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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도쿄 올림픽이 열리면서 종종 일본 언론의 기사들을 읽다보면 일본사회가 전반적으로 국수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주변국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부풀려 일반화한다든가 선수들의 플레이를 비하하고, 자국 정부의 외교적인 실언이나 판단착오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합리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일본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 글은, 비록 지금은 베를린에 살고 있지만 일본인 작가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소설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무메이(無名; "이름없음")라는 병약한 꼬마의 성장 없는 성장기를 그리고 있는데, 시점이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고 있는 지금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소설이 발표된 게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2014년의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21년도 일본사회의 모습은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것만큼 디스토피아는 아니다. 도쿄에는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고, 원전 사고지역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홋카이도나 규슈, 오키나와로 사람들이 대규모로 이주하는 일이 발생하지도 않았다. 또 일본은 소설 속에서처럼 국제사회로부터 봉쇄되거나 고립되어 물자 부족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교역을 정상적으로 재개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어쨌든 이 소설은 작가가 상정한 디스토피아라는 상상 속 무대와 그 위에서 펼쳐지는 사회의 가치관 변화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특히 작가는 '본디 자연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며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인재(人災)'로 규정한다. 작가는 여기에 정치인들의 무능함과 무책임함이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민영화'된 정치인들은 몇몇 이해관계자들에게 휘둘릴 뿐 관리자로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지 못할 뿐 아니라, 일에 착수한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법률을 뒤트는 것'이 전부다. 소설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요시로는 변소에서 정치란이 실린 신문지로 보란듯이 시원하게 뒷처리를 한다.
사실 오늘날 일본사회가 겪고 있는 정체감과 위기감에 있어서도 정치인에 대한 일반국민의 불신이 큰 몫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시민들 사이의 불안감이 국수주의이라는 폐쇄적인 견지로 튕겨져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잃어버린 20년이 이미 30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일본,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지 못하고 있는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무능함은 리더십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무메이(無名). 이름없음. 하루종일 증조부 요시로의 손길이 없으면 간단한 거동조차 하지 못하는 이 어린 꼬마의 실체는 모호하다. 작가는 이 꼬마를 통해 기존 세대와 아예 다른 차원의 문명을 창출하게 되지 않을까 연민 섞인 시선을 보내면서도, 그렇게 창출된 문명이란 것이 실은 기형적이고 나약한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낸다. 오늘날 인류가 이족 보행을 한다는 사실을 으뜸으로 삼았던 것처럼, 미래에는 인류가 문어처럼 여덟 다리를 가지고 짝지어서 두 다리로 걷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실소를 보낸다. 과연 그런 문명이 지금의 문명보다 무엇이 진보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름없음"이라는 꼬마의 이름은 말 그대로 '텅 빈 공간'을 의미하면서도 '모든 것이 상실된 세대'를 의미하는 듯하다.
특히 작가는 '의미 비꼬기'를 통해 소설 속 일본사회를 디스토피아로 묘사한다. 가령 '젊다'라는 형용사의 의미는 무메이의 세대에는 그 의미가 변질된다. 증조부 요시로의 시대에 '젊다'는 것은 힘있음, 박력 있음, 패기, 열정 같은 단어를 연상시켰다면, 무메이 세대에 '젊다'는 것은 경멸적이고 조롱하는 의미를 띠게 된다. 젊음은 더 이상 찬양의 대상이 아니다. 젊다는 것은 음식을 스스로의 힘으로 삼키지 못하고, 걸음을 옮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의미가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무메이(이름없음)만은 아니다. 헌등사(獻燈使)의 역할 역시 소설 속에서 명확히 다뤄지지 않는다. 물물거래가 부활할 만큼 쇠퇴의 길로 접어든 일본사회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을 임무를 띤 유일한 소년. 하지만 그러한 임무는 어떤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으며, 당면한 문제에서 일본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작가는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헌등사라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존재의 필요성을 역설할 뿐, 헌등사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무엇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독자들에게 열린 질문으로 남겨 놓는다.
