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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8할은 책의 겉면을 보고 구매한 책이다=_= 요새 리커버되는 책들이 많기는 한데 사실 을유문화사의 책은 그리 찾아 읽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찾는 서점에서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 감각적인 표지를 발견했다. 책 표지에 귀의 해부도라니!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몇 권의 책이 리커버되어 나왔는데, 한 번 읽어본 적이 있는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고를까 하다가 아예 생소한 작가들의 책을 충동적으로 세 권 골랐다. 충.동.적.으.로,
레이날도 아레나스는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를 읽었었을까? 왜냐하면, 좌충우돌 숨가쁘게 진행되는 세르반도 수사(修士)의 여정이 예측불허한 캉디드의 방랑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캉디드』에는 밑도 끝도 없는 낙관주의가 깔려 있다면, 『현란한 세상』에는 극도의 염세주의가 베어 있다. 하지만 이처럼 대비되는 서술방식은 다시 두 소설의 공통점으로 연결되는데, 둘 모두 종교와 권력의 부조리 그리고 합리성의 비합리성을 다루기 때문. 볼테르는 이를 낙관주의를 통해 반어적이고 풍자적으로 묘사할 뿐이고, 레이날도 아레나스는 비관주의와 가르시아 마르케스 풍의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을 결합해 기괴한 방식으로 글을 풀어나간다.
‘사실주의’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공산주의 아래 소련에서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강조되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마술적 또는 환상적 리얼리즘’이 문학계에서 유행했다. 그렇다면 명사 앞에 수식어를 뺀 단단한 형태의 ‘사실주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때문에 레이날도 아레나스는 서문에서 자신이 마르케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면서도, ‘사실 ’사실‘이란 게 있기는 한가’ 의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회화(繪畵)는 19세기 사진기의 등장과 함께 지위가 하락한다. 사진기보다 사실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만큼 사실성을 갖춘다 하더라도 수고가 훨씬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진을 사실을 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조리개를 F2.8만큼 열고 찍은 사진과 F16만큼 열어놓고 찍은 사진 중 어느 것이 사실일까? 다시 한 번, 셔터스피드를 1초로 설정해 둔 사진과 1/20초로 설정해 둔 사진 중 어느 것이 사실일까? 때문에 사진 그 자체는 결코 사실 또는 진실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적인 성격이 강해졌다는 의미에서 사진은 그림보다 사실성이 강하다고 말하지, 사진이 사실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사진은 어디까지나 진실(眞)을 베낀 것(寫) 뿐이다. 역설적으로 그림이 사진보다 더 사실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서인지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글은 유달리 어울리지 않는 형용사를 넣는다거나 맥락을 해체하고 비현실적인 장면을 넣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하고, 문장에 따라서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을 쓴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볼테르의 『캉디드』보다도 더 허무맹랑하게 느껴진다. 스페인에 의해 외삽(外揷)된 라틴 아메리카의 가톨릭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비유를 통해 신세계(아메리카)를 비웃고, 구세계(유럽)을 유랑하며 각 열강의 야비함, 비천함, 졸렬함에 대해 고발하는데, 정작 모국인 쿠바에 대한 이야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주 짧게 등장한다. 하지만 쿠바의 정체성에 퍼즐 한 조각씩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 나라들을 떠돌며 세르반도가 발견한 온 세상의 악(惡)과 추(醜)함만으로 그가 쿠바를 비롯한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시간을 순서대로 나열하려는 인간의 천진함, 점진적이고 ‘진보주의적’이기까지 한 의도로 배열하려고 하는 것조차 시간은 거부한다. 이렇게 영원한 것을 정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은 공포스러운 이 일은 단념하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 고사본, 날짜와 축일 같은 것에 많은 중점을 둔다. 우리가 어떤 시간에서건 진실되고 비통한 인간을 발견할 때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가 시간을 초월한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의 현재성, 즉 무한성이라는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그가 존재했느냐 안 했느냐와 상관없이 분노와 사랑으로 인해 영원하며, 그리스도는 역사가 기록하든 안 하든 그의 실현하기 힘든 철학으로 영원하다. 그 비유, 그 이미지는 영원에 속한다.
