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년도 한 대학에서 토마 피케티의 초청강연이 있었을 때 그의 강연을 직접 들으러 간 적이 있다. 그의 책 『21세기 자본』이 출간된지 얼마 되지 않아 책을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호기심만으로 강연 참석을 신청했다. 그리고 운좋게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프랑스어 발음이 섞인 토마 피케티의 영어를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자막으로 동시통역이 진행되었지만 영화도 아닌 강연에서 강연자와 자막을 함께 봐야 하는 상황은 산만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그의 연구주제에 관한 흥미는 흐지부지되고 구매했던 책은 7년 가까이 책장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7년이 지나서 『21세기 자본』을 집어든 건 근래 '불평등' 또는 '양극화'라는 주제로 여러 텍스트를 읽으면서 좀 더 깊이 있는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21세기 자본』이 조명을 받은 이후로, 우리 사회에서 노동소득이 자본소득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명제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영끌과 빚투를 통해서라도 자본소득의 지분을 조금이라도 늘려보려는 대학생들과 사회초년생들의 투자열풍은 이 명제에 잘 부합한다. 하지만 토마 피케티의 이야기는 요약된 명제 선에서 일단락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 혁명 이래로 역사적 사실이 증명해 주듯이 소자본가들—이를 '개미투자자'들에 빗대도 괜찮을까—이 용을 쓰고 투자에 참여해도 상위 10%가 불리는 부의 규모를 따라갈 수는 없다. 또한 상위 10%는 그 안에서 상위 1%의 부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리고 그 1%는 0.1%만큼 자본소득을 올리지 못한다.
상황을 한층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오늘날 상위 10%에 속하는 이들은 단지 자본소득만 높을 뿐만 아니라 근로소득 또한 높다는 점이다. 이것이 토마 피케티가 말하는 벨 에포크 시대의 자산가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자산가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이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기 이전에 경제수준 상위 10%는 전체 국부의 90%를 차지했는데, 이들이 이처럼 높은 부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으로 자본소득 덕분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자본소득을 구성하던 것은 대개 국채와 토지 임대료였다.
하지만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벨 에포크의 자산가들에게 확실한 부를 보장해주었던 경제구조는 급속히 바뀌었다. 산업구조는 농업에서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이행했고, 공공자본은 거의 제로로 수렴한 반면 이를 대체한 민간자본이 급격히 팽창했다. 토지 임대료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은 낮아진 반면 부동산의 가치가 뛰었고, 국채의 이율은 하락한 반면 주식이나 파생상품을 비롯한 대체자본의 수익성이 높아졌다. 즉 자산가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자본은 한 세기에 걸쳐 그 구성이 완전히 달라졌다.
문제 #1. 극소수의 초자본가 vs. 소수의 일하는 자본가
벨 에포크에는 극소수의 귀족 또는 초상류층이 전체 부를 독식했다. 이들의 수는 인구 구성의 채 1%도 되지 않았다. 반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과거와 같이 배타적인 지위를 갖는 집단 또는 신분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좀 더 많은 수의 자본가들이 과거보다 조금 적은 수준의 자본소득을 나눠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돌아가는 부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크다.) 게다가 이른바 '수퍼리치'라 불리는 이들은 직장을 가지고 안정적인 근로소득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CEO, 투자은행 또는 로펌의 유명 컨설턴트나 변호사들은 그러한 사례다. 이런 측면은 노동을 멀리하고 심지어 노동을 경멸했던 벨 에포크의 귀족들과는 분명 다른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수준 하위 50%가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 자본소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벨 에포크나 오늘날이나 동일하다. 게다가 오늘날과 같은 능력주의 본위의 사회에서 일하는 수퍼리치(working superrich)들이 챙기는 소득이 부당하다고 말한 근거는 논리적으로 찾기 어렵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따를 때, 가령 컨베이어벨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보다 CEO가 3000배에 달하는 생산효용성을 갖추고 있는지 환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업의 고위임원진들이 받는 보수는 그들의 능력치에 대한 합당한 지불로 구성원들에게 받아들여진다.
