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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때에 알맞는 작품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을 읽기 전 접했던 밀란 쿤데라의 작품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전부인데, 그 책을 읽었던 스무살 무렵에는 밀란 쿤데라의 작품이 마냥 난해하기만 했다. 대단한 의미도 없는 내용들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거창한 허울 안에 욱여넣은 작품으로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정도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봐도 처음 접한 밀란 쿤데라의 작품에 대해서 떠오르는 것이 많지 않다. 그런데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나 다시 마주한 밀란 쿤데라의 작품에서는 스무살 무렵에 느꼈던 위화감이나 어색함이 없다. 야로밀이라는 청년의 이야기를 쫓아가면서 나의 지난날들을 반추하는 게 어렵지가 않다. 달리 말해서 이제 와 보니 밀란 쿤데라의 이야기는 내게 더 이상 어렵지 않른 것이 되어 있었다. 오히려 공감하고 빠져들 만한 대목으로 가득하다.
La vie est ailleurs. 소설은 야로밀이라는 어느 청년 또는 시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책을 다 덮을 즈음 야로밀을 시인에 빗댄 까닭을 헤아릴 수 있다. ‘시인’은 곧 ‘젊음’ 또는 ‘청춘’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반면 소설의 후반부부터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수위 아들’과 ‘사십 대 남성’은 ‘시인’의 반대 지점에서 ‘늙음’ 또는 ‘노년’ 또는 '기성(旣成)'을 가리킨다.
젊음과 늙음의 비유는 단지 육체적이고 신체적인 범위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비유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것까지 함께 아우른다. 예를 들어 밀란 쿤데라의 소설 속에서 젊은이들은 ‘일원론자’다. 그들은 절대적인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른다. 이상적이다. 소설 속에서 야로밀은 본인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유년, 노년, 죽음을 마치 자신이 모두 겪은 것처럼 "인위적(p.222)"인 언어로 집약시킨다. 야로밀이 시작에 몰두하는 모습은 설령 실재가 결여되어도 추상적 관념을 열렬히 좇을 수 있는 젊은이들의 감수성과 열정을 보여준다. 그렇게 본다면, 나이를 들어가는 이들은 그 반대 지점에서 ‘다원론자’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이들이나 시인들처럼 꿈과 현실을 조응시키는 것에 별달리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유연하지만 열정이 부재하다.
소설 속의 또 다른 비유를 따르자면 '불꽃과 물 사이'의 구별로도 이해될 수 있는 젊음과 노년, 이 차이는 야로밀과 사십 대 남성이 빨간 머리 소녀를 중간에 두고 ‘사랑하는 방식’에서 잘 나타난다. 야로밀에게 빨간 머리 소녀는 야로밀 자신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빨간 머리 소녀가 죽는다는 것이고, 빨간 머리 소녀가 죽는다는 것은 야로밀 자신이 죽는 것이다. 둘 중 하나가 빠진 불완전한 사랑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런 사랑이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지 진정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야로밀의 태도는 고등학생이던 당시 여대생과 연애하면서 보였던 태도와 비교할 때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진정한 사랑을 여러 차례 강조하는 여대생에게 야로밀은 반문한다. "절대적인 사랑이란 ......그 사람이 지닌 모든 것과 함께, 그림자까지도 함께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p.227)"하고. 결국 서로 거리를 좁히지 못한 야로밀과 여대생의 연애는 그렇게 진전없이 지지부진하게 끝나고 만다. 그런 야로밀이 처음으로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준 빨간 머리 소녀에게 완전무고한 사랑을 강요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일 것이다. 이처럼 유년에서 성년으로 접어듦에 따라 야로밀은 더욱 티끌 하나 없는 추상적 가치들과 숭고한 것들에 점점 매달리기 시작한다.
반면에 익명의 사십 대 남성이 빨간 머리 소녀를 대하는 태도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도 젊음-나이듦의 비교에 도움이 될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 혁명의 도가니 속에서 본인이 향유해 왔던 사상적 자유를 내려놓은, 그러니까 현실과 타협해버린 그는 빨간 머리 소녀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느슨한 관계에 만족한다. 물론 그런 그라도 빨간 머리 소녀가 겪는 비극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보낸다. 이러한 중년 남성의 태도는 청년 야로밀의 그것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한쪽에는 절대적인 사랑으로 치닫는 한 청년, 다른 한쪽에는 측은한 마음을 보냄으로써 자신의 관심을 확인하는 나이든 남성.
