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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현대사 [갈무리]일상/book 2021. 6. 23. 23:29
공동체 의식은 그토록 강했지만 수그러들 수도 있었다. 젊은 세대에게 부모들(특히 아버지들)의 사회주의 규범이란 해방 못지않게 종종 억압으로 경험되었다. 파시즘 시기는 앞서 묘사한 사회적인 유형들과 구조들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했지만, 그것들을 훨씬 덜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파시즘은 곤봉으로 그리고 [대대적인 광고나 홍보물 같은] 은밀한 설득자로 노동계급 동네에 들어왔다. 사회주의 네트워크와 조직들이 파괴되면서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 속으로 침잠했다. 구술 증언들은 한결같이 노동계급 구역에 내려앉은 침묵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저항운동은 일부 상징적인 제스처에 국한되었다. 노동절에 붉은 타이나 멜빵을 메는 것, 일터의 화장실에 슬로건을 낙서하는 것 정도로 말이다.
—p. 33
독일이 버티고 있음에도 파업 및 그 밖의 생산 중단이 1943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겨우내 계속되었다. 파시즘 시기에 옹골찬 노동자 문화가 해체되었다면, 전쟁 시기는 이 문화를 재구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43~45년의 극적인 사건들—점령, 폭격, 대중 파업, 레지스탕스 네트워크—은 새로운 집단행동 시대를 창출한 분수령이었다. 또한 이 사건들 덕에, 1940년 독일의 영국 대공습 당시 런던에서처럼, 강력하게 지속될 연대의 신화가 등장했다. 가에타노 살베미니는 이 시기를 되돌아보면서, 마치 ‘밀라노의 5일’을 다시 겪는 것 같다고, 그러나 하나의 도시에 그친 것도 아니고 단 닷새 만에 끝난 것도 아닌 이 시기야말로 대대적인 고양기였노라 회상했다. 물론 이것은 당시 발생한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훨씬 더 끔찍한 일들도 있었으니 바로 내전이었다. 토리노의 노동계급 동네에서조차도 가족들마다 충성하는 대상이 서로 갈렸다. 이로 말미암아 발생한 해묵은 빚과 이를 갚으려는 복수가 전쟁 동안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직후에 걸쳐 자행되었다.
—p. 37
구릉 고원 지역은 라티폰도의 중심지였다. 라티폰도라는 단어는 대규모 소유지를 뜻하는데, 이런 서유지들은 여전히 매우 흔해서, 예컨대 시칠리아에서 경작되는 모든 토지의 80퍼센트에 달한다. 하지만 라티폰도는 물리적인 대토지 소유를 뜻할 뿐만 아니라 독특한 농업 체계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남부 이탈리아의 라티폰도 체계에서는 농민에게 그가 가족과 함께 소유하고 있거나 또는 적어도 누대에 걸쳐 경작해 왔던 한 조각의 땅마저도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았다. 농민들은 늘 토지와 일을 찾아나서야만 하는 처지였다. 농민이 가족을 부양할 만한 벌이를 하려면 적어도 세 가지 상이한 방식의 노동을 해야 했다. 보통 아주 작은 크기이지만 자신의 소유지를 경작하는 것, 상이한 라티폰도 소유자들에게서 그것도 대개 서로 멀리 떨어진 길쭉한 토지들을 해마다 임대하는 것, 대소유지에서 계절노동자로 일하는 것.
—p. 50
이탈리아의 새 정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전형적인 특징이 되어 버린, 정당 간에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흥정이 8주나 걸려 끝난 뒤인 1945년 6월에, 행동당 당원이자 레지스탕스 연합군의 부사령관인 페루초 파리가 총리가 되었다. 파리는 비밀 활동 시절에 ‘마우리치오’라고 알려졌고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제 그가 이끄는 정부가 들어섰으니 1943~45년 시기에 꿈꾸었던 숱한 희망이 이뤄질 것만 같았다. 레지스탕스가 권력을 잡았다. 실제 현실에서는, 외관과 실재의 간극이 더 벌어질 수 없을 만큼 심했다. 파리 초대 총리와 후임자인 데가스페리 총리가 재임한 3년 동안, 사람들은 레지스탕스 이상의 승리를 목격하기는커녕 일국적인 수준과 국제적인 수준에서 공히 광범위하게 대립하는 두 전선이 점차 발전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는 고용주 계급과 기민당과 미국을 축으로 하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계급 운동과 공산당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전선이다.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이 같은 갈등이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반파시즘 정당들의 지속적인 협력이라는 가면 아래 가려졌지만, 1948년 봄 총선 시기에 극적으로 결정적으로 고조되었다. 지난 5년간의 투쟁이 절정을 이루었던 총선을 결과가 이탈리아 공화국의 성격을 10년 넘게 결정했다.
