자들은 이 남자들에게 젊은 남자를 얻어 줄 수 있으며, 이 남자들이 젊은 남자와 얻을 것임이 틀림없는 쾌락을 증가시켜 줄 수 있다. 더욱이 이 남자들은 한 남자와 얻는 것과 똑같은 쾌락을 이 여자들과도 똑같은 방식으로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남자들이 이 여자들과 맺는 관계들 속에서, 이 남자들은 여자들을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 한 명의 다른 여자 역할을 하며, 이와 동시에 이 여자는 이 남자들이 남자에게서 발견하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을 이 남자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p. 131
모든 것은 마치 다음과 같은 식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른바 기표 사슬은 그 자체가 비기표적 요소들, 즉 다의적인 글과 이탈될 수 있는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고, 특수 처리해서 사슬을 끊으면 이 사슬에서 전제군주 기표라는 이탈된 대상을 추출할 수 있는 듯하다. 일단 이렇게 되면 사슬 전체는 이 전제군주의 기표의 법에 매달리고, 사실의 고리마다 삼각형화가 발생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무의식의 종합들의 초월적 사용을 내포하는 이상한 오류 추가 있다. 사람들은 이탈될 수 있는 부분대상들에서 이탈된 완전한 대상으로 이행하는데, 이로부터 결핍의 배정을 통해 온전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가령 자본주의 코드와 그 삼위일체 공식에서는, 이탈될 수 있는 사슬로서의 돈이 이탈된 대상으로서의 자본으로 바뀌는데, 자본은 재고와 결핍이라는 물신적 양상을 띠고서만 존재한다. 오이디푸스의 코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채취와 이탈의 에너지로서의 리비도는 이탈된 대상으로서의 남근으로 바뀌는데, 남근은 재고와 결핍이라는 초월적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p. 136~137
욕망적 등록의 분리 종합들 속에 오이디푸스가 미끄러져 들어갈 때 오이디푸스는 이 종합들에 어떤 제한적 내지 배타적 사용이라는 이상을 강요한다. 이 사용은 삼각형화의 형식―아빠, 엄마 아니면 아이임―과 합류한다. 이것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분별 기능 속에서의 ……아니면…….. 의 군림이다. 저기 엄마에서 시작해서, 저기는 아빠이고, 또 저기는 너다. 너는 네 자리에 있어라. 오이디푸스의 불행은 정확히 말하자면 어디서 누가 시작하는지, 누가 누구인지를 더 이상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부모 아니면 아이>라는 것은 삼각형의 변들 위에 있는 다른 두 분별, 즉 <남자 아니면 여자>, <죽었거나 아니면 살아 있음>도 수반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부모인지 아이인지 알아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아서도 안된다.
―p. 140
오이디푸스적 등록의 특성은 분리 종합의 배타적·제한적·부정적 사용을 도입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오이디푸스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용은 거의 상상하기 힘들다. 심지어 세 가지 가족 신경증마저도, 더 이상 오이디푸스를 적용할 수 없다는 고통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오이디푸스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정신분석에서, 프로이트에서, 배타적 분리들에 대한 이런 취향이 도처에서 시행되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분열증은 우리에게 오이디푸스 외적인 독자적 교훈을 주는 것 같으며, 분리 종합의 미지의 힘, 더 이상 배타적이지도 제한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충분히 긍정적·무제한적·포괄적인 하나의 내재적 사용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 같다. 여전히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된 항들을 긍정하고, 이 항들의 거리 전체를 가로질러 이 항들을 긍정하고, 한 항을 다른 항에 의해 제한하지도 않고 한 항을 다른 한 항으로 배제하지도 않는 분리, 이것은 아마 최고의 역설이다. <……아니면……> 대신 <……이건 ……이건,> 분열자는 남자이고 또한 여자인 것이 아니다. 그는 남자이거나 여자이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남자들의 측면에서는 남자요, 여자들의 측면에서는 여자이다. ……분열자는 죽었거나 아니면 살아 있는데, 동시에 두 상태에 있지는 않되, 이 두 상태 각각은 분열자가 미끄러지며 조망하는 거리의 양 끝에 있다. 그는 아이이거나 부모이거나이지, 아이이면서 부모이지는 않으며, 하지만 나눌 수 없는 공간에 있는 막대기의 두 끝처럼 한쪽 끝에서 다른 것이 된다. ……즉 모든 것이 나뉘지만, 다만 자신 안에서 나뉜다.
―p. 141~142
분열자는 모순되는 것들의 종합을 분리 종합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 종합의 배타적·제한적 사용을 그것의 긍정적 사용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분리 안에 있다. 그는 모순되는 것들을 더 깊이 파 내려가 동일시함으로써 분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나눌 수 없는 거리를 조망함으로써 분리를 긍정한다. 그는 단순히 양성구유도 아니고 두 성 사이에 있지도 않으며 간성(間性) 존재(intersexué)도 아닌, 횡단-성애자이다. 그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고(trans-vimort) 부모와 아이를 가로지른다(trans-parenfant). 그는 두 개의 반대되는 것을 같은 것으로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들이 서로 다른 한에서 그것들을 서로 관련시키는 것으로서의 둘 사이의 거리를 긍정한다. 그는 모순인 것들에 대해 마음을 닫지 않고 도리어 마음을 연다. 그는 마치 포자(胞子)들로 부푼 주머니 같아서, 지금까지는 그 포자 하나하나의 독자성들을 살리지 않고 부당하게 가둬 놓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풀어놓는다. 지금까지는 이것들 중 어떤 것은 배제되고 어떤 것은 보유되었지만, 이제 이것들은 기호-점들이 되어, 모든 것은 그들 간의 새로운 거리에 의해 긍정된다.
―p. 142~143
……아버지의 법 너머에서, 모든 법 너머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아마도 프로이트 정신분석이 가져온 가장 본질적인 가능성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또 아마도 프로이트 본인 때문에,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결론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정신분석이 허용한 이 해방은 정신분석 바깥에서 성취될 것이거나 또는 이미 성취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비관론이나 이 낙관론의 어느 편에도 가담할 수 없다. 사실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의 진정한 해결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낙관론이 있다. “오이디푸스는 신과 같다. 아버지는 신과 같다. 문제라는 것은 문제와 해를 모두 없애 버릴 때에라야 해결된다.” 분열-분석은 오이디푸스를 해결하겠다고 나서지 않으며, 오이디푸스적 정신분석보다 그것을 더 잘 해결할 수 있다고 자부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식을 탈-오이디푸스화해서 진정한 문제들에 도달하려 한다. 거기서는 그 문제가 제기될 수도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이 변화, 이 해방이 정신분석 바깥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성립하는 비관론에 가담할 수도 없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정신분석 기계를 혁명 장치의 불가결한 한 부품으로 만드는 내적 역전의 가능성을 믿는다. 게다가 이 가능성의 객관적 조건들은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 같다.
―p. 151
……정신분석가들에게는 똑 같은 비난이 더 심하게 적용된다. 그들은 신화를, 오이디푸스를, 거세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들은 이렇게 답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들을 믿는가에 있지 않고, 무의식 자체가 그것들을 믿는가에 있다고. 하지만 이 무의식이 믿음의 상태로 환원된다면, 도대체 그런 무의식이란 무엇일까? 누가 무의식에 믿음을 주입할까? 정신분석은 믿음을 괄호에 넣을 때만, 말하자면 이데올로기 형식으로서의 오이디푸스를 유물론적으로 환원할 때만 엄밀한 분과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오이디푸스는 잘못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란 것이 필연적으로 잘못된 어떤 것이요, 실효적 생산을 빗나가게 하고 질식시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견자(見者)란 가장 덜 믿는 자이다. 우리가 욕망을 오이디푸스와 관련시킬 때, 우리는 할 수 없이 욕망의 생산적 성격을 무시하는 것이며, 우리는 욕망을 그 의식적 표현에 불과한 모호한 꿈이나 상상이라고 단죄하는 것이며……
……조직화된 몸은 생식을 통한 재생산의 대상이다. 그것은 재생산의 주체가 아니다. 재생산의 유일한 주체는 생산의 순환 형식을 고수하는 무의식 자신이다. 성욕은 생식에 봉사하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몸의 생식이 무의식의 자기-생산으로서의 성욕에 봉사한다. 성욕은 자아가 생식 과정에 종속되는 것을 대가로 주어지는 자아를 위한 덤을 재현하지 않는다. 반대로 생식이 자아의 위로이고 자아의 확장이며, 무의식이 자신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게 할 따름인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의 이행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무의식은 언제나 고아였다. 말하자면, 무의식은 자연과 인간, 세계와 인간의 동일성 속에서 자기 자신을 낳았다. 이제 아버지의 문제, 신의 문제는 불가능한 것, 무관심한 것이 되었다. 그런 존재를 긍정하건 부정하건, 살리건 죽이건, 그것은 같은 것으로 돌아온다. 즉 무의식의 본성에 대한 유일하고 똑 같은 오해로.
