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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일상/book 2021. 7. 19. 15:14
어느 책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생태철학과 관련해서 아르네 네스의 이름이 인용된 글귀를 보고 그의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주 막연하게 알고 있던 생태주의가 무엇인지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국내에 소개된 아르네 네스의 글은 이 책이 거의 유일한 듯하다. 아르네 네스가 저술한 책은 아니고, 데이비드 로텐버그라는 철학자와의 대담을 통해 그의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전반부에는 아르네 네스 자신의 생각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여기에는 '거리두기'처럼 어떤 사안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그의 성격이 언급되기도 하고, 젊은 시절 그가 관심을 가졌던 정신분석학이나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면서 아르네 네스 본인은 젊은 시절 비엔나 클럽(정신분석학이나 논리실증주의)에 속해 있던 것이 자신의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형이상학적인 개념의 추상성을 걷어내기 위해 언어의 정확성에 천착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오히려 그들이 겨냥하던 정확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보며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심층생태론(Deep Ecology)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어렴풋이 그 윤곽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게슈탈트 접근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쉽게 말하자면 부분적인 상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상을 그려가면서 좋은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과 자연은 이원론적으로 분리된 존재들이 아니다. 자연은 곧 인간의 자아가 확장된 형태, 즉 대자아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다.
그럼에도 생태 운동의 '실천' 단계를 들여다보면 그의 철학은 여전히 보완될 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글에는 숲에 도로를 내는 사례로 두 철학자간에 설왕설래가 이루어지는데, 데이비드 로텐버그는 숲으로 인해 고립되었던 두 지역이 도로로 연결될 수 있으면 숲의 나무가 일부분 잘려나가더라도 게슈탈트 접근법에 따라 바람직한 결과에 이르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에 대해 아르네 네스는 모든 사안에서 인간보다 자연을 우위에 둬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이런 이원론적 접근 자체를 폐기하라고 강조하는 것이 그의 입장이듯이—그럼에도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숲의 가치가 우선시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머릿속으로 구상만 하던 생각들이 실제 사례로 내려오면 이처럼 생태주의의 모호함이 문제가 된다. 어떤 면에서 아르네 네스의 이야기는 동양사상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마치 불교의 윤회설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직간접적으로 가느다란 끈으로 엮여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아르네 네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유용함'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오늘날 유용함은 금전적인 가치나 물질적인 편리함의 측면에서 측정된다. 당장 누리는 물질적 혜택이 수백 년이 흘러서도 누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은 채 단기적인 유용함에 흡족해 한다.
아르네 네스는 인터뷰를 통해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에 고민하는 것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지어주는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모두가 그만큼 소비하기 때문에 별 고민 없이 소비하겠다는 것은 미래 관념이 없는 다른 동물들과 다르지 않은 행태일 것이다. 환경운동가들의 주장과 달리 환경위기가 과장된 면이 있다는 의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후세대를 위해 기후변화에 대응책을 모색하는 국제적인 움직임은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이로운 변화가 아닌가 싶다. 생각하는 것은 늘 고통스럽겠지만 말이다. [fin]
획일적이고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전문용어들이 창조적인 과학자들 사이의 세계관에 대한 토론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진실을 추구하는 프로젝트로서 과학의 영예가 하나의 절대적인 세계상을 도출하는 데 달려 있는 듯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비과학적 세계상들과 반대되는 과학적 세계상이 바로 그것이다. 의견의 단일함이 증가하는 것이 마치 진실의 내용물이 늘어나는 믿을 만한 척도인 양 칭송되고 있지만, 그것이 기존 체제에 순응하려는 욕구일 가능성은 무시된다.
—p. 22
노르웨이어 Selv-realisering(Self-realizing)은 도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어떤 활동을 뜻한다. 세상 나머지를 떼어 놓고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 불교의 보살은 삶의 노정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해 늘 지상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그는 결코 열반에 이르지 못한다. 완전한 목적지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삶을 제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데에만 필요하다. 전체적 시각처럼 꼭 필요한 허구인 것이다.
—p. 26
아이들은 세계 안에 자신의 자리가 있다는 느낌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세계 속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집에 대한 상이 생길 수 없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세계가 우리에게 풍요롭게 보인다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세계와 나의 연결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록 세계 자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는 글을 남겼다. 따라서 가장 심오한 인식은 인류와 자연을 하나로 묶어 주어야 하며, 만질 수 있는 연구 대상인 자연으로부터 우리를 멀찍이 밀쳐 내어서는 안 된다.