영원한 것은 서열이 있거나 명백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배열된 것이나 시간으로 현실을 보는 것은 실제로 현실과 매우 격리된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주의라 불리는 것은 정확히 말해 현실의 반대라고 생각한다. 그 현실을 귀속시키거나 분류하거나, 하나의 관점(‘사실주의자’)에서만 볼 경우 논리적으로 완전한 현실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p. 14~15
……네가 거부한 것이 결국 네가 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지. 모든 수련 수사들이 옷을 벗은 채 너에게 인사하려고 다가갔을 때 무언가 네 안에서 ‘패스(pass)’했고 수많은 빛으로 부서졌지. 너의 첫 번째 반응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었고, 발가벗은 채 혼란스러웠지. 그러나 너는 너 자신에겐 완강하고 교활하지만 가장 강렬한 욕구에 있어서는 폭군이지. 그래서 뛰기 시작했지. 악행은 즐기기를 원하는 그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얽매이는 예속성과 영원한 의존성에 있다는 것을 너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끝없는 탐색과 발견한 것에 대한 계속되는 불만……
―p. 47
너는 문학의 독에 빠져 나방과 종이들을 휘저으며 찾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지. 그리고 모든 것은 대답 없는 질문뿐이었고, 그래서 너의 만성이 된 궁금증을 더더욱 부채질했지. 그리고 알기를 원했지. 그리고 질문했지. 연구를 계속했으나 어느 누구도 너에게 대답해 줄 수 없었고, 그러한 독서는 불경스럽고 미친 짓이라면서 독서를 그만두라고 했지. 그래서 너를 비난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기 시작했지. 그래서 너의 독방에서 그토록 안타까운 불균형의 원인들이 (어떤 신중한 손에 의한 것인지 모르지만) 사라지기 시작했어. 너는 문학이라는 탈출구 없는 우물에 빠져서 갈수록 외롭고 우울해졌지. 실존하지 않는 문을 통해 연설을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재조차 모르는 것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지.
―p. 52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이 이것이라는 걸 누가 알겠나. 여기 있는 것, 기다리고 있는 것, 미래가 어떨지 생각하는 것, 매 순간 나를 파괴하고 있는 것. 새로운 계략을 배울 때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이 최상이 아님을 확신한다. 가장 좋은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p. 138
사실은 해결책이 없다. 매 순간 도주하는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나 자신에게 말한다. 최선을 다해라, 최선을 다해. 그리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언제 이러한 가능성이 다 고갈되느냐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할 수 있다 해도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틀에 박힌 일만 남게 되고 이것이 증폭되다가 지치고 만다. 그러나 나는 습관적인 것에 적응할 수 없다. 그래서 매 순간 나 자신을 질식시키는 느낌이 든다. 나를 완전히 질식시키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p. 139
“종교는 결코 잊어서는 안 돼요. 그럴 경우 죄는 매력을 상실하고 더 이상 죄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아이, 만약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찌 되겠어요? 세상은 또 어찌 되겠어요? 그래서 왕은 나무마다 주교 한 명씩 배치하는데, 그들은 수렵의 어떤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고, 단지 우리가 죄짓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그러한 즐거움을 배가시키려고 저 위에 있는 것이지요.”
―p. 144
“당신 말이 맞아요” 소년이 대답했지. “그의 모습은 그래 보이진 않지만, 불가능한 것을 찾는 이 수렵에 참여한 이들 중에서 가장 고집스러운 사람이지요. 영원을 얻고자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기다리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 사람이 당신이 이곳에서 본 사람들 중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도 자신의 일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p. 152
“너는 무엇 때문에 네 현재의 상태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그가 말했다― 네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런 자유를 찾는 것이야말로 더 혹독한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 아니겠어?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닌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단 말이야? 게다가 ―떠나려고 하면서 덧붙였다― 네가 자유를 얻었다 해도 그것이 찾는 일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아니겠어? 그리고 더 나아가서 네가 갇혀 있다고 상상하는 바로 그 감옥보다도 더 끔찍한 것 아니겠어?”
―p. 155~156
“그를 죽이지 않을 것이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여겼으니까.”
―p. 163
‘가둘 수 없는 것······.’ 수사의 생각은 자유로웠다. 쇠사슬을 뛰어넘고 벽을 넘어서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밖으로 나가, 도주와 보복 그리고 자유를 꿈꾸는 것을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생각은 쇠막대기 사이를 가볍게 뚫고 나와 간수들의 코 위를 날아서 과거로 돌아가 고향의 모래밭이나 흰색으로 칠한 듯한 바위 언덕까지 이르곤 한다. ······수사는 그 어느때보다도 더 자신이 좋아하는 곳을 왔다 갔다 하고 더 많은 회상을 하고 자유롭게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곤 했다. 매일 그랬지만 더 괴로운 날에는 더 많은 회상을 했다. 이의 틈새로 들어와 혀를 묶고 그의 입술 가를 누르는 증오스러운 쇠사슬만 아니었더라면, 그 뼈대 속에서 환상의 새와 같은 온화하고 침착한 부드러움이 어리는 수사의 미소를 볼 수 있을 텐데······.
—p. 244
여름. 더위의 열기가 간수들에게 나쁜 피를 수혈했는지, 내가 소리 지르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감방에 들어와 나를 흠씬 두들겨 팬다. 나는 신에게 나를 죽여 달라고 명령함으로써 그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내 말을 들을지 의심스럽다. 신도 이곳에 있었다면 미쳐버렸을 것이다.