―p. 192~194
욕망에 대한 세 가지 오류는 결핍, 법, 기표라 불린다. 그것은 결국 하나의 똑 같은 오류, 즉 독실한 무의식관(觀)을 형성하는 관념론이다. 결핍으로 박탈이 아니라 공백을 만들고, 법으로 명령이 아니라 놀이 규칙을 만들며, 기표로 의미가 아니라 분배자를 만드는 조합(組合)의 견지에서 이 개념들을 해석해 봐야 소용없다. 이것들이 자기들 뒤에 신학적 수행원들, 즉 존재의 불충분, 죄책감, 의미화를 거느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조적 해석은 모든 믿음을 거부하고, 이미지들을 넘어서며,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해서는 기능만을 남겨 두고, 금지와 위반을 구조의 조작자들로 규정한다. 하지만 어떤 물로 이 개념들에서 그 배경, 그 배후 세계, 즉 종교성을 씻어 낼 수 있으랴? 불신으로서의 과학적 앎은 참으로 믿음의 마지막 피난처이다. ……욕망에 결핍이 다시 도입되자마자, 모든 욕망적 생산은 으깨지고 환상의 생산에 불과한 존재로 환원된다. 하지만 기호는 환상을 생산하지 않는다. 기호는 현실계의 생산이며, 현실 속에서 욕망의 정립이다. 법이 없으면 욕망도 없다는 것이 어느 시대에나 잘 알려진 일임을 굳이 환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욕망을 법에 유착시키자마자, 실상 영원한 탄압의 영원한 조작이 다시 시작된다. 이 조작은 무의식 위에 금지와 위반의 원을, 흰 미사와 검은 미사를 닫는다. 하지만 욕망의 기호는 결코 법의 기호가 아니다. 욕망의 기호는 권력의 기호이다. 그리고 욕망은 자신의 권력을 정립하고 전개하며, 욕망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흐름들을 흐르게 하고 실체들을 절단한다는 이 사실을 누가 감히 법이라 부르랴? 욕망은 기표에 의존하게 하자마자, 욕망은 다시 거세라는 효과를 낳는 전제군주제의 굴레 아래 들어간다. 거기서 우리는 기표 자체의 특질을 알게 된다. 하지만 욕망의 기호는 결코 의미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천의 생산적 흐름-절단들 속에 있으며, 이것들은 거세라는 단 하나의 특질 속에서 의미화하지 않는다. 욕망의 기호는 언제나 많은 차원을 가진 하나의 기호-점이며, 점(點) 기호론의 기초로서의 다성성(多聲性)이다.
―p. 198~199
욕망이 억압되는 까닭은, 아무리 작은 욕망일지라도 일단 욕망이 있게 되면 사회의 기성 질서가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욕망이 비-사회적(a-social)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다. 하지만 욕망은 뒤죽박죽이다. 욕망 기계가 있을 수 있게 되면 사회의 모든 부분은 온통 요동친다. 몇몇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혁명적인 것은 욕망이지 축제가 아니다! 또한 어떤 사회라도 참된 욕망의 정립을 허용할 수 있게 되면 그 착취, 예속, 위계의 구조가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만일 어떤 사회가 이 구조들과 뒤섞이면 그때에는, 그렇다, 욕망이 그 사회를 본질적으로 위협한다. 따라서 욕망을 억압하고 나아가 탄압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내어 탄압, 위계, 착취, 예속이 그 자체로 욕망되도록 하는 것이 사회로서는 사활이 걸린 중대한 일이다.
―p. 208
신경증과 정신병 사이에는 본성, 종류, 집단의 차이가 없다. 정신병과 마찬가지로, 신경증도 오이디푸스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반대로 오이디푸스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신경증이다. 그러면 정신병-신경증의 관계를 어떻게 착상해야 할까? 그런데 이 관계는 다른 관계들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정신병을 과정 자체라 부르느냐, 아니면 반대로 과정의 중단이라 부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뀐다.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은 욕망적 생산이지만, 그것은 끝에 가서, 자본주의의 조건들 속에서 규정된 사회적 생산의 극한으로서 그러하다. 분열증은 우리, 현대인의 <병>이다. 역사의 끝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역사의 끝에서는 과정의 두 방향이 합쳐진다. 즉 자신의 탈영토화의 끝까지 가는 사회적 생산의 운동과 새로운 대지에 욕망을 나르고 거기서 욕망을 재생산하는 형이상학적 생산의 운동이라는 두 방향이 역사의 끝에서 합쳐지는 것이다. ……분열자는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나르고, 이 흐름들이 기관 없는 몸이라는 사막을 가로지르게 하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욕망 기계들을 설치하고 작용하는 힘들의 영속적 유출을 생산한다. 분열자는 극한, 분열을 넘어섰다. 그는 사회적 생산의 외곽에서 욕망의 생산을 늘 유지하면서, 거기에 접해 있으면서도 늘 밀려나고 있었다. 분열자는 떠날 줄 안다. 분열자는 떠남을, 태어나고 죽는 것만큼이나 단순한 어떤 것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분열자의 여행은 기이하게도 제자리에서 일어난다. 분열자는 다른 세계에 관해 말하지 않으며, 다른 세계에 속하지도 않는다. 설사 공간 속에서 이전된다 해도, 그것은 내공에서의 여행이요, 여기 세워져 머물러 있는 욕망 기계 둘레에서의 여행이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서 우리 세계로 사막이 전파되고, 또한 새로운 대지와 윙윙거리는 기계가 전파되기 때문이며, 이 기계 둘레를 분열자들은 새 태양의 행성들처럼 돈다.
―p. 232~233
광기는 반드시 붕괴(breakdown)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돌파(breakthrough)일 수도 있다. …….자아 상실 또는 초월론적 경험을 겪는 사람은 여러 방식으로 혼돈스럽게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때 그는 미친 사람으로 적법하게 간주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미친 것과 병든 것, 이 두 범주가 우리 문화에서는 혼동되었기는 하나, 미친 것이 반드시 병든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사이비 건강이라는 소외된 출발점에서 보자면, 모든 것이 애매하다. 우리의 건강은 참된 건강이 아니다. 저들의 광기는 참된 광기가 아니다. 우리의 환자들의 광기는 우리가 그들에게, 또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가하는 파괴의 책략이다. 아무도 우리가 참된 광기를 만날 수 있다거나, 우리가 참으로 멀쩡하다고 상정하지 말자. 우리가 환자들에게서 만나는 광기는, 우리가 건강이라고 부르는 저 이상한 종합의 자연스러운 치유일지도 모를 것의 졸렬한 모조품, 거짓 꾸밈, 기괴한 회화이다. 참된 정신 건강은 그 어떤 식으로건 정상적 자아의 해체를 함축한다……
―p. 234
결국 보편적인 것, 즉 기관 없는 몸과 욕망적 생산이 명백히 승리자인 자본주의에 의해 규정된 조건들 속에 있다면, 세계사를 만들기에 충분한 결백함은 어떻게 찾을까? 욕망적 생산 역시 처음부터 있다.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이 있으면 곧바로 욕망적 생산이 있다. 하지만 진실로 전(前)-자본주의사회의 기계들은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 욕망의 핵심에 있다. 그것들은 욕망을 코드화하고, 욕망의 흐름들을 코드화한다. 욕망을 코드화하는 것―또 탈코드화된 흐름들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코드화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회체의 일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자본주의는 탈코드화된 흐름들 위에서 구성된 유일한 사회 기계로, 생래적 코드들을 화폐 형식을 띤 추상량들의 공리계로 대체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욕망의 흐름들을 해방하지만, 이는 자본주의의 극한 및 자본주의의 해체 가능성을 정의하는 사회적 조건들에서만 그러하며, 그래서 자본주의는 자신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운동에 맞서 온 힘을 다해 끊임없이 거역한다. 자본주의의 극한에서, 탈영토화된 사회체는 기관 없는 몸의 자리를 차지하고, 탈코드화된 흐름들은 욕망적 생산으로 뛰어든다. 따라서 맑스가 정식화한 규칙들을 정확하게 따른다는 조건에서, 역사 전체를 자본주의의 조명 아래 회고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정당하다. 무엇보다, 세계사는 우발들의 역사이지 필연의 역사가 아니며, 절단들과 극한들의 역사이지 연속성의 역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흐름들이 코드화를 벗어나, 이렇게 벗어나면서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체라 규정할 법한 새로운 기계를 구성하려면, 큰 우연들, 즉 다른 데서 예전에 생산될 수도 있었을 법한 또는 절대로 생산될 수 없었을 법한 놀라운 만남들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가령 사유재산과 상품생산의 만남이 그것인데, 그렇지만 이 둘은 사유화와 추상화라는 탈코드화의 아주 다른 두 형식으로 제시된다. 아니면 사유재산 자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본가들이 소유한 변환 가능한 부의 흐름들과 노동력만을 소유한 노동자들의 흐름의 만남. 어떤 점에서는, 자본주의는 모든 사회 형식에 출몰했으나, 섬뜩한 악몽으로, 즉 모든 사회 형식의 코드들을 벗어날 흐름에 대해 이 사회 형식들이 갖고 있는 공황 수준의 공포로 출몰했다. 다른 한편 세계사의 조건들과 가능성을 규정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면, 이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자신의 극한, 자본주의 자신의 파괴와 관련되는 한에서만 진실이다. 맑스의 말처럼 자본주의가 자기 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한에서만 말이다.
