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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일상/book 2021. 5. 5. 22:50
최근 ‘불평등’을 테마로 여러 글들을 읽고 있다. 가령 경제적 자본과 관련하여서는 칼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사회적 자본과 관련하여서는 막스 베버의 글을, 문화적 자본과 관련하여서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글을 찾아 읽는 식이다. 어느 글이든 해당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 발생하는 격차 또는 갈등에 대해서 다루는데, 늘 그렇지만 글을 읽으면 읽을 수록 불평등 문제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기보다는 복잡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의 알맹이에서 멀어져서 그렇다기보다는, 알맹이에 조금 가까워진 것 같은데 아직 윤곽이 또렷하지 않아서 답답한 그런 느낌에 가깝지 않나 싶다.
불평등이라는 건 계급에 대한 인식이나 계층구조와 떼어서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누가 얼마만큼 권력을 할당받는지, 의사결정과정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누가 배제를 하고 누가 배제당하는지에 관해서 계급 인식이나 계층구조를 이해하는 방식도 매우 다양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최근에는 중간계층—이른바 중산층—에 대해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다가 17대 대선 당시 선거공약으로 이슈가 되었던 ‘경제 민주화’에 관한 글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의 옮긴이가 글의 마지막에 말하듯이, ‘경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방식도 여러 가지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소액주주운동과 같이 기업의 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경제 민주주의에 대한 시도가 있기도 했던 것이 간략한 역사다.
여하튼 ‘경제’와 ‘민주주의’라는 두 단어가 어울릴 수가 있느냐, 처음에는 어불성설인 것 같았다. 비용-편익을 헤아리는 경제적인 접근방식—특히 합리주의에 기반한 설명방식—과 가치 문제를 다루는 정치체제 용어가 한 단어로 엮일 수 있는 것일까, 하면서.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경제 민주화’라는 단어를 정치권에서 언급했을 때에는, 경제적 격차를 좁히는 방향으로 부의 재분배를 조정해나가자는 취지에서 나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공약보다는 스캔들이 범람하는 선거철을 생각하보면 당시 맥락을 정확히 기억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여하간 ‘로버트 달이 말하는 경제 민주주의’는 아래와 같은 의미에서 독특하고 흥미롭다.
로버트 달이 말하는 ‘경제 민주주의’에서 전제되는 것은, 첫째 기업은 국가와 같은 통치체제이며, 둘째 그러므로 기업에 속해 있는 구성원은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로버트 달은 이러한 논의로 나아가기에 앞서서 우선 평등과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알렉시 드 토크빌이 「미국 민주주의」에서 우려했던 대로,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이 보장될 때 성립된다면, 평등을 외치는 다수가 소수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을까, 하는 대목에 대해서 로버트 달은 크게 세 가지로 접근을 하는 듯하다.
첫째, 토크빌이 19세기 초 목격했던 미국의 민주주의는 매우 이례적인 사회적 환경에 놓여 있었다. 즉, 서부 개척이 한창 이루어질 당시에는 역사상 아주 이례적일 만큼 사람들이 균등하게 토지를 분배받을 수 있었으므로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둘째, 평등이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가 충돌하는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즉, 이는 평등과 자유의 대결이 아닌 자유 개념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셋째, 사유재산권이 어디까지 보장받을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유재산권이 자연적 권리인지에 대해서는 로크와 밀 등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사유되어 왔으며, 오늘날 주주가 기업을 소유하는 형태의 지배형태는 소유권과 소유의 대상 사이에 괴리가 크고, 따라서 소유의 내용이 대단히 추상적이다. 오늘날 미국식 법인 자본주의에서 투자자들이 공룡 같은 기업들의 주식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소유권을 얻는 것은, 정작 기업에 고용된 사람들의 데모스적인 속성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비도덕적인 의사결정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졌다는 것이 로버트 달의 주장이다.