한편 야로밀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이상적 세계는 ‘자비에’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구현된다. 남녀의 결합과 애증이 이야기의 큰 물줄기를 이루는 이 소설에서 자비에는 유일한 양성적(兩性的) 존재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구애하는 남성으로 등장하지만 소설의 끝에 가서는 야로밀의 회유하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그런 자비에는 혁명단의 일원으로서 혁명의 완수라는 임무를 띠고 있다. 그리고 소설 중에는 자비에의 세계관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그는 저울의 양쪽 접시 한쪽에는 자기 삶을 놓고 다른 쪽에는 죽음을 놓고자 했다.(p.129)” 자비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힘껏 삶에 부딪치는 인물이고, 야로밀은 상상 속에서 자비에를 자신을 투영시키고 있다.
하지만 야로밀이 어린 티를 벗고 어엿한 성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녹록지 않다. 소설에는 이르지 오르텐의 구절을 빌려 “남자가 되어야 할 때다(p.152)”라고 선언한다. 한 세계의 경계를 넘어 다른 세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쓴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인의 문턱에 서 있는 야로밀에게 짧은 연애를 허락한 예의 여대생은 그에게 ‘에페보스(ἔφηβος)’라는 애칭을 붙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과도기적 훈련을 마친 젊은이들을 일컫던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야로밀의 머릿속을 줄곧 지배하는 죽음의 이미지는 “삶이 진행되는 죽음(p.166)”이기도 하다. 삶의 또 다른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마치 위치 에너지의 변화가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듯, 죽음이라는 계수가 따라붙는다. 하나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것은, 죽음에서 죽음으로, 꿈에서 꿈으로, 현실에서 현실로 비집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세상에 정면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 그것은 세상 속으로 가 버린다는 것과 전혀 같지 않다.(p.271)”
자유를 희구(希求)하는 야로밀에게 필요한 것은 강력한 용기다. 그 용기가 빚어내는 긴장관계는 야로밀과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모성 안에서 안전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속박됨을 느낀다. 야로밀은 모성으로부터 강력한 척력과 인력을 동시에 감지한다. 그리고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두 가지의 힘을 조화시키는 데 실패하며 최후를 맞이한다. 유년에서 성년으로 도항(渡航) 중이던 그의 여정은 어느 순간 정지한다.
야로밀이 맞이할 결말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소설의 도입부에는 ‘말(言)’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던 야로밀이 꼬마였을 때 한 일화가 다뤄진다. 친구와 함께 간 병원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마주한다. 조잘조잘 지적 편력을 늘어놓는 어린 꼬마를 어른들은 성가시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세계는 그에게 온화하게 대하면서도 아직은 그 속에 자기 자리를 지니지 못한 사람 대하듯 했다.(p.236)”
그럼에도 야로밀은 부단히 노력했다. 48년 혁명의 가치를 제창하고, 그 안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타인과의 접점을 모색했다. 하지만 절망적이기까지 한 야로밀의 시도는 번번이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자신이 동경했던 시인과 끝내 연락 닿을 수 없었던 일(그래서 수화기 스무 개를 끊어 소포를 보낸 일), 당 기관지에 자신의 시를 적극적으로 홍보할 수 없었던 일, 빨간 머리 소녀와의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았던 일까지.
68년 혁명에 들뜬 청년들을 바라보는 노학자(야로밀이 동경했던 바로 그 시인)는 “자유는 시의 의무이며 은유 또한 싸워서 지켜야만 하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외쳤다.(p.284)” 하지만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경도(傾倒)되어 있던 군중으로써의 청년들은 그런 그에게 야유와 조롱을 보낸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승리와 힘을 확신한다. 젊은이들은 무리 속에서 뜨거운 열기를 서로 확인하고, 늙어버린 자는 홀로 메마르고 쓸쓸한 공기를 마주한다.
그런데 우리의 청년 야로밀은 어떠했는가? 노년의 시인을 선망했다가, 시기하고, 마침내 궁지에 몰아세우는 야로밀의 모습에서는 불안정함이 느껴진다. 애착과 불안 사이에서 초조하게 진자 운동을 되풀이하던 야로밀은 마침에 산화(酸化)한다. 남다른 방식이 아닌 그저그런 방식으로, 불꽃이 아닌 물속으로. 야로밀의 젊음과 그가 추구했던 이상향은 무엇을 뜻하는가? 고결함과 비루함이 무엇이 다른가? 우리의 삶은 다른 곳에 있는가? [fin]
……어머니의 몸은 이제 자기 역사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 참이었다. 그 몸은 타인의 눈에 대한 몸이기를 그쳤고, 아직 눈을 가지지 않은 누군가를 위한 몸이었다. 외부의 표면은 이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몸은 내부 장기로, 아직 아무의 눈에도 보인 적 없는 다른 몸에 가닿고 있었다. 외부 세계의 눈들은 그러니까 비본질적인 모양만을 포착할 수 있을 뿐이었고 ……몸은 마침내 독립성에, 그리고 완전한 자율성에 도달하게 되었다. 점점 불러 오고 보기 흉해져 가는 배는 이 몸에게는 끊임없이 커져 가는 자부심의 저장고였다.
