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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학파 3세대의 철학 한 스푼일상/book 2020. 3. 14. 21:31
푸코와 들뢰즈, 과타리의 글에서 한 번 데이고 프랑스 현대철학이 아닌 사상적 조류를 찾아보고 싶었다. 꼭 철학이 아니더라도 소설이든 사회과학책이든 중세,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보다는 시점상으로 가까운 근현대에 지어진 것에 좀 더 관심이 간다. 그래서 찾아본 것이 독일 현대철학이다.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비록 본인은 이런 표현을 고사하기는 하지만) 3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끌고 있는 좌장이고, 즉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로 대표되는 1세대와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2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읽기에 난해한 책일까봐 지레 겁을 먹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독자에게 친절한 책이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하다면 아주 잘 쓰인 논문 한편을 읽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용을 이해하기 쉬웠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말이다.) 책은 크게 세 가지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헤겔철학에서 발견되는 상호주관성이론, 미드의 사회심리학을 통한 이론적 보완, 끝으로 이론적 종합과 인륜성에 대한 부가적 논의까지.
1. 헤겔철학에서 발견되는 상호주관성 이론
악셀 호네트가 ‘인정(認定)’이라는 논의를 끌어올 수 있는 단초(端初)는 헤겔 철학에서 나온다. 헤겔 시대의 정치학 또는 사회학이 고대와 중세의 정치학과 결별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 존재를 정치 공동체(Polis) 안의 원자로 파악하지 않고(플라톤), 또는 권력을 관철시키는 기계적 존재로 이해하지 않고(마키아벨리), 구성원들의 관계 속에서 정치적 역학이 성립된다고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정치 공동체의 내부와 외부가 명확했던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여러 공동체―길드, 교회, 대학―가 중첩되고 사회적인 망(網)이 다채로워지면서 자타(自他)의 경계가 모호해짐에 따라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처럼 개인이 경험하는 사회적 접면(接面)이 넓어지고 다양해짐에 따라, 헤겔 철학에 이르러서는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라는 개념이 도출되는데, 감사하게도(?) 이 책에서는 굳이 이런 어려운 용어가 자주 활용되지는 않고, 다만 인간은 자신을 타자화하는 과정에서―타인의 관점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즉 자기 자신을 반성함으로써―‘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태동한다고 아주 명쾌하게 설명한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규범을 익히고,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 비로소 사회규범에 변화를 일으키고자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否定)하는 구성원의 능동성이다.
주관적 인정(부모-자식간의 원초적인 애정 형성)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해, 헤겔은 법적·제도적 관점에서 기존의 자연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종래의 자연법이 원자적 존재로서의 인간상에 천착한 나머지, [인정을 필요로 하는] 인격 대 인격 관계를 다룰 권리에 대한 논의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 여기서 마지막 세 번째 단계로 헤겔은 인륜적 수준(사회적 연대)으로 논의를 도약시키고자 하지만, 규범적인 논의에 갇혀 그의 인정투쟁(공동체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 논리는 추상적이고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만다.
2. 미드의 사회심리학
결과적으로 보면 미드(G.H.Mead)도 인정투쟁 논의를 사회적 연대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지는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헤겔 철학을 보다 체계적이고 관찰가능한 것으로 파악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사회심리학자로서 그가 헤겔 철학을 염두에 두고 연구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렇게 훌륭하게 헤겔 철학과 미드의 사회심리학을 엮어내 종합된 이론을 발달시킨 건 어디까지나 악셀 호네트다!
가령 인간은 음성 행위를 통해 발화의 표상을 자각(自覺)하는 동시에 발화의 대상에게 청각적인 자극을 전달함으로써 상호주관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여기서 미드는 헤겔에 비견될 만한 멋진 개념을 도입하는데, 무의식 속에 받아들이는 자기 자신, 즉 ‘주격 나(I; 헤겔식으로는 ‘즉자적 존재’)’와, 타인을 통해 외부에서 바라본 자기 자신, 즉 ‘목적격 나(Me; 헤겔식으로는 ‘대자적 존재’)’가 그것이다.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헤겔이 말했던 ‘부정적(否定的)’ 인지능력으로, 미드는 이를 “행위자의 행위 수행에 장애가 생기는 순간, 자아의 능동성이 아니라 ‘자극을 주는 객체에 대한 더욱 정확한 규정’을 찾는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상호주관적 관계 속에서 구성원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존중’으로, 미드는 사회적 수준에서는 ‘분업’이라는 개념적 틀을 활용한다. 분업적 생산구조 안에서 각 구성원은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직업적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공동체의 재생산에 기여할 수 있고 이로써 ‘자기존중’을 발견한다. 문제는 ‘자기존중’의 도구적 성격에 상호주관적 관계를 한정한 탓에, 인륜적 신념 또는 공동선(共同善)까지 논의를 확장하는 문제를 놓친다.
3. 이론적 종합!
헤겔의 ‘인정투쟁’이라는 구슬과 미드의 ‘상호주관적 관계’라는 구슬을 꿰어낸 것은 악셀 호네트의 뛰어난 통찰력 덕분이지만, 호네트는 이 둘의 한계를 딛고 ‘인정’ 논의를 어떻게 더 풍부하게 발전시킬 것인가. 호네트는 자기존중이 유보되거나 무시되거나 심지어 ‘심리적 죽음’에 이르는 ‘모욕’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먼저 짚은 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열어나가야 할 ‘사회적 존중’과 ‘개성화’에 대해 논의를 전개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악셀 호네트의 이야기 역시 막연한 느낌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명예’ 논의가 그러하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이기도 하다! “명예 개념이 사회의 공공 영역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이제 차츰 ‘신망’이나 ‘위신’ 범주들이 대신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각 개인이 향유하는 개인적 업적과 능력에 대한 사회적 가치부여의 척도가 규정된다.” 완전한 공감을 표하고 싶으면서도 여전히 의심을 거둘 수 없는 문장이다.
분명 우리 사회에 국한해서 본다면 ‘명예’가 가지는 의미는 무뎌졌다. 토마스 피케티의 말대로 자본소득의 증가를 근로(노동)소득이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 전통적인 명예 개념에 팽배하는 물신주의가 침투했고,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나 직업정 명예보다 ‘자신다움(個性)’에서 자존감을 구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알쏭달쏭하게 의심을 거두지 못했던 건 ‘계급’에 대한 생각을 뒤섞어서 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현대사회에서 '명예’가 ‘신망’이나 ‘위신’ 범주로 대체되어 간다고 하더라도, ‘계급’만큼은 공고하거나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개념인 ‘명예’와 경제적 개념인 ‘계급’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운 것은, 악셀 호네트가 규명하고자 했던 ‘인정투쟁’이 단지 탈전통화된 ‘명예’ 또는 ‘위신’ 측면에서만 설명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호주관적 관계 속에서 공동선(좋은 삶)을 구축하는 데는 인정투쟁만큼 계급투쟁에 대한 설명도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인데, 사실 계급에 대한 철학/사회학은 처음부터 악셀 호네트의 논점에서 벗어나 있다. 즉 애시당초 그의 관찰대상이 아닌 것이다. 결국 따지자면 내 생각이 비약(飛躍)해버린 셈..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내] 생각을 툭툭 건드려보며, 악셀 호네트처럼 생각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것에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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