―p. 245~246
승화는 항문성과 깊이 연계되어 있지만, 이는 항문성이 달리 사용될 수 없기에 승화의 재료를 제공하리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항문성은 가장 높은 것으로 전환시켜야 할 가장 낮은 것을 재현하지 않는다. 더 높은 데로 이행하는 것은 바로 항문 자신인데, 이는 항문이 장밖에 놓이는 조건들에서이며, 승화는 거꾸로 이 조건들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이 조건들은 승화를 전제하지 않는다. 항문적인 것이 승화에 자신을 내맡긴 게 아니라, 바로 승화 전부가 항문적이다. 또한 승화에 대한 가장 단순한 비판은, 승화는 우리를 결코 똥에서 빠져나오게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항문성은 항문이 투자 철회되는 만큼 더 크다. 욕망의 본질은 물론 리비도이다. 하지만 리비도가 추상량이 될 때, 고갈되고 투자 철회된 항문은 바로 이 추상량을 측정하는 단위들 노릇을 하는 온전한 인물들과 특유한 자아들을 생산한다.
―p. 252
사슬에서의 이탈 각각은 생산의 흐름들의 이쪽저쪽에서 초과와 부족, 결핍과 축적 등의 현상을 생산하는데, 이런 현상은 획득된 위신 내지 분배된 소비라는 유형의 교환 불가능한 요소들로 만회된다. 코드의 잉여가치는, 그것이 모스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공식에 대응하는 한에서, 잉여가치의 원시적 형식이다. 즉 선물은 욕망과 권력의 영토적 기호요 재화의 풍요와 결실의 원리이므로 이자를 보태 갚아야 하는데, 바로 증여된 사물의 영(靈), 즉 그 사물들의 힘이 이렇게 되게 만든다. 비평형은 병리적 귀결이기는커녕 기능적이며 근본적이다. 열림은 애초부터 닫힌 체계의 확장이기는커녕 오히려 1차적이며, 급부를 구성하며 비평형의 이전을 통해 비평형을 만회하는 요소들의 이종성(異種性)에 기초해 있다. 요컨대 결연의 관계들에 따른 기표 사슬에서의 이탈들은 흐름들의 층위에서 코드의 잉여가치를 낳으며, 이로부터 혈연의 계열들을 위한 지위 차이가 나온다. 코드의 잉여가치는 원시 영토 기계의 잡다한 조작들을 실효화한다. 즉 사슬에서 절편들을 이탈시키기, 흐름에서 채취들을 조직하기, 각자에게 돌아오는 몫을 할당하기.
―p. 262~263
……즉 어떤 사회 기계가 잘 기능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로 기능하기 위해서이다. ……같은 점을 이 체계들에서 정치 기능의 조직에서도 볼 수 있는데, 정치조직은 자신의 무력함을 내보임으로써만 실효적으로 실행된다. 민족학자들은 친족 관계의 규칙들이 현실의 결혼에서는 적용되지도 않고 또 적용될 수 없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이 규칙들이 이상적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 규칙들이, 봉쇄된다는 조건에서 배치(le dispositif)가 다시 작동을 시작하며 또 배치가 집단과 필연적으로 부정적 관계에 놓이는 임계점들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 기계와 욕망 기계의 동일성이 나타난다. 사회 기계의 극한은 마모가 아니라 고장이며, 사회 기계는 삐걱거리고 고장 나고 작은 폭발들을 터뜨리면서만 기능한다. 기능 장애들은 그 기능 자체의 일부를 이루는데, 이는 잔혹 체계의 미미한 양상이 결코 아니다. 부조화나 기능 장애가 사회 기계의 죽음을 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와 반대로 사회 기계는 자기가 유발하는 모순들, 자기가 초래하는 위기들, 자기가 낳는 불안들, 그리고 자신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지독한 조작들을 먹고사는 습관이 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깨달았고, 자기 의심을 멈췄으며, 한편 사회주의자들도 마모에 의한 자본주의의 자연사(自然死) 가능성을 믿기를 포기했다. 그 누구도 모순으로 인해 죽은 적은 없다. 그리고 그것(ça)이 고장 날수록, 그것이 분열증화할수록, 그것은 더 잘 작동한다, 미국식으로 말이다.
―p. 264~265
토지의 충만한 몸은 구별이 없는 게 아니다. 괴로워하고 위험하며 유일하고 보편적이기에, 토지의 충만한 몸은 생산 및 생산자들 그리고 생산의 연결들로 복귀한다. 하지만 이 위에는 또한 모든 것이 달라붙고 기입되고, 모든 것이 끌어당겨지고 기적을 낳는다. 그것은 분리 종합의 요소요 이 종합의 재생산의 요소이다. 그것은 혈연 내지 계보의 순수한 힘, 즉 누멘이다. 이 충만한 몸은 출산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혈연은 이 몸 위에 표시된 기입의 최초 특성이다. 우리는 이 내공적 혈연, 이 포괄적 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나뉘지만, 단지 자기 안에서 나뉘며, 또 여기서는 같은 존재가 도처에, 모든 측면에, 모든 층위에, 내공의 차이를 지닌 채 있다. 포함된 동일한 존재는 충만한 몸 위에서 나눌 수 없는 거리들을 편력하며, 모든 독자성을, 즉 미끄러지면서 자신을 재생산하는 종합의 모든 내공을 지나간다. 계보적 혈연이 생물학적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라고 상기시켜 봐야 아무 소용없다. 계보적 혈연은 토지의 충만한 몸이라는 우주적 알 위에 기입되어 있는 만큼 필연적으로 생물적-사회적이다. 그것은 일자 또는 차라리 원시적인 ‘둘이자-하나(l’un-deux)’라는 신화적 기원을 갖고 있다. 쌍둥이들이라 말해야 할까 쌍둥이라 말해야 할까? 이 쌍둥이는 나뉘어 있으면서도 자기 안에서 통일되어 있다.
―p. 269~270
……하지만 바로 다음과 같은 두 근친상간을 혼동할 수는 없다. 즉 근친상간을 제정하는 비인물적 내공 체제 속에 있는 그런 근친상간과, 근친상간을 금하고 근친상간을 인물들에 대한 위반으로 규정하는 상태에서 외연 속에서 재현되는 그런 근친상간을 혼동하면 안 된다. 따라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것 자체와는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며, 또한 어머니는 거기서 토지이기도 하고, 근친상간은 무한한 재생(再生)이라고 말할 때 융은 전적으로 옳다. 육체적 콤플렉스(complexe somatique)는 배아적 임플렉스(implexe germinal)와 관련된다. 근친상간은 콤플렉스 속에서는 근친상간으로 재현될 수 없는 이쪽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이 콤플렉스는 이 이쪽의 억압에서 파생된 요소이기 때문이다. 금지된 그런 근친상간은 욕망된 그런 근친상간을 억압하는 데 이바지한다. 내공적·배아적 흐름은 욕망의 대표이며, 억압은 바로 이 흐름에 관여한다. 외연적인 오이디푸스 형상은 이 흐름의 이전된 재현내용이며, 억압에 의해 유발되며 욕망을 은폐하게 되는 미끼 또는 기만된 이미지이다.
―p. 283
……우리 역시도 재현을 억압한다고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말한다. 또 모든 것은 우리에게, 우리도 역시 종종 정감의 충만한 성적 성격을 간직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정신분석을 받지 않아도 문제되는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안다. 하지만 무슨 권리로 억압의 대상이 오이디푸스적 재현이라고 말하는 걸까? 근친상간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늘, 근친상간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욕망된다고 하는 이 창백한 이유로 다시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근친상간 금지는 오이디푸스적 재현을 내포할 터이고, 이 재현의 억압과 회귀에서 근친상간 금지가 탄생할 터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오이디푸스적 재현은 근친상간 금지를 전제할뿐더러, 우리는 근친상간 금지가 오이디푸스적 재현에서 탄생한다거나 거기서 결과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요컨대 근친상간의 탄압이 억압된 오이디푸스적 재현에서 탄생하지 않는 것은 이 탄압 자체가 이 억압을 유발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점은, 억압-탄압의 일반 체계는 오이디푸스 이미지를 억압된 것의 왜곡으로 탄생시킨다는 점이다. 성적 탄압이 근친상간이 아닌 다른 것에 관여함에 따라, 이번에는 이 이미지가 억압을 당하면서 끝나고, 이 이미지가 억압된 것 또는 결과적으로 욕망된 것의 자리에 온다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의 역사라는 하나의 긴 역사이다. 하지만 억압된 것은 1차적으로 오이디푸스적 재현이 아니다. 억압된 것은 바로 욕망적 생산이다. 억압된 것은 바로 이 생산에서 사회적 생산 내지 재생산으로 이행하지 않는 것이다. 억압된 것은 바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에 무질서와 혁명을 도입할 것, 즉 욕망의 코드화되지 않은 흐름들이다.