—p. 109
이탈리아에는 기민당, 공산당, 사회당이 아닌 제4의 정당[고용주 계급]이 있으니, 이들은 국채를 사보타주하고 자본을 도피시키며 인플레이션을 조장하고 추문을 퍼뜨려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자들이다. 경험이 내게 가르친 바, 국부와 경제력을 처분하는 이 제4의 정당의 대표자들을 우리가 어떤 형식으로든 정부 안으로 들이지 않는 한 오늘날의 이탈리아를 통치할 수 없다.
—p. 117
공산당과 사회당은 행동당의 약점을 별로 치유하지 못했다. 파리 정부에서 좌파(이탈리아공산당・이탈리아사회당・행동당)가 산술적으로는 기민당과 자유당에 비해 다수파였음에도 이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 넨니가 내각 의장이 되기를 바랐던 사회당 입장에서 파리는 임시방편이었을 뿐 만족스러운 대안은 아니었다. 공산당은 인민의 압력을 바탕으로 사회적・제도적 개혁을 공고히 하겠다는 구상을 놓고 몇 주간 불장난을 했지만, 결국 기만당과의 동맹을 우선한다는 애초의 목표로 회귀했다. 두 좌파 정당은 모두 선거만 치르면 자신이 다수파로 부상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들은 선거가 지나치게 지연되지 않도록 기민당과 자유당에 실질적인 양보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좌파 장관들은 기민당 동료들을 소외시키지 않고자 대단한 자제력을 발휘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민족해방위원회들이었다. 행동당은 이 위원회들이 새로운 국가의 정치 구조에서 직접민주주의 요소로서 제 역할을 하기를 바랐고, 공산당 또한 행동당만큼은 아니라 해도 그 바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유당과 기민당과 연합군은 아예 외면하려 들었다. 5월말에 자유당 소속 장관이 베네리오 카타니는 민주주의란 오직 “모든 시민 개개인의 자유・직접・비밀투표”에 근거할 뿐이라고 경고했다. 공산당과 행동당은 이런 반대에 직면하고도 별다른 저항 없이 민족해방위원회들을 포기하며 이 위원회들이 자문 기구로 전락하는 것을 받아들였고, 이는 결국 이 위원회들의 소멸로 이어지는 서곡이었다.
—p. 134~135
데가스페리는 움직이는 것 말고는, 그것도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월에 접어들면서 그를 행동에 나서도록 고무한 것은 국제적 차원에서 발생한 두 사건이었다. 하나는 프랑스 전역에서 일어난 위기인데, 5월 9일에 전후 최초로 공산당을 정부에서 성공적으로 축출한 것이다. 더 중요했던 또 하나의 사건은 미국 대외 정책의 급속한 진화였다. 트루먼독트린은 3월에 이미 공표되어 있었고, 이제 미국은 이탈리아 상황에 관해 자신들의 반공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탈리아 군대에 염가로 현대무기를 판매하라는 지시가 즉각 내려왔다. 5월 1일에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로마 주재 미국 대사인 제임스 던에게 서한을 보내, 10월 총선의 위험을 예상하면서 데가스페리가 공산당을 빼고 통치할 것을 촉구했다.
—p. 164~165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하는 것이 개혁 담당 부서들 자체다. 애초부터 그것은 기민당 권력의 견고한 비지였다. 농민 대표자들은 전혀 없었지만, 남부 부호들은 왕왕 자기 사람들을 권력이 있는 자리에 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칼라브리아에서는, 개혁에 영향을 받는 대지주 중 하나인 트로페아 후작의 친척이 개혁청의 책임자가 되었다. 거의 모든 개혁청들이, 토지를 할당할 때, 토지 점거를 주도한 사람들이나 공산당 투사로 알려진 사람들을 내놓고 차별했다.
—p. 195
기민당이 물려받은 국가가 지닌 일련의 독특한 특징들은 기민당의 독자적 통치 양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차적으로 그 국가는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특징을 지녔다. 1859~70년 시기에 피에몬테 왕국이 이탈리아를 통일했을 때, 이탈리아 역사의 중핵을 이루었던 지역적 자율성과 지역 간 차이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로 말미암아 희생되었다. ......결정들을, 심지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결정들조차, 로마에서 내려야만 했고, 거기에서 핵심 장관은 내무・재무・법무장관이었다. 지역 사정을 좌우하는 것은 선출된 자치체 의회가 아니라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지사였다.
두 번째 특징은 이탈리아 행정부의 기능이 처음부터 법치국가라는 독일식 원칙에 근거했다는 점이다. 이 원칙에서는 합법성이 으뜸이다. 국가를 대변하는 활동은 모두 행정법을 틀 내에서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탈리아 관료제의 역사는 법률과 법규와 회람과 내부 지령의 공표를 통해 행정부 활동을 세세하게 규제한 역사이다. 그런 체계를 확립한 의도는 관료제의 자의적 권력에 맞서 시민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그 체계의 실제 귀결은 10만여 개의 법률과 지령이 행정부 활동을 규제하면서 빚어진 비길 데 없는 혼란이었으며, 하급직들이 구속을 벗어나 창의성을 발휘하려는 시도를 아예 하지 않는 상명하복의 공무원 조직 또한 그 체계의 소산이었다.