—p. 30
아르네 인간의 삶만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과 그냥 사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p. 51
아르네 정확성에 찬성하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부정확성을 몰아내자는 것은 아닙니다. 부정확한 것들을 배제하면, 정확성에 빠져 길을 잃을 것입니다. 반드시 정확성과 부정확성 사이를 오가야만 합니다. 철학에서 모호함이 제거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p. 88
아르네 신기하게도 거리두기는 연민이나 공감, 주위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널려 있는지에 대한 이해 등과 잘 어울릴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괴로움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갈망이 가장 큰 괴로움이었죠. 제가 아는 한 가장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갈망이었죠. 제가 어떤 구체적 대상을 바랐던 것은 아니니까요.
—p. 103
아르네 삶은 경이롭고 즐거우며 환상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음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살아 있음이 너무 끔찍한 상황에서는 자살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겪어 왔고, 그가 이제 삶을 그만두고 싶어 한다는 것이 분명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삶이 멈추게 되므로 우리에게는 한정된 시간만이 있을 뿐입니다. 최대한 오래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p.104
……매우 큰 숲에서 늘 여러 갈래의 샛길들에 주의를 빼앗긴다면,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다른 가능성들을 너무 잘 인식하고 있으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결코 멀리까지 갈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멀리 가야지만, 숲의 가장자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p. 114
아르네 그렇습니다. 1950년대 초반에 저는 키에르케고어를 열심히 읽었고, 인간 존재의 깊이에 대한 그의 관점에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즉, 삶이 곧 끝난다는 사실을 인간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사느냐’를 중요한 문제로 만듭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느냐’는 자신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러가서 ‘삶이 어떠하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에만 계속해서 문제가 됩니다. 그 답이 자신의 전반적인 목표에 부합하는지 반드시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키에르케고어가 ‘자기성찰’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자기성찰 속에 있을 때, 자신이 살아 있고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일종의 자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어떤 분명한 체계, 즉 전체적인 시각이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을 즉시 이끌어 냅니다. 즉,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삶에서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깊은 직관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지 자각할 수 있게 됩니다.
—p. 133~134
아르네 맞습니다.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이 단순히 에고에 불과한 것은 아니니까요.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는 외부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런 이원론을 버리세요! 그러면 환경주의라는 용어가 무의미해질 겁니다. 그 용어는 인간과 다른 모든 것들 사이의 매우 인위적인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개별 자아로부터 세계라는 대자아를 향해 시야를 넓히게 되지요.
—p. 152
아르네 저는 제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에 특히 더 사로잡힙니다. 제가 사라지고 싶어 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그것이 데카르트적인 것에 반대하는 제 태도의 출발점입니다. 근대 철학의 공리인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분리를 극복하려는 것이지요.
—p. 170
아르네 그렇습니다. 개연주의입니다. 저는 개연주의에 이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가 과거와 비슷할 것이라는 데에는 실질적인 확실성이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느끼면서 왜 불확실성이 없는 척 해야 할까요? 왜 개연성이 거의 진실인 척해야 할까요? 99.999퍼센트의 확률과 절대적인 100퍼센트의 확실성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동전을 1000번 던져 모두 앞면이 나올 가능성과 다른 수열들의 가능성을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1001번째에 뒷면이 나옵니다.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지요……
—p. 216
데이비드 생각하는 것은 늘 고통스럽나요, 아니면 이따금씩 그런가요?
아르네 늘 그렇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생각하기는 이전에 있었던 곳보다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p. 230
아르네 ……저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비폭력적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에게 특정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광고가 그렇지요.
—p. 252~253
1. 인간과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의 번영은 그 자체로 고유의 가치를 갖는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의 가치는 인간에게 유용한가의 여부와는 별개이다.
2. 지구상 생명 형태들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은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인간의 문화 형태도 여기에 포함된다.
3. 인간은 생명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감소시킬 어떠한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4. 인간 생활과 문화의 번영은 인구가 상당히 줄어들 때에만 이룰 수 있다.
5. 현재 인간이 비인간 세계에 하고 있는 간섭은 과도하며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6. 이상의 강령들은 지금까지 인간이 지구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보여왔던 지배적인 행동방식을 반드시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한 변화는 정치적・사회적・기술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구조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7. 부자 나라들의 사상적 변화는 생활의 물질적 기준을 높이기보다는 삶의 질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주가 될 테며 이를 통해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지구적 상태가 준비될 것이다.