―p. 300~301
오이디푸스는 하나의 극한이다. 하지만 극한의 뜻은 많다. 왜냐하면 극한은 모태의 역할을 하는 개시 사건으로서 처음에 있을 수도 있고, 등장인물들을 매개하고 이들 관계의 정초를 확보하는 구조적 기능으로서 중간에 있을 수도 있고, 종말론적 규정으로서 끝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이디푸스가 하나의 극한인 것은 이 마지막 뜻에서일 뿐임을 보았다. 욕망적 생산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바로 이 셋째 뜻도 잡다하게 의미가 많다. 첫째로, 욕망적 생산은 사회적 생산의 극한에 있고, 탈코드화된 흐름들은 코드들과 영토성들의 극한에 있으며, 기관 없는 몸은 사회체의 극한에 있다. 분열-흐름들이 벽을 뚫고 지나가며, 모든 코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사회체를 탈영토화할 때마다 절대적 극한을 말할 수 있으리라. 기관 없는 몸이란 탈영토화된 사회체요, 욕망의 탈코드화된 흐름들이 흐르는 사막이요, 세계의 끝, 묵시록이다. 하지만 둘째로, 상대적 극한은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는 실제로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기계 작동하고 흐르게 하지만, 코드들을 훨씬 더 압제적인 계량적 공리계로 대체하면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경향성에 반대되는 운동에 순응하면서, 끊임없이 벽에 접근하는 동시에 벽을 뒤로 물러나게 한다. 분열증은 절대적 극한이지만, 자본주의는 상대적 극한이다. 셋째로, 극한이 사회구성체에 도달할 우려가 있을 때 사회구성체가 온 힘을 다해 쫓아내는, 저 현실적 형식을 예감 내지 예견하지 못하는 사회구성체는 없다. 그리하여 전-자본주의 구성체들은 집요하게 상인과 기술자를 배타적 계급에 처박아 놓고, 돈의 흐름들과 생산의 흐름들을 막아 자신의 코드들을 파괴할 자율성을 얻지 못하게 한다. 이와 같은 것이 현실적 극한이다. 이런 사회들이 이 현실적 극한에 부딪치면, 안에서는 억압되지만 밖에서는 되돌아오므로, 이 사회들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의 기호를 우울하게 바라본다.
―p. 305~306
……오이디푸스는 이전된 극한이다. 그렇다, 오이디푸스는 보편적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을 믿어 버리는 것은 잘못이다. 오이디푸스는 억압-탄압 체계의 산물이고, 그러면 오이디푸스는 보편적이지 않다. 그게 아니면, 오이디푸스는 보편적이며 욕망의 정립이다. 실상 오이디푸스가 보편적인 것은 그가 모든 사회에 출몰하는 극한의 이전이기 때문이며, 모든 사회가 자신의 가장 깊은 음화(陰畵)로서, 즉 욕망의 탈코드화된 흐름들로서 절대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을 왜곡하는 이전된 재현내용이기 때문이다.
―p. 307
……제국의 야만적 법은 오히려 이런 법에 반대되는 두 성격을 띠는데, 카프카는 이 두 성격을 아주 힘차게 펼쳐 냈다. 그 하나는 이 법의 편집증적-분열증적 특징인데(환유) 그에 따르면 법은 전체화할 수도 없고 전체화되지도 않은 부분들을 지배하며, 이 부분들을 세분하고, 이 부분들을 벽돌들로 조직하며, 이 부분들의 거리를 재고, 이 부분들의 소통을 금하며, 이런 연후부터는 무섭지만 형식적이며 텅 빈, 탁월하며 분배적이고, 비(非)집단적인 하나의 통일체의 자격으로 작용한다. 다른 하나는 조울증적 특징인데(은유) 그에 따르면 법은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알 수 있는 대상도 갖지 않으며, 처벌에 앞서 실존하지 않으며, 법의 언표가 판결에 앞서 실존하지 않는다. 신명 재판(神明裁判)은 이 두 특징을 생생한 상태로 보여준다. 「유형지에서」의 기계처럼, 판결과 규칙 모두를 기록하는 것은 바로 처벌이다. 함의 체계에서 자기에게 고유한 것이던 표기행위로부터 몸은 해방되었지만 이는 아무 소용없다. 몸은 이제 새로운 글이 자기 형상들, 자기 음성조직, 자기 알파벳을 표시할 수 있는 돌과 종이, 판과 화폐가 된다. 초코드화하기, 이것이 법의 본질이며, 몸의 새로운 고통들의 기원이다. 벌은 결연과 혈연들의 마술 삼각형에서 눈이 잉여가치를 뽑아내는 축제이길 그쳤다. 벌은 복수가 된다.
―p. 362~363
복수, 미리 행사되는 하나의 복수로서, 제국의 야만적 법은 작용(action) 작용받음(l’agi), 반응(réaction)으로서의 원시적 놀이 전체를 분쇄한다.
―p. 363
……기계적 잉여가치를 통한 비용 절감과 이윤율 제고를 규정하는 것은 혁신 자체가 아니다. 혁신 자체의 가치는 인간적 잉여가치 못지않게 측정 불가능하다. 그것은 심지어 따로 떼어 가시화된 신기술의 수익성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장과의 관계, 또 상업자본 및 금융자본과의 관계 속에서 기업의 전반적 수익성에 끼치는 효과이다. 이것이, 과연 19세기부터 볼 수 있듯이, 증기기계와 직물 기계들 또는 제철 생산기술들의 통시적 만남들과 재절단들이 함축하는 바이다. 일반적으로 혁신의 도입은 언제나, 시장 전망치가 대규모 개발을 정당화하는 순간에 이를 때까지, 과학적으로 필요한 시간을 넘겨 지연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도, 결연 자본은 산업자본 내에서 기계적 혁신들에 강한 선별 압력을 행사한다. 요컨대 흐름들이 탈코드화된 곳에서는, 기술적·과학적 형식을 띠는 코드의 특수한 흐름들은 모든 과학적 공리계보다도, 사라진 모든 옛 코드 내지 초코드화보다도 훨씬 더 냉혹한 고유의 사회 공리계에 종속되는데, 이는 바로 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공리계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해방>된 코드의 흐름들은 기계적 잉여가치를 낳는데, 이 잉여가치는 과학과 기술 자체에 직접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존하며, 또 인간적 잉여가치에 덧붙여져, 이 잉여가치의 상대적 저하를 교정한다. 그리하여 이 기계적 잉여가치와 인간적 잉여가치 양자가 이 체계의 특징을 이루는 흐름의 잉여가치의 집합을 구성한다. 지식, 정보, 전문교육은 노동자의 가장 기초적인 노동 못지않은 자본의 일부이다(<지식 자본>). 그리고 탈코드화된 흐름들에서 결과하는 한의 인간적 잉여가치 면에서, 우리는 육체노동과 자본 간에, 또는 돈의 두 형식 간에, 통약(通約) 불가능성 내지 근본적 비대칭을 발견한 바 있는데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과학과 기술 코드의 흐름들에서 결과하는 기계적 잉여가치 면에서, 우리는 과학 노동 내지 기술 노동과 다른 기록 속에서 기입되는 자본의 이윤 간에 그 어떤 통약 가능성도 그 어떤 외부 극한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지식이 흐름과 노동이 흐름은 자본주의적 탈코드화 내지 탈영토화에 의해 규정된 동일한 상황 속에 있다.
―p. 397~398
……늘 확대되는 자본주의의 원(圓)은, 언제나 더 큰 규모로 그 내재적 극한들을 재생산하기에, 잉여가치나 생산되거나 수탈될 뿐 아니라 또한 흡수되고 실현되어야만 완결된다. 자본가가 향유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면, 그 까닭은 자본가의 목표가 잉여가치를 낳는 <생산을 위한 생산>일 뿐 아니라 이 잉여가치의 실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현되지 않은 흐름의 이 잉여가치의 실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현되지 않은 흐름의 잉여가치는 생산되지 않은 것과 다름없으며, 실업과 침체 속에 구현된다. 소비와 투자 바깥에서 흡수하는 주요 방식들을 나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광고, 문민정부, 군국주의, 제국주의가 그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 공리계에서 국가의 역할은, 국가가 흡수하는 것은 기업들의 잉여가치에서 떼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 잉여가치에 덧붙이는 것이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 일은 자본주의경제를 주어진 극한들 내에서 최대 생산량에 접근시키고, 또 그 나름대로 특히 사기업과 전혀 경쟁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인 군비(軍費)의 차원에서 이 극한들을 확대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정치-군사-경제 복합체의 역할은, 주변부에서, 또 중심부의 전유된 지대들에서, 인간적 잉여가치의 추출을 보증한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또한 그 자신이 지식 정보 자본의 자원을 동원하여 막대한 기계적 잉여가치를 낳고, 결국은 생산된 잉여가치의 가장 큰 부분을 흡수한다는 점에서도 더욱 중요하다.
―p. 399
<반인간적 기업에 관여하고 있는 것은 군사 기계를 부리고 공급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이것들에 대한 수요를 창조하는 다른 수백만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정도는 다르지만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경제의 다양한 부문들과 분야들은 서로 너무도 의존하고 있어서, 거의 누구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반인간적 활동에 연루되어 있다……> 1. 노동과 생산 각각의 탈코드화된 흐름들 사이의 미분 비에서 출발해 인간적 잉여가치를 추출하고,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이전하면서도 중심부에 방대한 잔여 지대들을 간직해 두는 양상. 2. 과학·기술 코드의 흐름들의 공리계에서 출발해, 중심부의 <최첨단> 영역들에서 기계적 잉여가치를 추출해 내는 양상. 3. 흐름의 잉여가치의 이 두 형식의 방출을 보증하고, 생산 장치 속에 계속해서 반생산을 주입함으로써, 이 두 형식을 흡수하거나 실현하는 양상. 사람들은 주변부에서 분열증화하거니와, 이에 못지않게 중심부 및 중간에서도 분열증화한다.