세 번째 특징은 공무원 조직이 곧 후견주의의 온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직업을 보장하고 특혜를 베풀며 개인 서류를 행정기관을 통해 신속히 처리하는 것 등의 이 모든 일들이 정치적 충성의 대가로 후견인에 의해 의뢰인에게 보장되었다.
—p. 213~214
서구 정당들 중에서도 독특하게 이탈리아 기민당은 1947년 이후로 줄곧 집권 여당이었다. 그 결과 기민당과 공화국은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의 융합을 보였다. 정치 평론가들은 상이한 표현들을 사용해서 이 현상을 묘사했다. 일각에서는 기민당이 국가권력을 “점령”했다고 말했다. 국가가 여당에 의해 “식민화”되었다고 언급한 평론가들도 있었다. 또 다른 평론가들은 당과 정부와 국가 사이의 ‘공생’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평론가들 모두가 기민당 권력의 연속성과 영속성이 본질적 요소임을, 그로 말미암아 당과 국가 사이에 불가피한 여파가 미쳤음을 포착했다.
그렇지만 집권의 영속성이 목적의 통일성과 조화롭지는 못했다. 1950년대에 발전된 모습 그대로의 기민당 전략을 조사해 보면, 그 전략이 적어도 세 수준, 즉 이데올로기 수준과 이해관계들의 대표 수준, 당 조직 수준에서 영속적인 긴장과 갈등이라는 특징을 보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전통적인 가톨릭교회의 사회 이론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나란히 놓이기가 쉽지 않다. 바티칸은 산업사회의 효과들을 일관되게 경고해 왔으며, 그래서 기민당원들은, 특히 도세티 분파에 속한 이들은 변화하는 사회에서 가톨릭 가치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연대, 자선, 연합, 가족과 약자와 빈민을 보호할 국가의 의무 등의 주제를 내세웠다. 하지만 기민당이 입으로만 이런 가치들과 이념들을 떠벌리는 사이에 실제 당의 다수파는 ‘근대화’의 대의를 전면적으로 옹호했다. 여기서 관건이 된 주제들이 힘을 얻는 데는 미국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개인과 기업의 자유, 기술 공학과 소비 자본주의의 무제한 발적, 자유롭게 작용하는 시장의 힘 등이 이에 해당되었다. 경제와 사회의 발전에 관한 자유방임 이념은 그렇게 가톨릭 통합주의 이념과 충돌했으니, 가톨릭 통합주의 이념에서는 사회가 가톨릭 가치들과 조응하고 그 가치들을 반영할 필요가 강조되었다.
두 번째 수준의 긴장은 기민당 내 계급 협조주의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자본의 이해관계와 도농 체티메디의 잡다한 부문들의 이해관계, 가톨릭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까지도 대변하려는 욕망은 자원들과 국가적 행동 방향을 놓고 벌이는 만성적인 전투를 낳았다. 여기에는 두 겹의 위험이 있었다. 즉 당이 너무 쉽게 산업계와 금융계의 엘리트들이 내건 명분히 우위를 점하게 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당이 모든 이해관계들에 동시에 복무하려고 하면서 위험한 부동 상태에 빠진 나머지 국가가 사회의 모든 부문별 요청들을 흡수하는 스펀지로 전락될 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선명한 전략을 가로막았던 음험한 요소는 당내 분파주의였다. 데가스페가 죽은 뒤로 기민당은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잘 조직된 분파들로 나뉜 당으로 진화해 갔다.
—p. 224~225
1956년은 이탈리아의 두 주요 좌파 정당에게 분수령이었다. 먼저 이탈리아공산당을 보면, 당 전략의 특정한 결정적 요소들이 당이 이해를 지내며 대결해야만 했던 위기에서 유래함을 볼 수 있다. 일차적으로, 1956년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당의 관계에서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의 모델이라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소련은 다른 당들의 복종을 명할 권리를 가졌다고 받아들이는 일은 영원히 사라졌다. 대신에 이탈리아공산당은 자율성을 주장했고, 더는 자신을 서구의 전초기지로 국한하지 않았으며, 더욱 유럽 중심적인 전망을 갖게 되었다. ......
