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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일상/book 2021. 7. 20. 03:04
『인생사용법』도 읽어봐야겠다!!
요컨대 이 작품과 관련해 거의 병적이라 할 만한 매혹을 일으키는 요인은, 화가의 기술적 능력보다 공간적이면서도 시간적인 투시법의 실현에 있었다. 그러나 레스터 노박은 결론에서 결코 이러한 전망의 의미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작품은 예술의 죽음을 나타내는 이미지이며, 자신의 고유한 표본을 무한히 반복하도록 운명지어진 이 세계에 대한 거울과 같은 반영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박은 관람객을 극도로 격앙시킨 모사화와 모사화 사이의 미세한 차이들이야말로, 예술가의 우울한 운명에 대한 최후의 표현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작품에 나타난 이야기에 의해서만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는 예술가가 이러한 차이를 통해 한순간이나마 예술의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는 척할 수 있고, 나열을 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인용을 넘어 영감을 분출하며 기억을 넘어 자유를 되찾는 척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아마도 작품 속 그림들 중에서 괴기스럽게 문신을 한 남자의 초상화보다, 즉 되풀이되는 그림의 매 단계마다 보초를 서고 있는 듯한 그 채색된 몸보다 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의미를 지니는 그림은 없을 것이다. 수집가의 눈앞에서 그림이 된 이 남자는, 그림 그릴 권리를 박탈당한 채 완전히 그려진 표면이라는 유일한 성과물을 바라보고 나아가 그것을 볼거리로 제공하도록 운명지어진 ‘창조자’라는 존재에 대한 조소와 냉소, 향수와 환멸이 서린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p. 34~35
십 년 전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제기한 것과 달리 이 미세한 차이들은 매력적이지만 자기논리에 갇힌 어떤 생각을 재구성하기 위해 시도된 조소적 작업이라고 보기 어렵다. 즉 돈벌이를 위해 복제를 해야 하는 세상에 맞서 “예술가의 자유”를 표현하려는 의도와 무관하며, “황금기”인지 “실낙원”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떤 불가능한 유산을 화가에게 강요하는 역사비평적 관점과도 연관이 없어 보인다. 그와 반대로, 이 차이들은 특정한 통합과정 혹은 소유과정을 지시한다. 말하자면 ‘타자’를 향한 투사나 프로메테우스적 의미에서의 ‘도둑질’을 가리킨다. 미학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이런 작업은 물론 자신의 한계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 스스로에 대한 조롱이 될 수도 있고, 단지 눈속임만 생산해내는 단순한 시선의 과장이나 착시효과로 규정될 수도 있는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화가의 작업을 분명하게 정의하는 순수한 정신적 체계의 논리적 종결과 조우하게 된다. 코레조의 “나도 화가다Anch’io son’ pittore”라는 말과 푸생의 “나는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J’apprends à regarder”라는 말 사이에, 모든 창조행위의 좁은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위태로운 경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무너지기 쉬운 경계의 마지막 단계는 ‘침묵’일 수밖에 없다. 바로 퀴르츠가 작품을 완성한 뒤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자발적이면서도 자기 파괴적인 침묵.
—p. 72~73'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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