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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소돔과 고모라 II일상/book 2021. 7. 22. 17:19
마르셀 프루스트의 글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 만연체가 많다. 이 부분은 다시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되는데, 우선 프랑스어의 운율을 모른 채 번역본을 읽을 때는 만연체가 함축한 리듬을 파악하기 어렵다. 각주에 프랑스어로 어떤 언어유희가 활용되고 있는지 상세하게 다루고 있지만, 아무래도 유머를 따라가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데다 만연체로 상황이나 감정에 대한 묘사가 밀도있게 이뤄지지만, 거꾸로 얘기하면 한 권을 다 읽어도 며칠에 걸친 스토리이거나 기껏해야 한 계절에 걸친 스토리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달리 말하면 프루스트는 '시간'을 귀중한 물건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내듯 아주 치밀하게 써내려간다. 한참 몰입해서 읽고 있는데 문득 아직 한 장면이 끝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글을 읽기 어려운 두 번째 까닭은 프랑스의 귀족문화와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소설에 묘사되는 무수히 많은 사교모임 안에는 크게 귀족적인 군상과 부르주아적인 군상의 두 집단이 나뉜다. 같은 품행과 태도에 대해서도 어느 한 쪽은 천박한 것으로 다뤄지고, 다른 한 쪽은 품위있는 것으로 다뤄진다. 어느 것은 교만한 것으로 다뤄지고 어느 것은 권위 있는 것으로 다뤄진다. 어느 것은 얄팍한 것으로 다뤄지는 반면 또 어느 것은 재치 있는 것으로 다뤄진다. 한끗 차이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구별짓기'는 이 소설의 등장인물과 스토리를 지배하는 주된 내용인 만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19세기 유럽 귀족문화에 그리 해박하지 않다.)
『21세기 자본』을 읽은 직후에 벨 에포크의 소설을 다시 접해서인지는 몰라도, 소설에 자세히 묘사되는 귀족사회가 다른 각도에서도 이해되었다. 내러티브적 성격이 강한 『21세기 자본』에는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에 대한 사례가 자주 다뤄지고, 노동소득을 택할 것인가 자본소득을 택한 것인가의 기로에서 갈등하는 상황을 '라스티냐크의 딜레마'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이처럼 벨 에포크 소설에서 묘사되는 경제관념의 커다란 특징은, 첫째 큰 돈을 버는 사람(귀족)들의 수익이 대체로 토지임대료와 국채로 구성되어 있고, 둘째 인플레이션 관념이 불명확하던 시기이므로 화폐의 고정적 가치가 비교적 명확하게 서술된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프루스트의 글을 읽다보면, 과연 캉브르메르 백작이며 베르뒤랭 부인이며 모두 상속과 임대료를 통해 부를 보전하고 있는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극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한 이들의 삶이 어떤 경제적 매커니즘으로 지탱되는지 생각을 해보았다.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소돔과 고모라』의 본래 이야기로 돌아오면, 소설의 부제가 뚜렷하게 암시하듯 이 거대한 장편소설의 <소돔과 고모라> 파트에서는 동성애가 가장 커다란 모티브를 이루고 있다. 샤를뤼스 남작, 알베르틴, 니심 베르나르 등등 소설 속에서 동성애와 맞닿아 있는 각양각색의 인물이 등장한다. <스완네 집 쪽으로>,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게르망트 쪽>에서 이어져온 프루스트의 전반적인 글쓰기가 그러하듯, 주제를 다루는 프루스트의 방식은 단일하지 않다.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동성애적 관계들은 치명적이어서 뿌리칠 수 없으면서도 환멸감을 불러일으키고, 질투와 시기로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러한 사랑 안에서 다시 천진난만한 아이의 기쁨을 누리게 한다.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다뤄지는 동성애는 역자가 후술하듯 기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훨씬 더 간명하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역자의 글을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소도미적 관계(남성-남성)와 고모라적 관계(여성-여성)이 소설 속에서 어떻게 서로 다르게 관조되고 있는지, 왜 프루스트가 동성애적 코드를 삽입하는 데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을 빌려오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목이 많다. 또한 샤를뤼스 남작을 난초(orchide)에 비유함으로써 간성적(間性的) 존재에 빗댄다는 해석은 신선하다. 다른 한 편으로 내가 좀 더 주목했던 구도는, 샤를뤼스 남작은 게르망트 일족으로써 유서 깊은 혈통을 지닌 귀족임에 반해, 그의 상대방인 모렐은 하층민이라는 사실이다. 가상의 결투를 신청할 만큼 모렐에게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는 샤를뤼스 남작은 <소돔과 고모라> 장이 보여주는 귀족계층의 쇠락과 부르주아 계층의 성장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 아닌가 싶다.