둘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관한 당의 입장은 점진적으로 변화해 갔다. ‘프롤레타리아독재’ 개념이 공식적으로 포기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졸리티를 공격하는 1957년의 팸플릿에서, 루이지 론고는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변혁이 반드시 “이 변혁을 싫어하며 적대하는 세력들의 권리와 힘을 축소하고 마침내 폐지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 뒤 수년 내로 이 같은 정통 공산주의의 주장들은 점점 드물어졌다. 이를 대체한 것은 의회 민주주의에서 신성시되는 정치적이고 시민적인 자유들의 전술적 유용성이 아니라, 그 자유들의 영속적 가치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
셋째, 당의 문화적이고 지적인 분위기가 현저한 변화를 겪었다. 스탈린주의 시절에 지나치게 규율에 얽매이고 도덕주의적이며 폐쇄적이었던 작풍이 사라진 자리에 더욱 자유주의적인 접근이 들어섰으니, 동시에 서구 문화를 가리켜 ‘타락’ 운운하는 일이 줄어들었고 역사 연구가 협애한 당 도그마를 벗어날 수도 있었다. ......
마지막으로, 이탈리아공산당 안에서 일어난 조직상 변화를 언급해야 한다. 이런 변화들 역시 1956년 이전에 시작되었고, 아멘돌라는 당의 ‘혁신’ 기점을 1955년 1월에 있었던 제4차 조직회의로 잡았다. 톨리아티는 당의 노장 세대를 ‘총독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이 전설적인 지방 지도자들과 레지스탕스 영웅들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입당해 1956년의 위기 동안 지도부에 충성하게 될 소장파로 대체되었다. 나이 든 카리스마적 투사들이 지방에서 누렸던 자율성은 그들과 더불어 사라졌으며, 스탈린주의의 가장 경직된 형태들 역시 사라졌다. 그 결과 당은 더욱 중앙집중적이 되는 동시에 외부 세계에는 개방적이게 되었으니, 서로 충돌하는 이 특징들은 이탈리아공산당이 발전하기 어렵게 하는 근본적인 긴장들 중 하나를 제공했다.
—p. 301~302
밀라노 북부 배후지 소도시에서는, 이주자들이 주택 문제에 대응해 남다른 해법을 찾아냈으니, ‘코레’의 건축이 그것이었다. 이것은 이주자들 자신이 저축해서 장만한 작은 땅 위에다 설계 허가도 없이 밤마다 손수 지은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코레라는 이름은 필경 이것이 한국전쟁 시기에 처음 등장했다는 데서 나온 것 같다.
—p. 325~326
제3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공업화는 롬바르디아와 피에몬테의 대중심지에서 일어난 공업화와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포르토 마르게라와 라벤나 같은 주목할 만한 한두 군데 예외가 있었지만, 제3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공업화는 50명 이하를 고용하는 소기업이 주를 이뤘다는 특징을 보였다. 이 기업들은 의류, 제화, 가구 생산, 도자기와 가죽 제품 등 전통적인 부문에서 융성했다. 소기업들 중에는 좀 더 현대적인 공작기계 부문 및 대형 금속 가공 기업의 부품 생산을 맡은 기업들도 소수이지만 상당수 있었다. 거의 모든 소기업들이 고도로 유연했고, 시장에 신속하게 적응했으며, 점점 더 수출 지향적인 면모를 띠었다.
또한 그들의 발전은 지리적으로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제3의 이탈리아의 작고 개성적인 도시 다수가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초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역동적이었는데 새로운 번영의 시대에도 중심지가 되었다.
—p. 338
“나무를 쓰러뜨리기를 원한다면, 밧줄을 사용하는 것이 언제나 좋은 생각은 아니다. 너무 세게 끌어당기면 밧줄이 끊어질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나무 주위의 땅을 파서 나무가 쓰러지도록 만드는 것이 더 낫다. 지금은 이 나라의 반동적이고 보수적인 해관계들의 나무를 쓰러뜨려야 한다.”
—p. 378
새로운 정치적 연합이 수행할 개혁 프로그램의 정확한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실질적으로 상이한 세 가지 답변이 있었다. 첫 번째 답변은 개혁주의자들의 개혁이라는 표제로 가장 잘 요약될 수 있다. ......그들에게 자본주의란 강력하게 지지되어야만 하는 것이지만, 이탈리아 경제 발전 모델 특유의 왜곡과 불균형을 치유할 조치가 채택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일련의 교정적 개혁이 필요했다. 이런 개혁을 통해 남부의 빈곤 및 이탈리아 농업의 많은 부분이 처해 있는 후진성이라는 고질적 문제를 처리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또한 이 개혁을 통해 국가와 시민 관계의 변혁과 사적 소비와 사회적 소비의 불균형을 교정하고자 했다. 따라서 관료제가 더욱 능률적이 되고 부패에서 벗어나 정화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권역별 정부가 도입되어야 하고 지방정부를 철저히 뜯어고쳐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새로운 필요들에 대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주택과 학교 건설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져야 하고, 교육 체계는 근대화되어야 하며, 국가 사회보험과 보건 복지가 도입되어야 한다.