로버트 달은 단지 오늘날의 법인 자본주의가 갖는 문제와 한계점을 지적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어떤 대안적 접근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사유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자유주의라든가 사회주의라든가 하는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의 형태로 기업 구성원의 시민적 속성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여기서 ‘협동조합’이라 함은 우리가 흔히 ‘생협’으로 알고 있는 생산자 협동조합과는 차이가 있다. 배정받은 주식에 대하여 개인적인 권리 행사를 허용하는 생산자 협동조합과 달리 로버트 달이 말하는 협동조합에서는 집단적인 권리 행사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말하는 예 가운데에서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몬드라곤이나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협동조합이 가장 가깝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협동조합이 지닐 수 있는 한계와 예상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들 사례를 통해 부연한다.
로버트 달이 이 글을 쓴 것이 1985년 때의 일이니까 이미 책을 쓴지로부터 35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로버트 달이 민주화된 국가들이 군중 독재로 전복된 사례들을 다룰 때, 우리나라는 아직 민주화되지도 않았던 시점의 일이다. 사실 나는 로버트 달이 말하는 ‘법인 자본주의’라든가 ‘소유권’, ‘협동조합’과 같은 개념들에 그리 익숙하지 않다. 다만 학교를 다닐 때 비교정치 수업에서 ‘민주주의’를 공부한 적이 있을 뿐이고, 루소와 밀의 몇몇 저작을 읽으면서 ‘사회계약’ 과 ‘자유’에 대한 관념을 접했을 뿐이다. 완벽하지 않은 백그라운드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달의 글이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그의 논리와 주장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그의 이야기는 미국사회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미국사회는 1980년대 당시보다도 더욱 불평등의 정도가 심해졌다. 로버트 달이 살았던 1960년대는 여성과 흑인처럼 미국사회의 변방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운동이 확대되었던 시기라면, 그 이후로는 닷컴버블과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경제적으로' 변두리에 머물거나 소외된 사람들이 급증했다. 하지만 코로나 시국에서도 금융시장은 활기를 띠는 오늘날의 아이러니한 국면에서 로버트 달이 제안하는 ‘생활협동' 모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제 우선(자유주의) 또는 복지 우선(사회주의)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포용할 수 있는 더 넓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終]
우리는 토크빌의 예측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즉, 민주주의국가들에서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조건의 평등은 결국 고립된 개인들과 가정으로 구성된 고도로 원자화된 사회를 만들어 낼 것이며, 안전・소득・보호・편의와 같은 광범위한 대중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만 동시에 정치적 권리를 축소시키고 민주적 절차를 파괴하는 체제에 대한 다수의 지지를 낳을 것이다.
—p. 45~46
토크빌은 자유를 민주주의 및 다수결 원칙과 통합하는 데 있어서 ‘법’—오늘날로 치면, 헌법 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이상으로, 다음과 같은 네 번째 요인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했다. 그것은 토크빌이 라틴어 모레스와 같은 의미로 보았던, 사람들의 관습manners이었다. 토크빌은 관습을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다양한 관념과 견해, 그리고 심성을 구성하는 사상의 총체”로 보았다.
—p. 57~58
고대부터 정치 이론가들은, 민주주의와 재산권 간의 갈등은 재산이 불평등하게 분배될 때만 발생하고 불평등이 심할수록 그 갈등도 커질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우리는 이를 권력과 재산을 분배하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재산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거나 재산권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에 과제는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고, 위협은 정치적 평등으로부터 발생한다. 시민들이 정치적으로 평등하지만 경제적으로 불평등하다면 가난한 자들은 부유한 자들에 대항해 힘을 모을 것이고, 가난한 자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부유한 자들의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다수가 평등을 이용해 부유한 소수의 재산을 전유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두 번째 관점은 위협이 반대방향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상정한다. 경제적 자원은 어느 정도 정치적 자원으로 전환될 수 있다. 시민들이 경제적 자원에서 불평등하다면, 정치적 자원에서도 불평등하기 쉽고 정치적 평등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극단적인 경우, 부유한 소수가 대부분의 정치적 자원을 소유하면 소수가 국가를 조정하고, 다수 시민을 지배하고, 민주적 절차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되어 버릴 것이다.