8. 이상의 강령에 동의하는 이들은 필요한 변화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비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p. 265~266
사려 깊은 환경보호주의는 모두 곧 모순에 빠진다. 자연이 인간의 열망보다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다면, 인간으로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비판하지 않은 채 어떻게 자연의 이러한 측면을 보호할 수 있을까? 오늘날 인간 사회는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발전이 아니라고 부정하기보다는 발전을 새롭게 정의하고 싶은 것이다. 자의식 강한 낭만적인 과거로의 회귀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심층생태론은 이런 모순을 넘어서는 길을 감히 희망한다. 심층생태론은 야생동물이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거나 새로 돋아난 솔잎의 향을 마시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 모두의 불평등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 줄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누구도 심층생태론을 그렇게 공허한 주장들로 단순화시킬 만큼 순진해서는 안 된다. 심층생태론이 너무 모호한 듯이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심층생태론이 불러일으킨 불꽃을, 지구에 대한 근본적인 숭배와 지구를 구하기 위한 즉각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연결시키는 든든한 길잡이로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p. 268
아르네 ……오직 시야와 느낌의 폭이 아주 좁은 사람들만이 소자아와 주위 환경 사이에 이렇게 엄청난 분리를 합니다. 아시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적 자아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사회적이지 않은 에고는 없습니다. 개인이 발달을 시작한 첫 순간부터 사회는 거기 있으니까요. 생태운동 안에서 생태적 자아를 알게 되면 이런 분리를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p. 289
아르네 게슈탈트 심리학은 사람들 경험의 패턴을 사람들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무언가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속에 나무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거죠. 하지만 왜 거기서 멈춥니까? 이미지와 생각을 담는 그릇인 주체를 없애 버리십시오. 그 모든 생각과 이미지는 당신 안에 있는 것만큼이나 저 바깥에도 있습니다! 오직 논리적인 분석을 할 때에만 주체, 객체, 매개물 사이에 이런 구분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연스러운 삶에는 그런 것들의 명확한 구분이 없습니다. 게슈탈트 존재론은 세상 속에 있습니다.
—p. 311
아르네 …….오늘날 수리물리학에서 추상성은 자연을 원자론적 관점에서 바라봤던 1913년에 비해 훨씬 더 수위가 높습니다. 파동과 입자라는 용어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자연스런 경험과는 대체로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 이제는 압도적으로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과학적 이미지는 자연스러운 경험을 다루지 않는 추상적인 구조들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게슈탈트 존재론 같은 것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는 데 입자나 파동에 의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p. 314
아르네 그렇습니다. 파스칼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제한시켰습니다. 직관이 있다면, 즉 남은 생 전체를 걸 정도로 극히 중요한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그런 직관이 있다면, 경험한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그 다음에 그것을 공개한다면, 아주 완전히 공개해서 가능한 원래에 가깝게 그 경험을 재현하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가능한 많은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면 그 상태에 머무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p. 354
아르네 갈등의 중심을 찾아라! 불편한 일이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일이 벌어지면, 저는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둡니다. 하지만 그 뒤에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글을 읽고, 글을 씁니다.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투쟁에 동참할 수 있으려면 엄청난 사회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류로부터 제가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반대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저에게는 점점 더 쉬워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제가 의도적으로 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p. 356
아르네 아,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물론이지요.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어 기쁘네요. 먼저, 저에게는 앞에서 얘기한 거리감 혹은 성격무장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 자신만의 세계에 너무 오래 머무릅니다. 그로 인해 가장 나쁜 점은, 우정의 규범이 손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자신이 정말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제가 그다지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들의 상황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음에도, 저는 별로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p. 368
아르네 답을 찾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토요일에 완전한 확신을 얻는 것과 답을 찾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주일 내내 혹은 일 년 내내 작업을 하고 나서, 토요일에 완전한 확신을 얻었다고 합시다. 월요일이 되면, 약간의 오류를 발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답도 마찬가지지요.
—p. 369
여기에 그의 독자들이 지금껏 알지 못했던 아르네 네스의 모습이 있다. 그는 주제에서 사건으로, 원칙에서 기억으로 이리저리 빠져나간다. 정확성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어떤 개념에 대해서도 빠르게 정의하기를 거부한다. 왜일까? 영감을 주는 능력이 줄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다. 또한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p. 373~374
……세상은 나타나서 세상을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갈 뿐인 것이다.
—p.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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