개혁에 대한 두 번째 입장은 아주 달랐다. 그 제안자들은 이탈리아공산당과 이탈리아사회당의 주요 인물들을 망라했는데, 중도-좌파를 지지했던 이들이나 반대했던 이들까지 모여 있어서, 톨리아티와 롬바르디가, 넨니와 바소가 들어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일련의 교정적 개혁이 아니라 구조적 개혁이 필요했다. 각 개혁들은, 그것이 농업과 주택과 교육 등 어느 분야의 개혁이든 간에, 사회주의로 가는 길의 디딤돌이 되어야만 했다. 개혁의 유효성은 개혁이 하층계급의 반자본주의 의식을 증진하고 그 계급이 지배계급이 되도록 대비하는 정도에 따라 평가되어야 했다. 따라서 구조적 개혁은 자본주의를 돕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고안되었다. 리카르도 롬바르디가 말했듯이, 제안되고 있던 것은 “‘혁명적 개혁주의’였고, 그것은 체계의 균형을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일련의 대항-권력을 창출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구조적 개혁은 지속적인 과정 중에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와 연계하는 일련의 중간 목표였다.
......마지막으로, 개혁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세 번째 입장은 최소주의적이라고 부를 법하다. 이는 도로테이 분파와, 종국에는 알도 모로 자신이 주창했다. 최소주의자들은 말로는 교정적 개혁 구상을 때로는 장황하게 떠벌렸지만 개혁주의 열기가 기민당의 통일성을 약화시킨다거나 혹은 개혁주의가 국가를 장악하는 사태에 대한 각오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교정적 개혁은 부차적인 목표였고, 환영할 일이기는 하나 언제든 당의 필요에 종속되어야만 했다. 이런 관점에서 중도-좌파는 이탈리아의 얼굴을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사회당을 변혁해 기민당 헤게모니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사회당을 정부로 들여오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p.383~386
오히려 진짜 질문은 왜 교정적 개혁이 성취되지 못했는지이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당시 사회당의 ‘자율’ 분파가 의회 안팎에서 고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그들은 기민당의 판파니 분파의 지지를 받았고 공화당과 사민당에게서는 더 일관된 지지를 받았지만, 그들이 규합할 수 있었던 힘은 1945~48년 시기에 좌파가 규합할 수 있었던 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 단계에서 이탈리아공산당은 교정적 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적극적인 캠페인을 펼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구조적 개혁과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기민당과의 연정을 전제로 시작될 수는 없으리라는 올바른 확신을 품고 있었다. CGIL 내부의 모든 공산당원들 및 다수의 사회당 소속 노조 활동가들이 이런 관점에 동의했다. 1964년 1월에 이탈리아사회당 좌파가 떨어져 나와 프롤레타리아통일사회당을 결성할 무렵, 넨니의 ‘개혁 군대’는 아주 미약한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의회 밖에서는 교정적 개혁을 방해하는 세력이 예상보다 더 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피아트, ENI, IRI는 모두 근대화와 정부 계획이라는 프로그램에 호의적인 듯했지만, 1962~68년 시기에 그들은 이탈리아 자본 전체에 헤게모니를 행사하지는 못했다. 도리어 겉으로는 덜 강력해 보이는 요소들이 우세했으니, 콘핀두스트리아와 이 단체를 지지했던 무수히 많은 소기업들, 전기 산업의 구독점체들과 이들이 통제했던 금융업자들 및 건설 투기꾼들이 그런 요소들이었다. 아마도 이 두 세계—‘진보적’ 자본의 세계와 ‘기생적’ 자본의 세계—는 개혁주의자들이 믿었던 것보다 훨씬 덜 분리되어 있었던 것 같다.
—p. 405~406
......베트남전쟁은 이탈리아인들의 한 세대 전체가 미국에 대해 생각했던 방식을 바꿔 놓았다. 1950년대에 아메리칸드림은 1960년대에 베트남 촌락에 퍼부어진 네이팜탄에 관한 뉴스 영화와 미국의 전쟁 기계에 대한 농민 저항의 사례가 전해지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유럽의 다른 곳에서도 그랬지만 이탈리아의 68에서도 가장 맣ㄴ이 되풀이된 슬로건 중 하나가 ‘하나, 둘, 셋, 더 많은 베트남을 창조하라’였다. 이 시기의 이탈리아 청년들에게 ‘진짜’ 미국은 다른 모습이었다. 대학가의 반전 시위, 캘리포니아의 코뮌들과 대항문화, 블랙파워 운동이 바로 그런 미국이었다.