―p. 401~402
“누가 도둑맞을까?”라는 생략된 진지한 물음이며, 클라벨의 <누가 소외되었나?>라는 아이러니한 물음을 반향(反響)한다. 그런데 아무도 도둑맞지 않았고 또 도둑맞을 수도 없다. 누가 소외되었는지 또 누가 소외하는지 이제는 전혀 알 수 없다고 클라벨이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누가 도둑질하나? 순식간의 창조적 거대 흐름의 대표인 금융 자본가는 확실히 아닌데, 그 까닭은 이 거대 흐름은 소유도 아니고 구매력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도둑맞았나? 구매된 것도 아닌 노동자는 확실히 아닌데, 왜냐하면 구매력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구매력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환류 또는 임금의 분배이기 때문이다. 누가 도둑질할 수 있을까? 이윤의 유입의 대표인 산업자본가는 확실히 아닌데, 왜냐하면 <이윤들은 환류 속을 흐르지 않고, 수입을 창조하는 흐름과 나란히, 이 흐름에서 벗어나고 이 흐름을 승인하지 않으면서 흐르기> 때문이다. 예전에 스며든 체계에 새로운 공리를 덧붙이기 위해 늘 자신의 고유한 극한들을 확대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자본주의 공리계는 이 얼마나 유연한가.
―p. 404
……임금노동자의 욕망, 자본가의 욕망, 이 모두가 하나의 똑같은 욕망으로 고동치는데, 이 욕망이 기초하는 곳은 할당할 수 있는 외부 극한이 없는 흐름들의 미분 비이며, 자본주의가 언제나 확대되고 언제나 더 포괄적인 규모로 자신의 내재적 그간들을 재생산하는 곳이다. 따라서 바로 흐름들에 대한 일반화된 이론의 층위에서 다음 물음에 답할 수 있다. 어떻게 사람들은 권력을 욕망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의 무력함을 욕망하기에 이를까? 어떻게 그런 사회장이 욕망을 통해 투자될 수 있었을까? 흐름을 흐르게 하고 절단하는 것이 문제될 때, 욕망은 이른바 객관적 이해관계를 얼마나 넘어갈까? 아마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속 특유한 관계로서의 화폐의 형성이 경제를 화폐경제로 만드는 생산양식에 의존한다는 점을 떠올릴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점이 남는다. 즉 자본의 외견상 객관적 운동은 결코 의식의 오인도 가상도 아니며, 자본주의의 생산적 본질이 그 자체 필연적으로 그것을 지배하는 상품 내지 화폐의 형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 형식의 흐름들 및 이 흐름들 간의 관계들은 욕망의 투자의 비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욕망의 통합[積分]이 일어나는 것은 흐름들의 차원, 화폐 흐름들의 층위에서이지, 이데올로기 층위에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해법, 그 어떤 혁명의 길이 있을까? 정신분석은 돈과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정신분석은 스스로는 인정하기를 경계하면서 실은 경제적-화폐적 의존 체계 전체를 자신이 다루는 각 환자의 욕망의 핵심에 등록하고,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매머드급 기업을 제 나름으로 구성한다. 하지만 어떤 혁명적 길이 있을까? 하나라도 있을까? …… 경과에서 퇴각하지 않고, 더 멀리 가야 한다. 니체가 말했듯, <경과(Prozeß)를 가속하라.> 사실 이 문제에 관해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p. 405~406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것은 자본주의가 다른 사회구성체들이 코드화하고 초코드화했던 흐름들의 탈코드화를 시행하는 한에서, 그야말로 모든 사회의 극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자본주의는 모든 사회의 상대적 극한들 내지 결단들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극단적으로 엄격한 공리계로 코드들을 대체하기 때문인데, 이 공리계는 탈영토화된 사회체이기는 하지만 또한 다른 모든 사회체만큼이나 또는 심지어 그 이상으로 무자비한 사회체이기도 한 자본의 몸에 묶인 상태 속에 흐름들의 에너지를 유지한다. 반대로 분열증은 그야말로 절대적 극한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흐름들을 탈영토화된 기관 없는 몸 위로 지나가게 한다. 따라서 분열증은 자본주의 자신의 외부 극한 또는 자본주의의 가장 깊은 경향성의 종결점이지만, 자본주의는 이 경향성을 억제하거나 이 극한을 밀어내고 이전한다는 조건 아래서만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는 자신이 확장된 규모로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고유의 내재적인 상대적 극한들로 분열증의 절대적 극한을 대체한다. 자본주의는 자기가 한 손으로 탈코드화하는 것을 다른 손으로 공리화한다. ……이런 체제에서는, 설사 두 개의 시간으로 나누는 것일지라도, 탈코드화와 사라진 코드들을 대신하는 공리계를 구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흐름들이 자본주의에 의해 탈코드화되는 일과 공리화되는 일은 동시에 일어난다.
―p. 416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결합, 모든 초월성 내지 외부 극한의 부정, 생산 자체 속으로의 반생산의 유출 등으로 정의되는 그러한 부르주아 내재장은 비길 데 없는 노예 상태, 전례 없는 종속을 설립한다. 더 이상 주인조차 없으며, 지금은 다만 다른 노예들에게 명령하는 노예들만 있을 뿐이다. 더 이상 밖에서 동물에게 짐을 지울 필요가 없으며, 동물 스스로 짐을 진다. 인간은 결코 기술 기계의 노예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 기계의 노예이다. 부르주아가 그 사례이다. 부르주아 전체를 놓고 보면, 부르주아는 자기의 향유와 아무 관련도 없는 목적들을 위해 잉여가치를 흡수한다. 부르주아는 가장 천한 노예보다 더 천한 노예요, 굶주린 기계의 우두머리 종이요, 자본을 재생산하는 짐승이요, 무한 부채의 내면화이다. <나도 종이다>라는 것이 주인의 새로운 말이다. <자본의 인물(人物化)로서만 자본가는 존중할 만하다. 인물화된 자본으로서만, 자본가는 절대적 치부(致富)의 충동을 축재가(蓄財家)와 공유한다. 하지만 축재가에게서 개인적 광증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본가에게는 사회적 매커니즘의 효과이며, 그 속에서 자본가는 단지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p. 428~429
이로부터 중요한 귀결이 도출된다. 그것은 현대사회들의 사회 공리계가 두 극 사이에 붙잡혀 있고, 끊임없이 한 극과 다른 극 사이를 왕복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들은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에서, 전제군주 기계의 폐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현대사회들이 초코드화하고 재영토화하는 통일체로서 부활시키고자 하는 원국가와 현대사회들을 하나의 절대적 문턱으로 끌고 가는 풀려난 흐름들 사이에 붙잡혀 있다. 현대사회들은 자기의 자본들과 인구들의 유동량을 탈코드화하거나 탈코드화하게 하는 한편, 세계적 규모의 독재, 지방의 독재자들, 전능한 경찰을 동원하여 온 힘을 다해 재코드화한다. 현대사회들은 두 방향 사이에 붙잡혀 있다. 의고주의와 미래주의, 신-의고주의와 탈-미래주의, 편집증과 분열증 사이에, 현대사회들은 두 극 사이에서 흔들거린다. 한 극은 편집증적 전제군주 기호, 즉 현대사회들이 코드의 통일체로서 다시 활성화하려 시도하는 전제군주의 기표-기호이고, 다른 극은 탈코드화된 흐름의 통일체로서 분열자의 형상-기호, 즉 분열, 기호-점 또는 흐름-절단이다. 현대사회들은 한 극에 울타리를 치지만, 다른 극을 통해서는 흐르거나 흘러나온다. 현대사회들은 끊임없이 자기보다 지체되는 동시에 자기보다 앞선다. 원국가의 향수(鄕愁) 및 필연성과 흐름들의 유동의 요구 및 불가피성을 어떻게 화해시킬까? 체계를 구성하는 탈코드화와 탈영토화가 공리계에서 빠져나가 기계를 공전시키는 한쪽 끝 내지 다른 쪽 끝으로 도주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은 반동적이고 편집증적인 과잉 충전들과 혁명적이고 분열증적인 지하의 충전들 사이를 오간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것이 어떻게 이쪽이나 저쪽으로 향하는지 너무 모른다. 망상의 두 극(極)은 애매하고 변형되기도 하며, 의고주의나 민속의 방식은 이런저런 상황에서 갑자기 위험한 진보적 가치를 짊어질 수도 있다.