—p. 79~80
흔히들 주주는 자신의 돈을 희생한 대가를 받을 도덕적 권리가 있기 때문에 주주에 의한 소유가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주주들이 무엇을 희생하고 있을까? 주주들이 다른 투자 기회를 희생하고 있다는 답은 논점을 회피하는 것이다. 여기서 논점은 주주들이 과연 투자에 대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느냐이다. 법인 소유가 기관이나 부유한 투자자들에게 집중되는 현실에서 주주들이 소비를 희생하고 있다는 말은 우스꽝스럽다. 더구나 희생에 대한 대가라는 점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들이 기업을 통제하는 것까지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나는 투자자들이 투자를 통해 희생하는 것보다 노동자가 노동으로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것이 더 크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 논증은 [사유재산권을] 미국의 현재 소유 구조를 더 이상 정당화하지 못할 정도로 좁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순환 논리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내가 만약 강도를 만났는데 돈의 절반만 가져가고 절반은 남겨 두기로 강도와 합의한다 해도, 도둑이 붙잡히면 알게 되겠지만, 그 합의는 도덕적이지도 않고 법적 강제력도 없다. 마찬가지로 만약 소유자가 이전에 소유했던 재산으로부터 얻은 수익을 투자할지라도, 애초에 그 재산에 대한 소유권이 없었다면, 이번 투자로 얻은 수익에 대한 권리도 없다. 따라서 주주들이 자신의 돈을 다른 곳에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익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주주가 재산을 소유함으로써 얻은 수익에 대한 권한이 있는지 여부를 따지고자 하는 이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는 것이다.
—p. 92
민주적으로 통치되는 영토 단위에서 그러하듯, 노동자가 기업에서 시민권을 갖는 것은 소유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성원 자격에 의해 결정된다. 민주주의국가의 구성원은 시민권을 통해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완전하고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지만 국가의 부에 대한 개별적인 지분 소유를 주장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협동조합 소유 기업에서 조합원은 완전하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지만 기업의 자산 가운에 일정 몫을 임의로 처분할 수는 없다. 따라서 양도 가능한 주식을 지분으로 받는 대신에 기업-시민 각자는 (봉급과 다른 비용을 제한 후) 발생한 초과 수익을 배당받을 ‘내부 계정’을 하나씩 가진다. 노동자가 조합원이 되려면 조합비를 내야 하며, 그 조합비가 내부 계정의 첫 잔고가 된다. 회계 연도가 끝나면 수익(또는 손실금)은 나누어져 각각의 내부 계정으로 입금(또는 인출)된다.
—p. 150~151
협동조합 소유의 자치 기업 조합원들에게는 개인의 측면에서 사유재산권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대부분의 권리가 없다. 즉, 기업에 대한 소유권, 사용권, 경영권, 임차권, 판매권, 양도권, 처분권, 지분이전권 등이 없다. 물론 기업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체계라고 해서 기업 자산에 대한 이런 권리를 개별 주주가 모두 갖는 것은 아니다. 개별 주주는 자신의 지분에 대한 권리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자치 기업에서 조합원들은 이 모든 권리를 집단적으로 가질 수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질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협동조합이 소유한 자치 기업은 공적인 성격을 갖는 동시에 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조합원들과의 관계에서는 공적인 성격을 갖지만, 비조합원들과의 관계에서는 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조합원은 조합의 수익금을 나누어 자신의 몫만큼 받지만 지분 자체를 팔거나 이전할 수는 없다. 조합원이 가지고 있는 지분은 개인 재산personal property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사유재산private property은 아니다. 자치 기업 체계는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처럼 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분권화된 사회주의 같아 보이기도 한다.
—p.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