여름. 내 감방 벽의 색이 변해 간다. 분홍빛에서 붉은색으로, 붉은색에서 적포도주색으로, 그리고 적포도주색에서 빛나는 검은색으로······. 바닥도 거울처럼 빛나기 시작하고 천장에서 첫 번째 불똥이 뿜어 나온다. 팔짝 뛰어야만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발을 바닥에 대자마자 발이 타는 것을 느낀다. 뛴다. 뛴다. 뛴다.
여름. 드디어 열기가 내 감방의 쇠창살을 녹여 버리고 나는 빨간 용광로를 빠져나온다. 녹아 버린 쇠가 아직 빛을 반사하는 창가 가장자리에 타 버린 내 몸의 살점을 남겨 놓은 채.
—p. 304
“······사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역경을 겪은 뒤에는 우리를 두렵게 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평온함이 남지요. 당신은 나에게 겁을 줄 수 없어요. 나는 가난이나 기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죽음의 위험을 다 겪었소. 내가 결코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비굴하고 거짓되게 사는 것이오. ······옷을 입지 못한 채로 지낸 적도 있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보여 주는 우스꽝스러운 짓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로 명예가 훼손되지는 않았소. 아구스틴 선생, 자유와 독립을 저해하는 그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당신은 나의 적이오······”
—p. 318
“······나는 항상 미국의 느슨한 연방주의와 콜롬비아와 페루의 위험한 중앙 집권제 중간 정도의 정부 형태를 지지했습니다. 미국 연방제의 폐단은 이미 많은 작가들이 지적했고, 미국에서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 연방주의자와 민주주의자로 양분되어 있다고 합니다. 내가 옹호하는 절충주의는 지방마다 내부의 필요를 공급하고 번영을 도모하기 위해 필요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며, 대신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통합을 깨지 않고 신성한 동맹을 존중하고 경외해야 합니다. ······정부의 활동을 약화시켜서는 안 되고, 국가의 모든 역량과 자원을 동시에 그리고 신속히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역동적이어야 합니다. Medio tutissimus ibis(중도를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이것이 내 정치적 신조이고 염원입니다.”
—p. 323
“Si fractus illbatur oribs, Impavidum ferient ruinae(만일 무력한 세상이 무너지면, 그 폐허는 두려움을 모르는 자들을 자극시킬 것이다).”
—p. 324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지―수사가 언성을 좀 더 높이며 말했다―민주주의와 잘못된 교육을 혼동하고, 모든 것을 도식으로 축소하는 이 천민 무리에 봉사하는 것? 그들은 민주주의가 그들에게 입맞춤도 할 수 있는 아첨꾼들에게 그들의 재주를 다 보여주면서 옷을 반쯤 벗고 돌아다니는 것으로 믿고 있나? 이것이 마지막이란 말인가? 이 계속되는 위선과, 우리가 낙원에 있고 모든 것이 완전하다고 반복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낙원에 있는가? ······그런 낙원이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것을 고안하려고 노력하는가?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을 속이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약속된 장소를 이미 발견했나? 우리가 이미 위안과 휴식을 보았나? 이제 더 이상 바랄 게 없나?’ 그렇다면 아니야, 그렇다면 아니야, 아직······.”
—p. 345
이제 그의 『별이 빛나는 위대한 밤』에 있었다. 질문의 밤이다. 반 고흐를 미치게 만든 밤, 칸트를 의심하게 만든 밤, 다윗의 첫날 밤, 모든 문명 시대에서 인간들을 당혹하게 하거나 계몽시킨 밤. 별자리들의 불꽃 아래서 수사는 복도를 걷는다. 대답이 무엇이었나? 신호와 해답은 어디 있었나? 다시 고개를 들고, 천체의 소용돌이 같은 행렬을 보면서 꼼짝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그 빛나는 행렬, 그 침착한 조화를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시를 얻었다. 모든 문명(모든 혁명, 모든 투쟁, 모든 목적)의 목적은 별자리의 완성, 변함없는 조화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러한 완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불균형이 존재하니까.”
—p. 355
손은 땅의 투명함을 터치한다.
부끄럽고 간결한 자세를 취한다.
모른다고 예감한다.
꿈의 한계를 지적한다.
미래의 크기를 구상한다.
이 손은 내가 알고 있음에도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 손은 언젠가 나에게 말했다. “더듬어 보고 도망가라.”
이 손은 이미 유아기로 서둘러 간다.
이 손은 어둠을 헤쳐 나가는데 지치지 않는다.
이 손은 실질적인 것만을 더듬는다.
이 손은 내가 이제 거의 지배할 수 없다.
이 손은 늙어서 색이 변했다.
이 손은 시간의 한계를 가리킨다.
다시 일어나서 장소를 찾는다.
손짓을 하며 떨고 있다.
손가락 사이에 아직 음악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손은 나에게 순복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손은 길어지고 만남을 터치한다.
이 손은 피곤하다고 나에게 이제 그만 죽으라고 요청한다.
—p. 362~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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