―p. 437~438
단순하게 말해, 어떤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과 처음에 일어났던 것은 같은 절차를 통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미개, 야만, 문명에 대응하는 세 개의 거대 사회 기계를 구별했다. 첫째 기계는 하층에 있는 영토 기계인데, 이것은 토지의 충만한 몸 위에서 흐름들을 초코드화하는 데서 성립한다. 둘째 기계는 초월적 제국 기계인데, 이것은 전제군주와 그 장치인 원국가의 충만한 몸 위에서 흐름들을 초코드화하는 데서 성립한다. 이것은 탈영토화의 최초의 거대 운동을 조작하지만, 이렇게 하는 까닭은 이것이 영토 공동체들을 수집하고 초코드화하고 초과노동을 전유함으로써 보존하는 영토 공동체들에 탁월한 통일을 덧붙이기 위해서이다. 셋째 기계는 내재적 현대 기계인데, 이것은 돈-자본의 충만한 몸 위에서 흐름들을 탈코드화하는 데서 성립한다. 이것은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공리계 및 이 흐름들의 조절로 영토의 코드들과 전제군주의 초코드화를 대체함으로써, 내재성을 실현했고, 추상적인 그런 것을 구체적이 되게 했고, 인공적인 것을 자연적이 되게 했다. ……이 본성의 동일성은 내재성 속에서, 또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유동 속에서 <보편적으로> 실현되어 있으니까, 그것은 현대자본주의 재현의 체제에서 최고점에 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또 반생산이 욕망에 침투하여 이제는 욕망을 짓부수는 환상적인 죽음 본능을 풀어놓으면서, 그 내재성과 탈코드화 덕분에 체계 속에 국지화된 채 머물러 있지 않고 생산 전체를 가로질러 퍼져 있으니까, 체제의 차이는 현대자본주의 재현의 체제에서 가장 큰 것이고, 또 이 재현은 욕망에 대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더 강한 억압-탄압의 조작을 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언제나 안에서 생기지만 밖에서 도래해야만 하는 이 죽음은―그리고 자본주의의 경우에는 죽음을 도래하게 하는 이 바깥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를 만큼 강한 권력을 지니고 생겨나는 이 죽음은―무엇일까?
―p. 439~441
만일 가족적 투자가 사회장의 무의식적 투자들의 의존물 내지 적용일 따름이라면―그리고 이것이 어른 못지않게 아이에대해서도 참이라면, 또한 아이가, 엄마-영토성과 아빠-법을 가로질러 이미 사회장의 코드화 내지 공리화된 분열들 및 흐름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참이라면―우리는 이 영역의 한복판에서 본질적 차이가 지나가게 해야 한다. 망상은 모든 무의식적·사회적 투자의 모태 일반이다. 모든 무의식적 투자는 투자 철회, 대체-투자, 덧투자의 망상적 놀이를 동원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투자의 두 가지 큰 유형, 즉 망상의 두 극인 분리차별 유형과 유목 유형이 있음을 보았다. 전자는 파시즘화하는 편집증 유형 내지 극이다. 이것은 중앙 통치 구성체를 투자하고, 이 구성체를 역사상 다른 모든 사회형태의 영원한 궁극적 원인으로 만들면서 이 구성체를 덧투자하며, 욕망의 모든 자유로운 형상을 투자 철회한다.
―p. 464~465
프로이트가 무의식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개체군의 문제라고 말했을 때, 그는 다윈주의자요 신-다윈주의자였다. 따라서 차라리 두 종류의 집단 또는 개체군, 즉 거대 집합들과 미시-다양체들의 차이가 문제가 된다. 이 두 경우에, 투자는 집단적이요 집단적 장의 투자이다. 단 하나의 입자에도 그것의 현전들이 공존하는 공간을 정의하는 흐름인 연합된 파동이 있다. 모든 투자는 집단적이며, 모든 환상은 집단을 이루고 이런 의미에서 현실의 정립이다. 하지만 투자의 두 유형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이 구별에 따르면 한 유형은 분자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그램분자적 구조들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 다른 유형은 군집의 구조화된 현상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분자적 다양체들과 관련되어 있다. 한 유형은 주권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때나 군집의 집합식으로 식민지적 형성체들을 하고 있을 때나, 인물들을 욕망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예속 집단의 투자요, 다른 유형은 분자적 현상으로서 욕망을 품고 있는 횡단적 다양체들 속에 있는, 말하자면 집합들과 인물들에 대립하는 부분대상들과 흐름들 속에 있는 주체 집단의 투자이다.
―p. 469~470
하지만 이 미시 물리학 내지 미시 심리학 영역은, 바로 욕망이 있는 곳이요, 말하자면 기능들뿐 아니라 형성들과 자기생산도 있는 곳인데, 거기에서 어떻게 기계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기계는 그 구조의 사전(事前) 연결들과 그 부품들의 위치하는 질서에 따라 기능하지만, 스스로 정돈하지도 않고 자기를 형성하거나 생산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생명론[生命論]과 기계론 간의 흔한 논쟁을 부추기기도 한다. 기계는 유기체의 기능들을 설명하는 데는 소질이 있지만, 유기체의 형성을 설명하는 데는 천부적으로 소질이 없다는 것. 기계론은 기계들에서 하나의 구조적 통일성을 추상하여, 이 통일성에 따라 유기체의 기능을 설명한다. 생명론은 생물의 개체적이고 특유한 통일성을 내세워, 기계는 유기적 집요함에 종속되며 이 집요함을 자율적 구성체 외부로 연장하는 한에서 모든 기계가 이 통일성을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식으로건 저런 식으로건, 기계와 욕망이 이처럼 외래적 관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욕망이 기계론적 원인들의 체계에 의해 규정되는 결과로 나타나건, 기계 자체가 욕망의 목적들과 관련한 수단의 체계이건 간에 말이다.
―p. 475
……본질적인 것은 무한 자체로의 이행 속에, 기계 부품들로 합성된 무한성 또는 극미동물들의 시간적 무한성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이 이행 덕에 생겨난 것 속에 있다. 일단 기계의 구조적 통일성이 해체되면, 일단 생물의 인물적이고 특유한 통일성에서 탈각하면, 기계와 욕망 사이에 직접적 연줄이 나타나고, 기계는 욕망의 심장부로 이행하며, 기계는 욕망적이 되고, 욕망은 기계화된다. 욕망은 주체 안에 있지 않고, 욕망 안에 기계가 있다―잔여 주체는 다른 쪽에, 기계 쪽에, 온 둘레에, 기계들의 기생물, 기계화된 척추동물의 욕망의 장식품으로 있다. 요컨대 참된 차이는 기계와 생물, 생명론과 기계론 사이에 있지 않고, 생물의 두 상태이기도 한 기계의 두 상태 사이에 있다. 구조적 통일성 속에 사로잡힌 생물은, 군중 현상들 또는 그램분자 집합들의 현상들이다. 바로 이런 자격으로 기계와 생물이 바깥에서 서로 관계한다. 설사 이 양자가 서로 구별되고 서로 대립한다 해도, 이는 단지 동일한 통계적인 방향에서 두 의미로서 그럴 뿐이다. 하지만 다양체들의 더 깊은 또는 생래적인 다른 방향에서는, 분자적 현상들과 생물의 독자성들 간에는, 말하자면 기계 전체 속에 이산되어 있는 작은 기계들과 유기체 전체 속에 분산되어 있는 작은 구성체들 간에는 상호 침투, 직접 소통이 있다.
―p. 478
우리는 욕망 기계들에 고유한 에너지를 리비도라 부른다. 이 에너지의 변형들(누멘과 볼룹타스)은 결코 탈성욕화도 아니요 승화도 아니다. 하지만 바로 이 용어법은 극히 자의적인 것 같다. 욕망 기계들을 고찰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욕망 기계들을 이것들 자신의 질서인 분자적 질서에 관련시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욕망 기계들을 이것들이 그 속에서 유기체 기계들 또는 사회 기계들을 형성하고 유기체 환경들 또는 사회 환경들을 투자하는 그램분자적 질서에 관련시키는 것인데, 어떻게 고찰하더라도 욕망 기계들이 고유하게 성적 에너지와 맺는 관계는 잘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성 에너지를 직접적으로 우주적이며 원자-내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또 직접적으로 사회적·역사적인 것으로 제시하기는 어렵다. 사랑은 단백질들 및 사회와 관계한다고 말해야 소용없는 일이리라……. 그것은 리비도를 온갖 변신을 할 수 있는 모호한 우주 에너지나 온갖 투자를 할 수 있는 일종의 사회화된 에너지로 대체함으로써 프로이트주의를 처분하는 낡은 시도를 다시 한 번 하는 것이 아닐까?