—p. 19
“제일 나쁜 건 세상이 자유롭지 않은 게 아니라 인간이 자유가 뭔지 잊어버렸다는 거야.”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 자신의 삶만이라도 바꾸고 그 삶을 좀 자유롭게 살자고.” …….“모든 삶이 유일하다면 결과도 그렇게 만들자니까. 새롭지 않은 건 다 던져 버리자고.”
—p 72~73
자비에는 자기가 리스트를 잊어버렸고 자신의 과오를 씻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위험한 상황에 나서게 한 건 단지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삶을 반쪽짜리 삶으로 만들고 사람을 반쪽짜리 사람으로 만드는 비루함을 혐오했다. 그는 저울의 양쪽 접시 한쪽에는 자기 삶을 놓고 다른 쪽에는 죽음을 놓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이, 즉 자기 인생의 매일, 매시간, 매 순간이 죽음이라는 최고의 기준에 의거해 측정되길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행렬 선두에 서기를, 심연 위에 놓인 줄을 타기를, 머리에 총탄의 후광을 지니기를, 그리하여 모든 이들의 눈에 위대해지고 죽음이 무한하듯 무한해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p. 129
그의 시에는 자연히 일어나는 보기 싫은 모습들로 가득하다. 야로밀은 누렇게 변한 이도 잊지 않았고 눈가의 눈곱도, 축 늘어진 배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세세한 것들을 드러낸 저 뒤편에는 사랑을 영원한 것으로, 무너뜨릴 수 없는 것으로, 어머니의 품과 대치할 수 있는 것으로, 중심 오로지 중심일 뿐인 것으로, 육체의 힘, 사자들이 사는 미지의 영토처럼 그의 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그 믿을 수 없는 육체의 힘을 넘어설 수 있는 것으로 제한하고자 하는 그런 가슴 뭉클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p. 222
“절대적인 사랑이란 무엇보다 우선 상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이고, 그 사람이 지닌 모든 것과 함게, 그림자까지도 함께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p. 227
그렇게 그는 엄마의 마스크를 덮어 쓰고 그곳에, 어른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엄마는 그를 품에 꼭 끌어안고 이 세계, 그가 속하고 싶어하는 이 세계에서 그를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자기 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이 세계는 그에게 온화하게 대하면서도 아직은 그 속에 자기 자리를 지니지 못한 사람 대하듯 했다. 이런 상황이 정말 너무도 견딜 수가 없어서 야로밀은 머리를 흔들어 어머니의 마스크를 떨어내려고 온 힘을 그러모았다.
—p. 235~236
하지만 시보다 더 귀한 다른 것이 있었다. 그가 아직 지니지 못한 것, 저 멀리 있는 것, 그가 갈망하는 것, 그것은 남자다움이었다. 행동과 용기를 통해서만 거기에 다가갈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용기란 것이, 버림받는 것에 대한 용기, 모든 것으로부터, 사랑하는 여자, 화가, 심지어 자신의 시에게서도 버림받는 데 대한 용기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래 좋다, 그는 이 용기를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 저는 혁명이 이런 시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요. 아쉽죠. 그 시들을 사랑하니까요. 하지만 제가 아쉬워한다고 해서 그 시들이 쓸데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반박할 수 있는 건 불행히도 아니지요.”
—p. 239~240
삶은 다른 곳에. ……꿈은 현실이다라고 학생들은 벽에다 써 놓았지만 오히려 진실은 그 반대같아 보인다. 그 현실, (바리케이드, 잘린 나무들, 붉은 깃발들) 그것은 꿈이었다.
—p. 291~292
……움직임을 나타내는 가장 시적인 도구, 날개가 그의 시들 속에 수없이 많이 나왔다. 그 시에서 밤은 소리 없는 날갯짓으로 가득했다. 욕망, 슬픔, 심지어 증오까지, 그리고 시간 역시, 이 모든 것에 날개가 있었다.
이 모든 말 속에 숨어 있는 것, 그것은 끝없는 포옹에 대한 욕망이었다. 이 표현 속에는 실러의 저 유명한 시구, Seid umschlungen, Millonen, diesen Kuss der ganzen Welt! 가 되살아나는 듯하다. 끝없는 포옹은 단지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포함하고 있었다. 여정의 목적지는 단지 파업 중인 마르세유일 뿐 아니라 또한 미래, 저 머나먼 기적의 섬이었다.
