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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Les choses)일상/book 2020. 3. 31. 02:51
사실 이 책을 이렇게 후딱 읽을 줄은 몰랐다. 카페 마감시간을 1시간 반 여 앞두고 140여 페이지 되는 이 책을 휘리릭 읽었다. 속독을 한 건 책을 얼른 읽은 다음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려던 생각에서였는데, 그것도 타이밍을 잃어서 다 읽은 책을 그냥 고스란히 들고 왔다;;120% 내 상황을 잘 나타내준 소설이었고, 아마 사회초년생이라면 누구나 다 느낄 법한 내용이었다. 사실 묘사가 너무 정확해서, 좀 더 장편소설이거나 아니면 연작이기를 바랐을 정도다. 물질적인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뿌리부터 부자유하다는 느낌. 소확행을 바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부자이지 못한 자신에게 습관적으로 분노를 느끼는 일상. 보헤미안처럼 방랑하는 듯하지만, 행여 현재의 일상이 기획한 구조로부터 유리(遊離)될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 다 한 번씩은 거쳤던 생각과 감정들이다. 내가 느끼는 게 불안함과 불만감이 섞인 그 무언가가 아니라, 불안함인지 불만감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정체조차 모르겠다는 것.
그중에서도 가장 촌철살인이었던 대목은, ‘차라리 레지스탕스 시대를 살았으면 할 때도 있었지만, 정작 그들은 알제리 전쟁을 겪고 있었다’는 구절이었다. '차라리 레지스탕스 시대를 살았으면 했다'는 말을 좀 더 풀어서 말하면, ‘궁핍해도 답이 정해져 있던 시절이 부유하지만 답을 알 수 없는 시절보다 낫다’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입해 부연설명하자면, ‘항상 목표가 보였던 베이비부머들이 한 치 앞을 몰라 아귀다툼하는 지금의 청년들보다 오히려 호시절을 살았다’는 것 정도로 얘기할 수 있을까. 젊음의 열정이 달콤했던 시절과 그것이 부담스러운 지금의 시대.
정작 촌철살인이라 느꼈던 것은 역접 뒤에 따라오는 뒷문장에 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알제리 전쟁을 겪고 있었다.” 따지고 들어가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여건에서, 이전과 다른 해석이 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참 지겹지만 뿌리칠 수 없는 질문이다. 세종대로와 신촌로를 배회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더욱 다른 곳을 맴돌고 있는 내 모습은, 파리의 이 거리 저 거리를 개선(凱旋)한듯 쏘다니다 튀니지의 스팍시로 흘러든 제롬과 실비와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모두가 남들과 달라보이고 싶어하지만, 달라보이고 싶어하는 바로 그 동일한 욕구로 모두가 수렴해간다. 실상 다른 나는 없다.
이 책이 나온 것이 1965년. 소르본 대학의 사회학과에 재학중이던 조르주 제렉은 롤랑 바르트의 제자였다. 이미 반 세기도 더 전에 이런 사유(思惟)를 한 학생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동명의 추리 소설 작가 조르주 심농처럼 부담 없이 언제든 집어들 수 있는 책이고, 조만간에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 동료, 그들이 몸담은 세상이 전부 그러했다. 그들은 단번에 너무 탐욕스러워진 것이리라. 그들은 지나치게 빨리 가고자 했다. 세상의 물건이란 물건은 모두 그들의 것이어야 했고, 소유의 기호들을 계속 늘려야 했다. 그들은 추구해야만 했다. 차츰 부자가 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부자였던 것처럼 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안락한 가운데 미를 추구하며 살고 싶었다. 그들은 목청을 높이며 감탄하곤 했는데, 이것이 바로 부자가 아니라는 제일 확실한 증거였다. 몸에 배서 너무나 당연한 것, 몸의 행복에 따르기 마련인, 드러나지 않고 내재하는 진정한 즐거움이 그들에게 부족했다. 그들의 즐거움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치라 부르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돈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들은 부(富)의 기호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에 앞서 부를 사랑했다.