―p. 486
……자본주의는 욕망적 생산의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극한으로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코드들의 자리를 대신한 공리계 속에 묶음으로써 이것들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탈영토화 운동과 뗄 수 없지만, 자본주의는 인조적·인공적 재영토화들을 통해 이 운동들을 쫓아낸다. 자본주의는 영토적·전제군주적 재현들, 신화적·비극적 재현들의 폐허 위에서 건설되지만, 이 재현들을 자본의 이미지들이란 자격으로, 자신을 위해 또 다른 형식으로 재건한다. 맑스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요약한다. 주체적·추상적 본질이 자본주의에 의해 발견되는 것은 재차 사슬에 묶이고 소외되기 위해서요, 또 이 일은 객체성으로서의 외부적이고 독립된 요소 속에서가 아니라, 사유재산이라는 주체적 요소 그 자체 안에서라는 점이 진실이라고. <예전에 자기 외부 존재였던 것, 즉 인간의 현실적 소외는 지금은 소외 행위, 즉 양도가 되어 버렸다.>
—p. 504~505
……즉 욕망 기계들의 부품들 내지 요소들은 그것들의 상호 독립성을, 다시 말해 한쪽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다른 쪽에 있는 어떤 것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의존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것들은, 인간의 성에서 남성과 여성처럼, 동일한 존재물의 반대 규정들이어서도 단일한 존재의 분별들이어서도 안 되며, 비-인간적 성의 분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것 또는 현실적으로-구별되는 것, 상이한 <존재들>이어야 한다. 분열-분석이 이 이격(dispars)에 도달하지 않는 한, 그것은 무의식의 궁극적 요소들로서의 부분대상들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기관들 내지 기관들의 단편들의 분산은 결핍과 아무 상관없으며, 그 분산은 그것들의 통일이나 전체화 없이 형성하는 다양체 속에서의 현전 양태를 구성한다. 철거된 구조 전체, 지워진 기억 전체, 소멸된 유기체 전체, 해체된 연줄 전체, 이것들은 날것인 부분대상들, 분산된 기계 자체의 분산된 채 일하는 부품들로서 가치가 있다. 요컨대 부분대상들은 무의식의 분자적 기능들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우리가 방금 전에 욕망 기계들과 그램분자적 기계들의 모든 형상 간의 차이를 주장했을 때, 우리는 그 한쪽이 다른 한쪽 안에 있고 다른 한쪽 없이 실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이 두 종류 기계 사이의 체제 및 규모의 차이를 표시해야 했던 것이다.
—p. 537~539
이 종합들은 필연적으로 기관 없는 몸의 정립을 내포한다. 이는 기관 없는 몸이 부분대상들-기관들의 반대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기관 없는 몸 그 자체는 욕망의 두 활동, 욕망의 두 머리를 중화하거나 작동시키는 것으로서, 연결의 최초의 수동적 종합에서 생산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기관 없는 몸은 반생산의 무형의 유체로서만이 아니라 흐름의 생산을 전유하는 받침대로서도 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관 없는 몸은 대상들-기관들을 밀쳐 낼 수도 있고, 이것들을 끌어당기고 전유할 수도 있다. 하지만 끌어당김 못지않게 밀쳐 냄에서도, 기관 없는 몸은 대상들-기관들에 대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유기체와 자신의 대립 및 유기체와 대상들-기관들의 대립을 확실히 할 뿐이다. ……부분대상-기관들은 기관 없는 몸 위에 매달리며, 그 위에서 포괄적 분리와 유목적 결합, 즉 유기체와 유기체의 조직화에 끊임없이 반발하는 겹침과 교체라는 새로운 종합들 속에 들어간다. 욕망은 바로 몸을 지나가고, 기관들을 지니가지, 결코 유기체를 지나가지 않는다. 바로 이런 까닭에 부분대상들을 조각나고 파열된 유기체의 표현이 아닌데, 이 유기체는 하나의 해체된 전체성 내지 하나의 전체에서 해방된 부분들을 전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분대상들은 기관 없는 몸의 직접적 권력들이며, 기관 없는 몸은 부분대상들의 원료이다.
—p. 541~542
……이 외견상 주체는 욕망 기계의 마지막 부품, 인접 부품이다. 망상들과 환각들을 부양하는 것은 바로 이 강렬한 생성들과 느낌들, 이 내공 감정들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 이것들은 물질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물질의 0도를 자기 안에 투자한다. 이것들의 죽음의 무의식적 경험을 이끌어 가는 것은, 죽음이 모든 느낌 속에 다시 느껴지는(ressenti) 것인 한에서, 즉 다른 성-생성, 신-생성, 인종-생성 등 모든 생성 속에서, 기관 없는 몸 위에서 내공의 지대들을 형성하면서, 도래하기를 그치지 않고 도래하기를 끝내지 않는 것인 한에서이다. 모든 내공은 자기 고유의 삶 속에 죽음의 경험을 데리고 다니며 감싸고 있다. 그리고 필경 모든 내공은 결국 종식되며, 모든 생성 자체는 죽음-생성이다! ……외견상 주체는 누군가(On)로서 살고 여행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누군가 죽기를 그치지도 않고 끝내지도 않는다.> 다른 양상 아래서 나(Je)로서 고정된 이 동일한 주체는 실제로 죽으며, 말하자면 결국 죽기를 끝내는데, 왜냐하면 그 주체는 그를 이렇게 나로서 고정하는 마지막 순간의 현실 속에서 온통 내공을 해체하고 그 내공이 감싸는 0으로 데려감으로써 죽는 것을 통해 끝나기 때문이다. ……즉 욕망 기계들의 순환에서, 죽음의 경험이 죽음의 모델로 되돌아가는 일이 있다. 이 순환은 닫혀 있다. 이는 하나의 새 출발을 위한 것일까? 나는 타자(Je est un autre)이니까. 죽음의 경험은 그야말로 확장된 경험을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 욕망 기계들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고 알게 해 주어야 한다. 또 인접 부품으로서의 주체는 언제나, 죽음의 경험을 해 가는 어떤 <누군가>이지 모델을 받아들이는 어떤 나(un Je)가 아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델 자체는 나 자체(le Je)가 아니라 기관 없는 몸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죽음을 분열증화하는 것이며, 욕망 기계들이 수행하는 일이다.
―p. 548~549
전의식 수준에서의 혁명적 집단은, 설사 권능(pouvoir)을 장악한다 해도, 이 권능 자체가 자신을 예속시키고 욕망적 생산을 으깨기를 계속하는 권력 형식과 관련되는 한, 예속 집단인 채로 머문다. 전의식적인 혁명적 순간에, 그런 집단은 예속 집단의 모든 무의식적 성격을 이미 나타낸다. ……이와 반대로 주체 집단은 그 리비도 투자들 자체가 혁명적인 집단이다. 이 집단은 욕망을 사회장 속에 침투시키며, 사회체 내지 권력 형식을 욕망적 생산에 종속시킨다. 욕망의 생산자이자 생산하는 욕망이기에, 이 집단은 이 집단에 죽음 본능이 전파되는 것을 몰아내는 죽음 구성체들을 늘 발견했다. ……사실이지, 모든 것을 복잡하게 하는 것은, 동일한 사람들이 잡다한 관계들 아래서 두 종류 집단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니면 잡다하지만 공존하는 상황들 속에서 동일한 한 집단이 구 가지 성격을 동시에 보여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한 유형의 집단에서 다른 유형의 집단으로 끊임없이 이행한다. 주체 집단들은 단절을 통해 예속 집단들에서 끊임없이 파생된다. 주체 집단들은 경계를 넘어가고, 사회 기계들과 이것들을 형성하는 욕망의 요소적인 힘들을 관계시키면서, 욕망을 지나가게 하고, 욕망을 항상 더 멀리에서 다시 절단한다. 하지만 역으로 주체 집단들은 끊임 없이 자신을 폐쇄하고, 예속 집단들의 이미지에 맞게 재편하기도 한다. 내부 극한을 다시 설립하고, 흐름들이 통과하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할 큰 절단을 다시 형성하고, 욕망 기계들이 큰 규모로 구성하는 탄압 집합에 욕망 기계들을 종속시키면서 말이다.
―p. 577~578
……분열-분석은, 집단들 내지 개인들의 수준에서 사회장의 리비도 투자들을 해명하기 위해 오직 지표들만을, 기계적 지표들만을 이용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점에서, 지표들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성욕이다. 혁명의 능력은 개인이나 집단을 부추기는 성적 충동들의 대상들, 목표들, 원천들에 비춰 판단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확실히, 성욕이 <더러운 작은 비밀>의 틀에 갇힌 채로 머무는 한, 변태들 그리고 성 해방마저도 아무런 특권을 주지 않는다. 비밀을 공개하고, 비밀을 공개할 권리를 요구해도 소용없다. 비밀을 소독할 수도 있고, 과학적·정신분석적 방식으로 비밀을 다룰 수도 있다. 하지만 성욕을 비밀의 범주에서, 말하자면 냉소적이거나 부끄럽거나 굴욕적인 것으로 만들어지는 거짓말로서 비밀에 강요되는 나르키소스적-오이디푸스적 기원에서 비밀이 분리되지 않는 한, 오히려 욕망을 죽이거나, 가장 탄압적인 감옥보다 더 음울한 해방의 형식을 욕망을 위한답시고 발명할 위험이 있다.
―p. 579~580
성적·욕망적 관계들은 인간들 간 사회관계들의 지표이다. 사랑들과 성욕은 사회장의 리비도 투자들의, 이번엔 무의식적인, 지수(指數)들 내지 등급 측정기들이다. 사랑받거나 욕망되는 모든 존재는 집단 언표행위의 담당자와 등가물이다. 프로이트가 믿었던 것처럼 사회와 그 흐름들을 투자하기 위해서는 리비도가 탈성욕화되고 승화되어야만 한다는 건 분명 옳지 않으며, 이와 반대로 사랑, 욕망 및 이것들의 흐름이야말로 승화되지 않은 리비도와 그 성적 투자들의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성격을 표명해 준다.