—p. 323
이 장면은 미성숙의 근원적 상황을 나타낸다. 서정성은 이 상황에 맞서기 위한 시도다. 안전한 유년의 닫힌 공간에서 추방되면서 사람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를 욕망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 세상이 무섭기 때문에 자신의 시로 인공적인 대체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는 행성들이 태양 둘레를 돌듯 자기 시들이 자신의 주위를 돌게 한다. 그는 무엇도 낯설지 않은 작은 우주,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자신의 영혼만으로 만들어져 있으므로 태중 아이처럼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작은 우주의 중심이 된다. 여기에서 그는 바깥에서는 그토록 어려운 것을 모두 이루어 낼 수 있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몸속에서는 행복했으나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가혹한 죽음, 빛과 무서운 얼굴들로 가득한 죽음으로 느끼며, 그래서 뒤로, 어머니 안으로, 매우 감미로운 그 향기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젊은이는 어머니 몸 안에서 자기 혼자 가득 채우고 있던 이 우주의 안전함과 단일성에 대한 향수를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으며, 또한 이타성의 망망대해 속 한 방울 물처럼 흔적도 없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어른들의 상대성의 세상 앞에서 불안을 (또는 분노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열렬한 일원론자이며 절대성의 메신저인 것이다.
—p. 360~361
알코올처럼 머리로 솟구쳐 오르는 분노는 아름다웠고 그를 매혹했다. 그것은 아가씨에 의해 반사되어 그에게로 돌아오고 그리하여 그 자신에게 상처를 주기에 더욱 더 그를 매혹했다. 빨간 머리 아가씨를 밀쳐 냄으로써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자기 여자를 밀쳐 내 버리는 것임을 그 스스로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자기 파괴적인 분노였다. 그는 분명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지 못하며 그녀에게 부당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걸 아는 탓에 어쩌면 더욱 더 잔인해졌는데, 왜냐하면 그를 끌어당기는 것, 그것은 바로 심연이었기 때문이다. 고독의 심연, 자기 비난의 심연.
—p. 408~409
……문득 그의 손바닥에 빨간 머리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이 느껴졌다. 그것은 경이로웠다. 한 여자가 그를 위해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것, 그것은 그에게 아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이 눈물은 그에게, 남자가 그저 남자로 만족하고자 하지 않고 자기 본성의 한계를 넘어서길 갈망할 때 그 속에 융해되어 버리는 물질이었다. 그는 남자가 눈물의 중개로 자신의 물질적 본성에서,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고, 저 멀리의 것들과 일체를 이루어 광막한 무한이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적시는 눈물에 굉장히 감동했고 문득 자신도 울고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사랑을 나누며 온몸과 얼굴이 푹 젖었고, 사랑을 나누며 실은 서로에게 녹아들었으며, 체액이 섞여 마치 두 줄기 강물처럼 하나로 모여들어 흘렀고, 그들은 눈물 흘리고 사랑을 나누며 지금 이 순간 세상의 바깥에 있었으며, 마치 땅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호수와 같았다.
—p. 415
어떤 시인이 자신의 죽음을 꿈꾸어 보지 않았겠는가? 어떤 시인이 그것을 상상해 보지 않았겠는가? 아! 죽어야만 한다면, 내 사랑, 그대와 함께이기를, 또한 오직 빛과 열기로 화한 불길 속에서이기를…… 야로밀이 불길 속에서 자신이 죽으리라 상상하게 한 것이 단지 우연의 작용이라 생각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죽음은 하나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말한다. 죽는다는 행위에는 자기 고유의 의미론이 있으며, 한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요소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는가를 아는 일은 중요하다.
—p. 475
……레르몬토프, 너의 삶은 명예라는 그 하찮은 도깨비불보다 더 귀하다.
뭐라고? 명예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고?
그래, 레르몬토프, 너의 삶, 너의 작품.
아니, 명예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명예는 네 허영심의 허기일 뿐이다, 레르몬토프. 명예는 거울의 환상이며, 명예는 내일이면 여기 존재하지 않을 이 무의미한 관객을 위한 공연일 뿐!
그러나 레르몬토프는 젊고, 그가 살고 있는 순간순간들은 영원과 같으며, 그를 쳐다보고 있는 이 몇 신사 숙녀들은 세상이라는 대강당이다! 그가 이 세상을 사나이답게 굳센 걸음으로 걸어 나가느냐, 아니면 살아갈 자격도 없게 되느냐, 둘 중 하나인 것!
—p. 490~491
……자살은 비극적이나 실패한 자살은 우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 무슨 기이한 문장이란 말인가! 어떤 자살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행위이며, 동일한 이유와 동일한 용기로 행해진 행위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비극적인 것과 우스꽝스러운 것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오로지 성공이라는 우연에? 비루함과 위대함을 구별 짓는 것은 무엇인가? 말해 보라, 레르몬토프! 단지 부수적인 것들? 권총이냐 엉덩이 걷어차기냐? 단지 역사가 인간의 모험에 부과하는 배경?)
—p. 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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