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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훤당 고택과 용흥못여행/2024 입춘 즈음 달구벌 2024. 2. 19. 18:01
대구에는 못(池)이 많다. 오래 전 한 일본인 친구가 내게 한국에는 일본의 비와호(琵琶湖)―시가현에 자리한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같은 호수가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인공 호수나 저수지야 많지만 떠오르는 거라곤 포천의 산정호수 정도여서 괜히 대결(?)에서 진 듯한 기분이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호수는 어휘상으로나 개념적으로는 존재해도 우리나라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고여 있는 물'―물론 완전히 닫힌 공간은 아니다―에 대한 심상은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공간에 대한 경험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구에 가면 거창한 호수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못(池)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흔히 내륙도시의 대명사로 알려진 대구에서 큰 면적의 수평(水平)을 발견하는 것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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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일상/book 2024. 2. 13. 18:56
Seeing comes before words. The child looks and recognizes before it can speak.―p.7 The past is never there waiting to be discovered, to be recognized for exactly what it is. History always constitutes the relation between a present and its past. Consequently fear of the present leads to mystification of the past. The past is not for living in; it is a well of conclusions from which we draw in 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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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일상/book 2024. 2. 10. 17:32
같은 인간이 엄청나게 죽어가는 걸 흥미진진하게 또는 전후의 잇속에 침 흘리며 관전하는 세상인심을 보면서 우리 민족이 죽어가고 우리의 운명이 엉망진창이 될 때도 남들이 저렇게 재미나게 구경했으려니 하니 새삼스럽게 노엽고, 무더기로 살해당하는 게 전자오락 화면 속의 움직이는 영상이 아니라 제각기의 고유하고 소중한 세계를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고 핏줄로 사랑으로 얽히고설킨 가족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줄창 눌어붙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p. 57 어떤 자리에서나 극단적인 편견에 치우친 말일수록 목청이 높다. 극단적인 편견이란 남의 말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걸 나타내는 목소리까지도 우선 배타적이다. 남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배제하려면 제 목청을 높일 수밖에 없다. 남의 생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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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양다경 (建陽多慶)주제 있는 글/Théâtre。 2024. 2. 8. 11:32
이 글을 연극 카테고리에 남길까 말까 고민한 건, 관람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한 꼬마와 이를 통제하지 않는 보호자로 인해 춤 공연의 3분의 2는 즐기지 못한 사정 때문이다. 요즘 들어 머리 꼭지까지 화날 정도로 무례한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잡문(miscellaneous) 카테고리에 한번 생각을 정리해서 올려볼까 한다. 춤은 크게 세 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춤이 승무(부제:불佛)이고 두 번째 춤이 민살풀이(부제:신神), 끝으로 소고와 함께하는 나가는 춤이 있다. 그리하여 내가 집중해서 관람할 수 있었던 공연은 첫 번째 춤인 승무일 텐데, 각 춤에서 주로 사용하는 몸동작이 달라서 세 가지 스타일의 춤을 고루 온전히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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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How to do nothing)일상/book 2024. 2. 7. 11:39
기억을 돌이켜 생각해보라.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은 것을 삶에서 빼앗겼는지, 쓸모없는 슬픔과 어리석은 기쁨, 탐욕스러운 욕망, 사회의 유혹에 얼마나 많은 것을 소진했는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자신의 계절이 오기도 전에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p.16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절반은 우리의 관심을 도구화하는 디지털 세계의 관심경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나머지 절반은 다른 무언가에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그 ‘다른 무언가’는 다름 아닌 실제 세계의 시간과 공간이며, 시공간에 다시 연결되는 것은 우리가 그곳에서 서로 관심을 가지고 만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온라인상의 최적화된 삶의 장소 상실에 반대하며, 역사적인 것(이곳에서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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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짝 뒷걸음으로여행/2024 겨울비 당진과 예산 2024. 1. 29. 12:34
주말 이틀 내내 출근을 하는 바람에 매우 피곤한 하루였던 것 같다. 또 그 짬을 내어 여행갈 생각을 하다니, 어떤 식으로든 쉼표를 제대로 찍고 싶었던 모양이다. 추사고택에 이어 내가 향한 곳은 백설농부라는 한 카페였다. 같은 예산이지만 다시 삽교천을 건너는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카페에 도착한 뒤 나는 일에서 오는 피곤함을 누르고 카페에 앉아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요새 눈을 떼기 어려운 책이다. 이 카페를 찾은 이유는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 때문이었다. 나무로 지은 카페 일대에는 텃밭이며, 정원이며, 농원이 가꿔져 있지만 엄혹한 계절인지라 싱그러운 풀빛은 찾아보기 어렵다. 메말라가는 몇 가닥 억새들이 초라하게 부대낄 뿐, 멀리 바라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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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추사고택(秋史古宅)여행/2024 겨울비 당진과 예산 2024. 1. 28. 14:38
신리성지를 나설 때쯤에는 좀전보다 비가 더 내리기 시작했다. 훈풍이 가신 차 안에서 시동을 걸고 잠시 몸을 녹인다. 그리고 구글맵에서 찾아두었던 추사고택의 위치를 다시 확인한다. 11분, 그 시간의 차이에 의해 나는 당진에서 예산으로 월경(越境)하게 된다. 겨울철 입장마감 시간이 5시인 추사고택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가 좀 안 되었을 때로, 추사의 생애가 소개된 추사기념관까지 들를 생각은 못하고 고택과 묘소 일대만 거닐어보기로 했다. 필름카메라에 낀 희뿌연 성에를 외투 소매 끄트머리로 닦아내고, 가능하면 부슬비를 피해 처마를 따라 빈집에 잠입한 고양이처럼 고택을 살펴본다. 그리고 지난 여름 다산초당을 찾았던 때를 기억한다. 대나무가 자라나는 산길로 이어진 다산초당과 달리, 추사고택은 야트막한 솔숲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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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갯짓과 울부짖음여행/2024 겨울비 당진과 예산 2024. 1. 25. 18:21
당진에는 아마 지금쯤 많은 눈이 내렸을 것이다. 삽교천과 안성천이 커다란 하구를 만들며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이 일대는 예로부터 넓게 일컬어 내포(內浦)라고 불렸다. 지금의 예산, 아산, 서산, 홍성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그러므로 오늘날 홍성 지역에 만들어진 내포 신도시라 함은 상당히 좁은 의미를 띤다 하겠다. 여하간 두 물줄기가 만나는 아산만은 경기도와 충청도를 구분짓는 지리적 경계인 동시에 문화적 경계이기도 하기에, 당진 부둣가를 활발히 메운 공업단지를 뺀다면 이미 서해대교를 지나는 순간부터 상당히 전원적인 풍경이 차창을 가득 채운다. 그 풍경에 하나의 이채로운 색깔을 덧입히는 것이, 이 지역에 스며든 카톨릭교회의 정취다. 당진은 한국사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