결국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게 바라봐야 하는 것은 시점을 제공하는 화자로서의 '나'이다. 나는 알베르틴의 고모라적 성향에 끊임없이 의심을 품고 속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 못한다. 발베크를 되찾은 '나'가 할머니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다시 잊은 줄로만 알았던 유아기적 환상에 사로잡히는 장면과 겹치는 부분이다. 결국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나'이다. 성인 된 모습으로 사랑을 마주하는 것도, 아이의 껍질을 깨고 어른의 길로 나아가는 것도 '나'의 몫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갇힌 여인>에서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fin]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 모습과 비슷한 다른 삶이 존재하기를 열정적으로 소망한다. 그러나 이 다른 삶을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의 삶에서도 몇 해만 지나면 우리의 옛 모습, 영원히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모습에 불충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동안 생긴 변화보다 죽음이 우리를 더 많이 변하게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만약 우리가 다른 삶에서 과거의 내 모습이었던 자아를 만난다면, 과거에는 친하게 지냈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런 자아로부터도 멀어질 것이다.
—p. 15
그렇다면 우리가 회상하지 못하는 추억은 무엇이란 말인가? 좀 더 나아가 보자. 우리는 최근 삼십 년간의 추억을 모두 회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추억들은 우리를 완전히 적시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삼십 년에 한정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이런 예전의 삶을 탄생 너머로까지 연장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 뒤에 있는 추억의 어느 부분 전체를 알지 못하고, 그 추억들이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며, 내게로 그 추억을 소환할 능력이 없다고 해서, 누가 그 미지의 덩어리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나의 삶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추억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몸속이나 주위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추억이 수없이 많다면, 이 망각은 내가 다른 사람의 몸으로 산 삶이나, 다른 유성에서 살았던 삶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동일한 망각이 모든 것을 지워 버린다. ……죽은 후에 태어날 나란 존재는 마치 현재의 내가 탄생 이전의 인간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탄생 이후의 인간을 기억할 까닭이 없다.
—p. 238~239
……그곳은 콩브레에서 시작하여 메제글리즈 방향으로 나 있던 평원과도 흡사해서, 비록 알베르틴과 조금은 멀리 있어 내 눈길이 그녀에게까지 이르지는 못하지만, 지금 내 곁을 스치는 이 부드럽고도 강력한 바람이 나의 눈길보다 훨씬 멀리 가서 도중에 어떤 것으로도 끊기는 일 없이 케톨므까지 급히 내려가 생장들라에즈를 무성한 잎으로 덮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흔들면서 내 여자 친구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그렇게 해서 이 무한대로 커져 가는, 그러나 안전한 은신처 안으로 그녀와 나 사이에 이중의 연결고리를 던져 준다고 생각하면 기쁨이 솟구쳐 올랐다. 마치 어린아이 둘이 이따금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 곳에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놀이에서처럼 말이다. 예전에 나는 바다가 나뭇가지 사이로 나타나기 전에 이제 내가 보려고 하는 것이 아직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처럼 아득히 먼 옛날의 그 미친 듯한 소요를 계속하는 저 애처로운 대지의 조상임을 생각하기 위해 눈을 감았던 그 바다가 보이는 길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길들이 알베르틴에게 가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p. 285~285
…….인간이란 우리 자신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자리를 이동하는 법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계의 영원한 진행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을, 어느 한순간의 시작, 그 인간을 끌고 가는 운동을 지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순간에 고정된 부동의 존재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이 각각 상이한 두 순간의 이미지를, 그 자체로는 변하지 않는, 적어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충분히 가까운 시간에서 포착한 두 순간의 이미지를 골라내기만 하면, 이 두 이미지의 차이는 우리와의 관계에 따라 그 인간들이 이룬 변화를 측정하게 해 준다.