벨 에포크에도 그러했듯,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지위가 세습된다는 것이다. 토마 피케티가 '세습중산층'이라는 표현을 쓰다시피 자본의 세습은 비단 상류층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걸친 현상이다. 자본소득을 얼마나 물려받는지가 장래의 지위를 결정한다. 벨 에포크에 상류층이 즐겼던 유희적인 삶은 양차 대전이라는 파괴적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아직까지 이어졌을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양차 대전이 종료되고 국가가 급속히 재건되는 과정에서 벨 에포크의 귀족에 비견될 만한 자본가들이 새로이 성장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자본의 세습적인 성격과 관련하여 책에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인구성장률, 경제성장률, 상속자본에 관한 부분이다. 인구성장률과 경제성장률은 β=s/g라는 공식에서 g로 표현되는 부분인데(여기서 β는 자본/소득 비율을, s는 저축률을 나타낸다), g가 분모에 위치하므로 g가 낮아질 수록 자본/소득 비율은 올라간다. 문제는 발전 단계가 완료에 접어든 많은 선진국가에서는 벌써 저성장에 돌입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이 변화하고 고령화가 진행됨에 따라 출산율 또한 낮아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과거와 동일한 양의 자본을 유보(저축)한다고 하더라도 성장이 더디고 인구가 감소하는 사회에서는 자본/소득 비율이 높아지고 자본의 세습적 성격이 강화된다.
특히 고령화와 더불어 죽은 이들의 자본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자본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지정상속세가 폐지되고 상속의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이 상속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역사적으로 이례적일 만큼 고도 성장을 경험한 베이비붐 세대는 축적된 생애소득이 적은 젊은이들보다 더 많은 부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으로는 이전 세대에서 후세대로의 자본 이전이 상속이라는 형태에서 신탁 또는 증여라는 형태로 변모하면서, 자녀의 문화자본과 부동산 구입 시기를 결정하는 커다란 동력으로 작동한다.
결국 자본의 세습은 19세기나 20세기나 내용 면에서 달라졌을 뿐 그 기본적인 틀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21세기에도 지속될 현상으로 보이는데, 20세기 초 대공황에 견줄 만한 팬데믹 상황을 거치면서 잠시 숨을 고르던 주식시장은 다시 몸집을 불릴 곳을 찾아 거침없이 튀어오르는 것 같다.
문제 #2. 민주주의, 능력주의, 자본주의 그 사이의 어딘가
선술했다시피 어쩌면 베이비붐 세대가 누렸던 고도성장과 풍부한 신분상승의 기회는 긴 역사를 놓고 보았을 때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피케티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국부가 팽창하기 직전까지 서구 사회의 경제성장률은 사실상 제로에 수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피케티는 고도성장을 구가했던 전후 프랑스 사회를 '30년의 황금기'로 소개하는데,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20년'—이제는 30년을 향해 가고 있다—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많은 선진국들이 고도성장 이후 저성장 시기에 접어들면서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는 건 공통된 부분인 것 같다. 이는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현실 앞에서도 청년들이 불평등한 사회에 허망함을 느끼고 자조하는 것은, 민주화된 시대 속에 성장하면서 젊은이들은 뇌리 속에 각인된 민주적 가치와 능력주의에 대한 신념도 한몫 한다. 우리는 자라오면서 누구에게나 계층이동의 기회가 주어져 있고, 스스로 노력하고 준비하면 그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배워왔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이 이제 와서 틀리다고 부정하는 것은 뒤늦게 자신이 패자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 되어, 더 나은 직장과 더 나은 처우를 찾아 더욱 매진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경제구조는 근로소득으로 자본소득의 결핍을 만회할 수 없는 경색 국면으로 돌입했고, 미디어 속 몇몇 성공담은 여전히 성공기회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피케티의 말을 따르면—사실은 이미 많은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이지만—학력 프리미엄의 저하로 과거 고졸이 하던 업무를 갖기 위해서는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고, 그보다 더 전문적인 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대학원 이상의 학위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생각과 현실 사이의 지대한 간극에 질린 사람들은 코인과 주식에 달려들지만 이 역시 늘 확실한 수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피케티가 풍부한 사례를 들어 소개하고 있듯이(피케티는 유수의 사립대학 재단을 예로 든다) 압도적인 자본을 가진 자일 수록 투자의 규모와 성공률이 훨씬 더 높아진다. 이들은 자신에게 더 유익한 투자자문을 해줄 수 있는 전문가를 망설임 없이 고용할 수 있고,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면서도 리스크를 헤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장하고 있다. 쉴새없이 오르내리는 주식 곡선을 바라보며 매입매수 시기를 노리는 소규모 투자자들은 흉내내기 어려운 부분이다.