―p. 28
일단 돈을 벌겠다고 선택한 사람들, 부자가 되고 난 이후로 자신들의 진짜 계획을 미뤄둔 사람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누리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삶이란 최대한의 자유로서 행복의 추구와 욕망, 본능의 절대적 충족, 세상의 무한한 부를 당장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런 이들은 늘 불행하다……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p. 63
현대사회는 타인의 불행을 지워버림으로써 본인의 불행을 확대해 보여 주기 마련이다.―p. 65
미래, 앞을 내다볼 수 없음이 자신과 자신들 세대를 가장 잘 정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전 세대는 스스로에 대해서나 세계에 대해 분명한 가치관을 지녔으리라 짐작했다. 자신들이 스페인 내전이나 레지스탕스 시대에 스무 살이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곤 했다. 사실 그에 대해 마음대로 떠들어댔다. 당시의 문제들, 답해야 한다는 압박이 훨씬 심했을지라도, 당시에 맞닥뜨려야만 했을 문제들이 더 분명해 보였다. 자신들은 함정이 놓인 문제에 둘러싸였을 뿐이었다.
이런 생각은 다소 위선적인 회한이었다. 왜냐하면 알제리 전쟁이 그들 세대에 발발했고,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었다.전쟁은 그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행동을 취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행동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신들의 인생과 장래,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흔들릴 수 있다는 생각은 그때까지 해보지 못했다.
―p. 70~71
자신들이 하는 일이 중요하고, 필요하며, 둘도 없이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무엇인가를 원했다. 두려움에 찬 노력이 의미 있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던 그 무엇이기를, 자기 자신을 알게 해주며, 변화를 가져다주고 살게끔 해주는 무엇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진짜 삶은 다른 곳에 있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온갖 위험, 알아채기 어려운 덫, 주문(呪文)에 싸인 계략과 같이 훨씬 미묘하고 은밀한 형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p. 75
변한 것이 있다면,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너무나 모호한 것이었다. 그들의 남다른 삶의 방식, 몽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들은 지쳤다. 그들은 늙었다, 그랬다. 어떤 때는 자신들이 인생을 채 시작하지도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삶이 위태롭고 덧없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치 채워지지 않은 욕망, 불완전한 기쁨, 잃어버린 시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기다림과 궁색함, 편협함이 자신들을 마모시켜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느꼈다.
―p. 78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 안에 있었다. 그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시켰으며 황폐화시켰다.
―p. 79
그들의 삶은 사랑과 취기에 어렸다. 그들의 열정은 끝을 몰랐고, 자유는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았다……하지만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세세한 형상 가운데 그들은 질식해 버렸다. 내용은 빛을 잃고 희미해져 갔다. 어렴풋하고 모호하며, 빈약하고 강박적이며, 어리석고 별 볼 일 없는 몇 가지 단상만이 남았다. 더 이상 전체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동떨어진 그림으로, 흠 없는 총체가 아니라 조각난 파편으로, 모든 이미지들이 저 멀리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모호하고, 나타나자마자 스러져버리는 암시적이고 환영에 찬 반짝임처럼, 먼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가장 걸맞지 않은 욕망의 우스꽝스러운 투사, 손에 잡히지 않는 희미한 빛의 반짝임,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꿈의 조각에 불과한 것 같았다.
―p. 98
행복에 대한 도를 넘어선 이런 종류의 추구, 순간이지만 행복을 엿보고 행복을 알아냈을 때 느꼈던 경이의 감정, 환상적인 여행, 확고부동한 어마어마한 성취, 새롭게 발견한 지평, 미리 맛본 유희, 불완전한 꿈 아래 가능했던 모든 것들, 여전히 어색하고 당혹스럽지만 이미 장전된 총알처럼 준비되었던 비약,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감정, 새로운 요구, 그들이 경험한 이 모든 것들에서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p. 99
그들은 주변에 공모의 신호를 찾아 헤맸다. 아무것도 응답하지 않았다. 거의 고통에 가까운 고립감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을 박탈당했다. 세상에 몸담고 있지 않았다. 세상에 속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속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엄격한 규율이 그들을 배척하는 듯했다. 어디든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p. 116
그들의 삶은 마치 고요한 권태처럼 아주 길어진 습관 같았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 삶.
―p. 119
예전에, 이 예전이라는 것이 세월에 따라 하루하루 후퇴하는 시간이어서 마치 그들의 이전 삶이 전설이나, 비현실 혹은 모호함 속으로 파묻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그들은 적어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광기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이런 강렬한 욕구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기도 했다. 앞쪽으로 팽팽히 당겨진 듯한 조급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느낌으로 살았다.
그리고? 무엇을 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인가, 아주 천천히 파고드는 조용한 비극과 같은 것이 그들의 느려진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래된 꿈의 파편 가운데, 형태 잃은 잔해 가운데 그들은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경주의 끝, 6년 동안 삶이 굴러온 모호한 궤도의 끝, 어느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우유부단한 탐색의 끝에 서 있었다.
―p.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