—p. 300~301
…….한순간 나를 둘러싼 헐벗은 바위들과 틈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마치 다른 세계의 편린들처럼 내 눈앞에 떠다녔다. 나는 그 산과 바다 풍경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엘스티르가 「뮤즈와 만난 시인」과 「켄타우로스와 만난 젊은이」라는 경이로운 수채화 두 편의 배경으로 삼았던 풍경이었는데, 나는 그 수채화들을 게르망트 공작 부인 댁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림에 대한 추억이 지금 내가 있는 장소를 현세 밖에 재배치했으므로, 나는 엘스티르가 그린 그 선사 시대의 젊은이처럼, 만일 산책 중에 어느 신화적 인물과 마주친다 해도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내가 탄 말이 뒷발로 일어섰다.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말을 제어하고 땅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먹었으며, 그러다가 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을 향해 눈물 가득한 눈을 쳐들었고, 햇빛 속 머리 위 약 50미터쯤 되는 곳에서 별로 분명하지는 않지만 뭔가 인간의 얼굴과도 흡사한 존재를 실은 두 개의 반짝거리는 커다란 강철 날개를 보았다. 처음으로 반인반신을 본 그리스인처럼 나 또한 감동했다. 눈물도 흘렸다. 소음이 바로 내 머리 위에서 왔다는 걸 인지한 순간 내가 처음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 비행기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p. 312~313
……흐릿한 하늘이 점점 불타오르는 듯했다. 지금까지는 삶의 지극히 작은 것, 한 잔의 카페오레와 빗소리와 요란한 바람 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깨어나던 나는, 이제 곧 밝아 올 날과 다음에 이어질 나날들이 더 이상 미지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고 내 형벌을 연장하게 될 거라고 느꼈다. 나는 아직 삶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삶으로부터 기대할 것은 잔인한 고통뿐임을 깨닫는다.
—p. 471
……나는 나 자신의 변모를 사물의 동일성에 대조하면서 더 잘 의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지듯 사물에 대해서도 익숙해지기 마련이어서 사물이 본래 갖고 있던 의미와 다른 의미를 떠올리고, 다음으로 사물이 모든 의미를 상실해서 그것이 둘러쌌던, 오늘날의 사건과는 아주 다른 사건들이나 동일한 천장과 동일한 유리 낀 책장 아래서 행해졌던 여러 다른 행동들을 떠올릴 때면, 그런 다양성 안에 내포된 우리 마음과 삶의 변화는 변함없는 배경의 영속성으로 인해 더욱 증대되고, 장소의 단일성으로 인해 더욱 견고한 모습을 띤다.
—p. 484~485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연인들은 그들에 대한 내 사랑과 같은 순간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랑은 진실했다. 왜냐하면 나 혼자만을 위해 그 연인들을 보고 지키는 일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했고, 또 어느 날인가 그들을 기다릴 때면 오열을 터뜨리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연인들에겐 사랑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랑을 일깨우고 절정에 이르게 하는 속성이 있었다. 그들을 만나고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그들에게서 내 사랑과 흡사한 것, 내 사랑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나의 유일한 기쁨은 그들을 보는 것이었고, 나의 유일한 불안은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그 연인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미덕이 자연을 통해 그들에게 부수적으로 덧붙여졌으며, 또 이 미덕이, 이 유사 전류의 힘이 내 사랑을 자극하는 결과를, 다시 말하면 내 모든 행동을 인도하고 내 모든 괴로움을 유발하는 결과를 자아낸 것 같았다. 그러나 여인의 아름다움이나 지성, 선의는 이 모든 행동이나 괴로움과는 무관했다.
—p. 485~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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