그와 동시에, 사회주의를 성취하려는 새로운 모델이 1966~67년 시기에 중국의 문화혁명 경험에서 출현한 듯 보였다. 러시아의 위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사회주의 버전은 1940년대 이탈리아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는데, 이 버전과는 반대로 문화혁명은 이탈리아에서 자생적이고 반권위적인 대중적 저항운동으로 널리 해석되었다. 사회주의는 아래롭터 위로 재발명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중국 청년들에게 “당 중앙을 향해 포문을 열라.”고 독렸다. 이탈리아에서도 기성의 위계와 가치에 맞서 아래로부터의 ‘문화혁명’을 개시할 때가 무르익은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미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학생운동의 제3세계적 영감을 완결했다. 1967년 가을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가 죽자, 프랑스와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탈리아 학생들에게도 게바라는 가장 위대한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가톨릭 교리와 마르크스주의의 조화를 추구했던 급진적인 남미 사제들의 가르침이 이탈리아에서는 매우 특별한 반향을 얻었다. 이탈리아 대학가에서 벌어진 최초의 반역들이 강고하게 가톨릭적인 제도들 안에서 일어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p. 434~435
......폭력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는 좀 더 상세히 검토할 만한데, 특히 이후의 사태 전개를 감안할 때 그러하다. 운동은 처음에는 매우 평화적이어서, 운동을 옹호하는 이들이 옳게 지적한 대로 경찰이 대학 안에서 먼저 난폭하게 굴었기에 결국 그에 상응하는 난폭함이 초래되었던 것이지만, 이 대목으로부터 운동이 평화주의적이었으며 어쩔 수 없이 폭력적 태도를 취했다고 추론한다면 이는 사태를 호도하는 격이 되기 쉽다. 오히려 폭력은 불가피하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거의 문제시되지 않은 채로 운동의 가치와 행동 아나으로 들어왔다. 혁명가들의 정의로운 폭력이 자본가들의 폭력과 대립되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전쟁은 노, 게릴라활동은 예스’ 등의 슬로건들이 그 시대에 가장 인기를 끌었다.
—p. 441~442
변화가 필요했던 것은 체계였지, 체계의 일부가 아니었다.
—p. 445
개혁과 관련해, 이 시기의 정부 실적은 공화국 역사에서 가장 활발한 축에 드는 것으로, 부분적이기는 했어도 진정으로 건설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정부의 경제정책 전반에 대해서나, ‘뜨거운 가을’에 대한 고용주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국제경제 체제의 측면에서 보자면, 1969년 이후 시기를 특징짓는 것은 부담 신호의 증대였다. 대부분의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 과잉 축적과 경직된 노동시장은 임금을 끌어올리고 이윤을 위협하는 경향을 보였다. 1970년대 초반의 브레턴우즈 체제 붕괴와 달러화 가치 절하는 금융의 불확실성이라는 환경을 조성했다. 학생들이 반역에 나서고 노동자 투쟁이 폭발하면서 기업 신뢰도가 더 무너졌다.
이탈리아 당국은 1969년 말의 임금 상승 물결에 온건한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대처했다. 이런 식으로 당국은 1964년 이후에 벌어졌던 상황과 유사한 경제 상황, 즉 초과 노동의 퇴출, 공장 내 세력 균형의 급속한 재조정, 생산성 향상, 이윤 회복 등을 원했던 것이다.
—p. 477~478
......’경제 기적’ 이래로 이탈리아 사회 전반이 아주 상이한 궤도를 따르고 있었다. 이탈리아가 더욱 도시적이고 세속적이 되어 갈수록, 이탈리아는 전반적으로 1968년에 표면화된 가치들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경제 기적’의 이미지에 따라 형성되고 있던 사회는 원자화와 개인주의가 강조되는 사회였고, 또한 가족이라는 단위를 더욱 강화하는 사회였다. 실로 가족은 현대 이탈리아에서 필요를 충족해 주는 기본적인 단위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근대화는, 다른 많은 근대화들처럼, 집단적 책임감 혹은 집단행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었으며, 개발 가족들이 자기들 인생을 바꿀 수 있도록 근대화가 제공했던 바로 그 기회야말로 이탈리아 근대화의 기반이었다.
이 과정은 1968년이 되어서도 완결되려면 아직 멀었다. 여러모로 그 과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이탈리아의 ‘경제 기적’이 전적으로 비계획적인 성격을 지녔기에 심각한 불균형과 모순이 대두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10만 명의 이주자들이 북부에 당도했을 때, 이들은 적절한 주거 공간도, 자녀들을 보낼 온전한 학교도, 적절한 보건 서비스도 찾지 못했다. 그들 중 다수가 큰 공장이나 중간 규모 공장에서 구했던 노동의 유형은 그들의 소외를 강화하는 동시에 집단행동의 가능성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1968년 이후에 저변의 추세는 이런 모순들을 심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완화하는 방향이었다. 주요 기업의 고용주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신속하게 생산을 탈중앙집중화시켜서 노동계급을 파편화하고, 1968년에 출현했던 전투성의 중심들을 와해시키려 했다.
—p. 492~493
베를링구에르는 이런 경향들에 맞서고자 1943~1947년 시기에 반파시즘 세력들이 창출했던 것을 닮은 새로운 대연합을 제안했다. 사회적인 동맹과 아울러 정치적인 동맹도 필요하다고 했던 톨리아티를 인용하면서, 베를링구에르는 “폭넓고 단단한 직물 같은 단합”이 이것을 찢어 버리려는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 건재하다고 역설했다. 이 직물이 최근에 새로운 형태를 띠었으니, 그 형태의 가장 놀라운 면은 노조의 단합을 추동했다는 것이었다.