투표를 통해 1인 1표를 행사하는 민주적 논리와 생산성에 따라 보수를 챙기는 시장 논리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시장 논리가 기존에 보호되어야 한다고 여겨졌던 민주적 가치를 노골적으로 침해하는 수준에 이르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토마 피케티가 소개한 사례 중에서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만하다. 첫째,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조 또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고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는 단서를 두고 있다. 시장에서 각자의 능력—그것이 생래적인 것이든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이든—에 걸맞게 경쟁을 펼치되, 그 경쟁이 벌어지는 장으로서 우리 사회에 부응해야 할 공익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둘째,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에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극단적인 불평등이 경제적 상위계층에게도 해롭다는 것을 말해준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빈자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울 수록 더욱 대출에 의존하게 되고, 금융사들은 저질의 금융상품들을 제공할 유인이 생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는 버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택을 찾던 서민들과 이를 이용해 눈앞의 이익을 챙겨보려던 금융사들이 합작해 만든 결과였다.
장기적인 추세를 보면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도 금융시장을 활황을 보이고 있고, 이러한 기세는 팬데믹 상황에서 잠시 주춤한 뒤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팬데믹 상황이 있기 전에 저술된 『21세기 자본』에서는 비록 2020~2021년의 전세계적 보건 위기상황까지 예견하지는 못했지만, 이 추세대로라면 벨 에포크에 못지 않은 불평등 상태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달리 말해, 경제적 상위 10%가 전세계 부의 90%를 가져가는 상황 말이다. 물론 아름다운 시절(Belle Epoque)에는 말 그대로 문명이 발달해서 자동차가 발명되었고, 사진기, 영화, 백화점이 등장했던 것도 모두 이때의 일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이러한 경제구조가 지속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비논리적이지 않다. 이러한 질문에는 이데올로기적인 관점, 정치적 관점이 배제된다.
답은 누진적 자본세인가?
사실 토마 피케티는 그가 소속된 파리경제대학에서 지금은 경제사 과목을 맡고 있다. 그런 그의 글 『21세기 자본』에는 인류학, 정치학, 사회학 등 인접 사회과학에 대한 다양한 통찰이 담겨 있는데, 마무리하는 글에서 그 자신도 그냥 경제학보다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현대 경제학에서 도구로써 수학적인 개념들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사회과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아야 할 연구대상인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경제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토마 피케티의 생각인 듯하다.
후반부에 그가 지금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해결책의 하나로 제시하는 '누진적 자본세'라는 개념은 다소 규범적인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채권 발행을 통해 공공부채를 늘리고 결과적으로 국채를 사들이는 부유층에게 이자를 지불하는 방식보다는 과세를 통해 부유층에서 저소득층으로 소득 이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토마 피케티가 바람직하다고 보는 재분배 정책이다.
특히 토마 피케티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그가 활동하고 있는 EU라는 지리적 공간이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유로화라는 공통화폐를 도입했지만, 각국의 상이한 경제상황과 공공부채 수준에 어떻게 접근할지 민주적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현 EU 지휘부를 비판하면서, 토마 피케티는 중앙은행 중심의 통화정책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보다 조세제도에 대한 각국의 입법적 조율을 통해서 민주적인 정당성을 확보해 나갈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가 여러 차례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조세제도로 나아가기 위해 부를 투명하게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줄곧 한국 사회를 떠올려보게 된다. 최근에 들었던 어떤 이야기 중에 우리나라 인구감소의 문제는 인구가 준다는 것 자체보다 너무 빠른 속도로 준다는 데 있다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인구구성의 변화는 사회구조가 바뀐다면 언제 어느 나라에서든 발생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빠른 속도로 인구가 줄어들면 사회갈등에 대한 관리가 어려워진다. 세대간에 시대를 바라보는 방식이 상당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시각차와 이견을 좁힐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 문제가 바로 그러한 사회적 이슈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유럽이나 일본과 같이 다른 사회는 상대적으로 천천히 인구 변화를 겪으면서 만성적인 저성장에 고용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꿀지, 사회안전망을 어떻게 갖출지, 재분배 정책을 어떻게 수정할지에 대한 논의를 꾸준히 진행해 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최근 UNCTAD 기준으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해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불평등한 상황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인식부터도 미흡한 것이 아닌가 싶다. 현 상황에 문제인식이 정확하지 않다면 그로부터 도출되는 해결책도 방향이 빗나갈 수밖에 없다. 결국은 시행착오를 회피하지 말고 상황을 직시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fin]
'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0) 2021.07.20 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 (0) 2021.07.19 21세기 자본 [갈무리] (0) 2021.07.15 삶은 다른 곳에 (0) 2021.06.28 이탈리아 현대사: 후견과 저항의 줄다리기 (0) 2021.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