―p. 583~584
……두 극은 이렇게 정의된다. 하나는 욕망적 생산과 욕망 기계들이 어떤 권력 형식 내지 선별적 통치 형식 아래서 큰 규모로 구성하는 군집적 집합들로, 욕망적 생산과 욕망 기계들을 예속함으로써 정의되며, 다른 하나는 종속이 역전되고 권력이 전복됨으로써 정의된다. 하나는 독자성들을 부수고 선별하며 코드들 내지 공리계들 속에 간직되는 독자성들만을 조절하는, 그램분자적이며 구조화된 집합들을 통해 정의되며, 다른 하나는 이와 반대로 큰 집합들을 가공하기에 알맞은 그만큼의 재료들을 다루는, 독자성들의 분자적 다양체들을 통해 정의된다. 하나는 이 체계 내지 이 집합에 고유한 내재성의 장을 채우는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 체계의 내부 극한들에 따라 흐름들을 정지하고 옥죄며 흐름들을 되돌리거나 다시 절단하는 통합선과 영토화선을 통해 정의되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흐름들을 생산하는 비-구상적인 자기 고유의 절단들 내지 분열들을 발명하며, 그것들을 욕망적 생산과 떼어 놓는 코드화된 벽 내지 영토적 극한을 항상 뛰어넘는,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들이 따라가는 도주선들에 의해 정의된다. 이상의 모든 규정을 요약하자면, 하나는 예속 집단들에 의해 정의되며, 다른 하나는 주체 집단들에 의해 정의된다. 사실 우리는 이 구별들에 관한 온갖 종류의 문제에 여전히 부딪히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분열증적 투자는, 다른 투자 못지않게, 단순한 유토피아가 아닌 역사·사회장의 현실적 투자일까? 어떤 의미에서 도주선들을 집단적이고 정립적이고 창조적일까? 무의식의 두 극은 서로 어떤 관계이며, 또 이해관계의 전의식적 투자들과는 어떤 관계일까?
―p. 605
자본주의적 통치 구성체(사회체로서의 돈-자본의 충만한 몸)에서는, 큰 사회적 공리계가 예전 구성체들의 특성을 이루던 영토적 코드들과 전제군주적 초코드화를 대신했다. 또한 그램분자적 군집 집합도 형성되었는데, 이 집합의 예속은 유례가 없다. 우리는 이 집합이 어떤 기초들 위에서 기능하는지 본 바 있다. 1. 언제나 더 큰 규모로 재생산되며, 필요한 만큼 자신의 공리들을 끊임없이 배가하며, 욕망이 자기 자신의 탄압을 욕망하도록 규정되는 수단인 이미지들 및 이미지들의 이미지들로 자신을 채우는 내재성의 장 전체(제국주의) 2. 전에 없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이는 사회적 기입과 탄압이 더 이상 몸들과 인물들에 직접 관여할 필요조차 없고 역으로 몸들과 인물들에 선행하는 그런 방식으로,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들 사이에 미분 비들의 체계로서 하나의 결합을 설립한다(공리계, 조정과 적용) 3. 흐름의 잉여가치로 규정된 잉여가치. 이 잉여가치의 착취는 같은 코드 속한 동종적인 두 양 사이의 단순한 산술적 차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같은 차수(次數)에 속하지 않는 이종적 크기들 간의 미분 비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내재성의 첫째 양상으로서의 잉여가치) 4. 기계를 자기에게 봉사하게 하지 않고 자본주의 기계의 머슴이 되는 만큼 더 비정해지는 지배계급. ……5. 군사 기구, 관료 기구, 경찰 기구가 경제 자체에 기초를 두게 되고, 경제 자체는 욕망의 탄압의 리비도 투자들을 직접 생산하는 그런 방식으로, 잉여가치의 실현 내지 흡수로, 생산 속에 반생산의 전파(내재성의 셋째 양상으로서의 반생산)……
―p. 613~614
……혁명적 잠재력의 현행화는 이 잠재력이 물론 포함되어 있는 전의식적 인과성 상태보다는 어떤 정확한 순간에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에 의해, 즉 욕망을 그 유일한 원인으로 지니고 있는 분열의 실효성에 의해, 말하자면 심지어 현실계에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한, 이상하게 다의적인 이 순간을 생산하는 인과성의 단절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 물론, 분열은 원인들, 목표들, 이해관계들의 땅 미 작업에 의해 준비되어 왔다. 물론, 원인들의 이 질서는 새로운 사회체와 그 이해관계들의 이름으로 다시 닫히고 틈바구니를 메워 버릴 위험이 있다. 물론, 역사는 집합 및 큰 수들이라는 동일한 법칙들에 의해 끊임없이 지배되어 왔다고 늘 나중에는 말할 수 있다. 남는 것은, 분열은 그것을 그려 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목표도 원인도 없는 욕망에 의해서만 실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분열은 원인들의 질서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다른 질서에 속하는 어떤 것에 의해서만 현실적이 된다. 즉 욕망, 사막-욕망, 혁명적 욕망의 투자에 의해서만. 자본주의를 침식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혁명은 어디에서 올까? 또한 착취당한 대중들 속에서 어떤 형식으로 올까? 그것은 죽음과도 같다. 어디에서? 언제? 탈코드화된, 탈영토화된 하나의 흐름, 아주 멀리 흐르고, 아주 섬세하게 절단하여,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빠져나가는.
―p. 621~622
……우리는 모든 합리성의 불합리함을 믿듯이 욕망을 믿는다. 왜냐하면 욕망이 결핍, 갈증 또는 열망이기 때문이 아니라, 욕망이 욕망의 생산이자 생산하는 욕망이며, 욕망-현실계 또는 그 자체로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혁명가가 분열자라거나 또는 그 역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끊임없이 임상 존재로서의 분열자와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을 구별했다. 그런데 전자는 탄압이 과정 자체에 강요하는 중단들 또는 공전의 연속들 또는 목적론적 가상들과 관련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분열증적 과정과 분열자의 생산의 혼동을 가능한 한 피하기 위해, 사회장의 리비도 투자에서 분열증적 극에 대해서만 말했다. 분열증적 과정은, 편집증적 절차가 반동적이고 파시즘적인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이다 그리고 모든 가족주의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이 정신의학적 범주들이 우리에게 경제-정치적 규정들을 이해시키는 것은 아니며, 사태는 정확히 그 반대이다.
다음으로 특히 우리는 분열-분석이 그 자체로는 엄밀하게 아무 정치적 프로그램도 제안할 것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일 분열-분석이 정치적 프로그램을 하나라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기괴한 동시에 염려스러운 일이리라. 분열-분석은 자신을 하나의 당으로도, 심지어 하나의 집단으로도 여기지 않으며, 대중들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어떤 정치적 프로그램이 분열-분석의 틀 안에서 가공된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저 유명한 게으름에 대한 권리, 또는 비생산성에 대한 또는 꿈과 환상의 생산에 대한 저 유명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고 누가 우리에게 응답한다면, 우리는 한 번 더 아주 놀라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반대되는 것을, 그리고 욕망적 생산은 현실적인 것을 생산한다는 것을……
―p. 624
끝으로 분열-분석의 부정적 및 정립적 임무들의 집합 속에서, 분열-분석과 정신분석의 대립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끊임없이 두 종류의 무의식 내지 무의식에 대한 두 해석을 대립시켰다. 하나는 분열-분석적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적이며, 하나는 분열증적이고 다른 하나는 오이디푸스적-신경증적이며, 하나는 추상적·비구상적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적이다. 하지만 또한, 하나는 현실적으로 구체적이고 다른 하나는 상징적이며, 하나는 기계적이고 다른 하나는 구조적이며, 하나는 분자적·미시-심리적·미시론적이고 다른 하나는 그램분자적 내지 통계적이며, 하나는 유물론적이고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적이며, 하나는 생산적이고 다른 하나는 표현적이다. 우리는 어떻게 분열-분석의 부정적 임무가 폭력적이고 거칠어야 하는지 보았다. 즉 탈가족화하고, 탈오이디푸스화하고, 탈거세하고, 탈남근화하고, 극장, 꿈, 환상을 해체하고,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해야 하는가를 ―이는 끔찍한 소파(搔爬)이며, 악의적 활동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동시에 행해진다. 왜냐하면, 과정은 동시에 해방되기 때문이다. 이미 분열-분석가의 기계공적 임무를 정의하는 자신의 분자적 도주선들에 따르는 욕망적 생산의 과정은. 그리고 도주선들은 여전히 그램분자적 내지 사회적 투자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 투자들은 사회장 전체에 걸쳐 있다. 그래서 분열-분석의 임무는 결국 각 경우에 사회장의 리비도 투자들의 본성, 이 투자들의 가능한 내부 갈등들, 이 투자들이 동일한 사회장의 전의식적 투자들과 맺는 관계들, 이 두 투자들 간에 가능한 갈등들, 요컨대 욕망 기계들과 욕망의 탄압의 놀이 전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과정을 완성할 것, 과정을 멈추지 말 것, 과정을 공전시키지 말 것, 과정에 목표를 주지 말 것.
―p. 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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