사회적 층위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은 체티메디의 다양한 부문들이 반동적인 호소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노동계급이 이들과 맺는 동맹이었다. 정치적인 층위에서는, 기민당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사회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서 51퍼센트를 득표한다고 해도 이 나라를 통치하기를 바랄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 베를링구에르의 유명한 주장이었다. 기민당은 “다양하고 가변적인 현실”을 표현하는 당이라 좌파와의 협력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기민당을 영원히 반동 쪽에 서는 “비역사적인 범주”로 간주할 이유가 없었다. 반대로 그 당은 중도-좌파의 시대에 진보 세력 쪽에 섰던 적이 있었고 매우 합성적인 사회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베를링구에르의 결론을 이러했다. “이 나라가 가진 문제들의 중대함, 반동적인 모험가들의 항존하는 위협, 마침내 민족경제 발전을 확고히 할 길을 열어야 할 필요, 사회적 혁신, 민주적 진보,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대다수의 이탈리아인들을 통합하고 대변하는 세력들이 새롭고 위대한 ‘역사적 타협’이라 정의될 법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요하고 적절한 것이 되었다.”
—p. 511~512
......가톨릭과 공산당의 도덕성이 사회주의로의 길에서 만난다는 베를링구에르의 원대한 설계에 비춰 보면 역사적 타협에는 흠이 많았다. 첫째, 그것은 기민당에 대한 관념론적 평가에 근거한 것이었다. 기민당은 변할 수 있으며 1945년 이후로 변해 왔다고 말하는 것이야 베를링구에르가 그랬듯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나, 냉철하게 분석해 봤다면 그는 기민당이 좋은 방향으로 변하지는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톨리아티가 데가스페리와의 타협을 시도했던 1945년의 기민당은 새로운 당이었고 아직 국가 바깥에 있었으며 강령에는 약간의 급진적인 특색도 있었다. 30년 뒤에 이 당은 더는 그렇지 않았다. 1970년대 초가 되면 기민당은 국가를 점유하고 변형시켰으며, 이탈리아에서 자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정당을 대표하게 된다. 그런 기민당은 베를링구에르 프로젝트의 대립물이었다.
둘째, 베를링구에르가 이탈리아인들을 향해 더 정의롭고 더 집단주의적이면서 더 검소한 사회를 이룩하자고 호소하는 것이 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그 호소는 1945년 이후 이탈리아 사회에서 벌어졌던 근원적인 변화와 심층적으로 조율되지 않았다. 우리가 보았듯이 1950년대 후반 이후의 대량 이주는 집단주의를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국가에 의해 조장되거나 규제된 것도 아니었다. 이주는 전형적으로 가족 차원의 사안이었고, 이주하는 핵가족은 저마다 고된 과도기에 살아남아 번창하기 위해 자기들 나름의 네트워크를 사용하려 애썼다. 새로운 이탈리아의 갖어들은 자신들의 성공 정도를 물질적이고 소비적인 견지에서 쟀다. 그러니 새로운 집단주의적 검소함에 대해 호소는 그 원천이 무엇이고 그 함의가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몰이해에 맞닥뜨리기 마련이었다. 평범한 이탈리아인에게, 베를링구에르의 청교도적 비전은 아마도 존중할 수는 있을지라도 환영할 만한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베를링구에르의 프로젝트는 너무 흐릿했다. 이 시기 내내 그가 역설했던 것은 이탈리아공산당의 사회주의를 향한 제3의 길이 이룩할 독특한 공헌이었으니, 그 길은 사민주의를 따르지도, 러시아 모델을 따르지도 않는 길이었다. 1978년에 그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탈리아 공산당과 달리 유럽 사민주의는 진정으로 변혁적이고 혁신적인 정책이 아니라 개혁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에서 가장 거슬리는 불공정들과 모순들을 언제나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 안에서 약화시키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 개혁주의와 뚜렷하게 구별될 수 있을 이행 프로그램에 대한 베를링구에르 자신의 기여는 미미했다. 그의 연설에는 “사회주의 이상의 일부 요소”를 도입할 필요가 언급되었지만, 결코 이론적 정교화가 동반된 것은 아니었다.
—p. 513~515
그들은 또한 한층 더 총론적인 정치도 제시했다. 그 핵심에는 전미여성기구가 처음 지어낸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슬로건이 있었다. 해방은 혁명 이후로 미루어져서는 안 되며, 사적인 것의 영역 안에서, 여성들과 남성들과 아이들 사이의 일상적 관계 안에서 시작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실은, 지금 여기를, 개인적인 것을 변혁함으로써만 비로소 나중에 더 전면적인 변혁을 성취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당시에 ‘미리 형상화하는 정치’라 불렸던 이것은 혁명적 그룹들의 실천에 대한 반명제였으니, 혁명적 그룹들에게는 개인적 관계가 궁극적인 급진적 변화라는 더 큰 목표에 종속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p. 531
이탈리아 공산당과 이탈리아 청년 부문의 일부 사이에 간극이 벌어진 이유들은 정치적일뿐더러 사회경제적이기도 했다. 위기가 의미했던 것은 육체노동 부문과 정신노동 부문을 가릴 것 없이 늘어나는 실업이었다. 사실상 청년들에게 두 부문 사이의 간격은 축소되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가 고등교육을 받았고, 개혁이 부재한 대학은 점점 더 과밀해졌으며, 교육 터널의 끝에서 일자리는 점점 더 줄었다. 차별화된 청년운동이 주요 도시에서 발전했다. 전통적 정치에 반감을 품었고, 주변적인 노동 혹은 임시 노동 말고는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고 구할 의향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스타레 인시에메’(함께 있음)를 열망하면서 스스로 즐겼던, 1977년 운동 당시의 청년들은 1968년의 이상주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선배들과 근원적으로 달랐다. 이 운동은 참여자들의 필요에서 시작되었다. 가령 ‘자율 인하’ 운동을 벌이더라도, 가족의 전기요금이 아니라 팝 콘서트 티켓 가격을 삭감하는 식이었다.
......넓게 보자면, 1977년 운동에는 종종 얽히기는 했어도 대체로 식별할 수 있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자생적’이고 ‘창의적’이며, 페미니즘 담론에 동조적이었고, 냉소적이면서 엉뚱했으며, 당국자에게 도전하기보다는 대안적 구조를 추구하는 흐름이었다. 인디언처럼 몸과 얼굴에 물감을 칠하고 산업사회를 거부하던 ‘메트로폴리탄 인디언’이 이런 경향의 가장 생생한 대표자였다. 다른 하나는 ‘자율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흐름이었다. 그것은 이전 시기의 폭력 문화에 입각해, 국가에 맞서는 전투를 위한 ‘새로운 사회적 주체들’을 조직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p. 550~551
사회주의로의 ‘제3의 길’을 진지하게 논할 때마다 그 핵심에 놓여 있는 다음과 같은 낡은 수수께끼들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즉 노동계급 운동의 승리들을 파괴하지 않고서도 경제가 회복되고 번창할 수 있었는가? 이윤과 노동자 권한의 증대가 어떤 식으로든 양립할 수 있었는가? 이탈리아의 1976~79년 경험으로부터 답한다면, 만약 그것을 답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 답은 너무나 간단히 ‘아니오’이다.
—p. 562~563
......안드레오티와 베를링구에르의 협력은 데가스페리와 톨리아티의 협력과 당혹스러운 평행을 이루었다. 두 경우 모두 공산당은 종속적인 위치에서 개혁을 관철시켜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부여받았다. 결국 공산당은 적의 우월한 국정술에 눌려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굴절시켰다.
......국민 연대 시절은 또 다른 세 가지 주요 결과를 낳았다. 1969년 이래 개혁주의 주춤했던 주된 책임은 포스트 68 저항운동에 있었는데, 이 운동은 애초의 의도와 거의 반대로 나아갔다. ......집단적 목표를 포기하고 ‘리플루소’가 승리한 데는 테러리즘에 막대한 책임이 있다. 테러리즘은 사회적 저항에서 정치적 공간을 모두 박탈했고, 현상 유지냐 무장집단이냐의 선택만을 유일하게 가능한 선택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좌파 정당과 노조 진영이 제공하는 정치적 매개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에도 책임이 있다. 이 시절 좌파가 포착하지 못했던 한 가지가 바로 저항과 개혁의 연쇄였다.
둘째, 기민당과의 지속적 동맹을 추구하는 가운데, 베를링구에르의 이탈리아공산당은 사회당을 너무 간과하고 과소평가했다. ......이탈리아사회당은 이탈리아 정치에서 ‘중도’를 자처하는 데 익숙했다. 이런 역할이 ‘역사적 타협’ 동안에 심각한 위협을 받았고, 베티노 크락시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 교훈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긍정적인 지적을 하며 끝을 맺자면, 알도 모로가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사망한 일이나 그 전후에 있었던 일들이 공화국을 ‘재건’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 일들이 헛되이 흘러가 버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안니 디 피옴보’(총탄의 시절)는 폭력에 대한 모든 세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지닌 태도에 상전벽해 같은 변화를 낳았다. 살인이 연달아 일어나자, ‘혁명적’ 폭력에 대한 옹호가, 68운동에서 그토록 통합적인 부분을 이뤘던 그 태도가 이탈리아 청년들의 뇌리에서 빠져나갔다. 그 10년의 끝에 이르러 공화국의 형평과 민주주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런 문제들과 대결하는 하나의 길은 삭제되었던 것이다.
—p. 578~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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