사실 소설에서 내가 가장 주의 깊게 봤던 인물은 무메이의 증조부 요시로(義郞)라는 인물이다. 딸과 손자가 떠난 뒤, 자신의 증손자를 뒷바라지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원전사고 이전에 태어난 그 자신은 아무런 질병 없이 백 살이 넘게 장수한다. 여기서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반어법이 다시 등장한다. 요시로의 '무병장수'는 소설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후세대를 부양하기 위하여 이전 세대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 영속할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발생 이전까지 기성세대들이 누렸던 물질적 혜택과 안이함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다. 기성세대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당장 어떤 병을 안고 태어날지 모르는 후세대들에게 무제한적인 책임을 져야만 한다. 책임을 다할 때까지 요시로의 삶은 멈출 수 없다. 하지만 무메이의 건강을 간절하게 바라는 요시로의 모습에는, 그것이 영원히 이뤄지지 않을 바람으로만 남을 거라는 작가의 비관적인 예언이 짙게 베어 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배경으로 한 일본 소설이기는 하지만,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헌등사> 뒤에 이어지는 단편들에서는 일본인들이 난민으로 전락해 가는 모습,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치명적이 질병에 걸리는 모습, 동물들 여럿이 모여 인간의 오만함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모습 또한 담고 있어서,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사건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어떤 메시지를 간추려야 할지 생각해보게 한다. 또한 일본어와 외래어, 외국어를 종횡무진하며 다양한 언어유희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재미있게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국내에서는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번역한 책이 출간되어 있다.) [終]
義郎は厠に入って便器に尻を載せ、ナウマン象の後ろ姿を思い浮かべた。無名は水たまりになった象の足跡を虫眼鏡で観察しているところを思い浮かべた。それから腹たたしげに紙をむさっと手に取った。義郎は新聞記事の切り抜きを手で柔らかく揉んだものを木箱に入れて厠紙として使っている。政治が尻っぺたに張り付くようでぞっとすることもあるが、肌につく時には鏡文字になっているのだからいい気味だ、と思って自分を慰める。自分の尻の下でこれまでの政治が「逆」あるいは「反対」になる。
—p. 36~37
無名は幸い、病気にしがみつく大人の酔態を目にしたことはない。このまま成長すれば、病人として周りに媚びることもなく、自分を可哀想だと思うこともなく、死なければならない瞬間まで楽に生きていくことができるのかもしれない。
—p. 44
真っ白な瀬戸物の刃に擦り込まれて橙色の汁が流れる。血でも涙でもなく、毎日オレンジ色の果汁をドクドク流しながら生きていきたい。橙色の含み待つ朗らかさ、暖かさ、身の締まるような酸っぱさと甘さを自分の中に取り込んで、腸に太陽を感じたい。
—p. 45
乗り換えの多い困難な旅だと頭では分かっていたくせに、初めのうちは、なんだかスイスイと無名と義郎のところへ移動できそうな気がした。しかし乗り換える度に待合室に入り、他の人たちが来るのを待ち、やっとその空間が待合室らしくなると、列車が来てみんなで乗りこむ、という過程が繰り返されるうちに終わりが見えなくなり、自分が何をしているのか見失いそうになってきた。どの列車も鞠華の願いを最後まで読み取ってくれず、途中で非人情に下ろしてしまう。何度も反り変え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いいとしても、その度に最大限の乗り換え時間を強いられるのは自分だけなのだという気がしてくる。もしそうならば、誰がなんおためにそんな風に時間表を組んだのか。世の中を陰謀の組み合わせとして解釈するのは鞠華の得意とするところだった。
—p. 97
走る、走る、走る。火事場から逃げていく時は、こんな風なのかもしれない。どこかが燃えているのでどこかが痛い。別れは昔から苦手だったが年をとるにつれてますます苦手になった。絆創膏を剥がしてまだ治ってない傷口に触るような痛い思いをするくらいなら、絆創膏が黒く汚れて、ねちゃねちゃになって、肌といっしょに腐りはじめても、いつまでも剥がさないでいた方がまだまし、などと子供染みたことを思ってしまう。
—p. 100
「海の底に沈んだ板が時々大きくずれる。するとその板の淵で大きな地震が起こって、津波が来ることもある。ヲレは人間の力ではどうにもならないことだ。地球というのはそういう物なんだ。でも、日本がこうなってしまったのは、地震や津波のせいじゃない。自然災害だけなら、もうとっくに乗り越えているはずだからね。自然災害ではないんだ。いいか。」
—p. 144
信号が赤から緑に変わる度に歩行者が一斉に歩き出した長閑な時代があった。どう見ても青色ではなく緑色の心臓の光をみんな「あお」と呼んでいた。あおあおとした新鮮な野菜、あおあおと茂る草むら。そうだ、あおあおとした日曜日もあった。緑じゃない。青だ。碧だ。あおい海、あおい草原、あおい空。グリーンじゃない。え、クリーンな政治?クリーンじゃないだろう。クリーンなんて消毒液みたいに自分の都合に合わせて殺したい者を黴菌に例えて実際殺してしまう化学薬品に過ぎないだろう。藪の中にこそこそ隠れて、法律ばかりいじっている民営化されたお役所はオヤクそだ。クシャクシャに丸めて捨ててやりたい。
—p. 156~157
この地に稲作が始まったのは何千年くらい前だろうが。月は田んぼよりずっと前から存在するが、滅ぼされる危険のないだけの距離を人間からとっている。「田に月と書いて胃か」と言ってふっと夫が笑った。
—p. 166
もちろん吐き気のすることや涙の溢れることもたくさんあったが、時間の篩にかけられると、楽しかった思い出は数限りなく記憶に残り、悲しかった思い出は一つくらいしか残らない。その代わり、そのたった一つの悲しい出来事は、何十何百という楽しかった思い出を押しつぶしてしまうほど重かった。
—p. 182
一子は破けてしまった心を固く凍らせて、待つのはやめよう、忘れよう、と決心した。翌日もその翌日も「待たない」自分の強い意志が自分の中にあるのを確認した。ところが何日経っても、待たない自分がしこりのように喉に使えて、待つのをやめているということが待っているのと同じだけの苦しさで一子を支配し続けた。
—p. 183
若いという形容詞に若さがあった時代は終わり、若いといえば、立てない、歩けない、眼が見えない、物が食べられない、しゃべれない、という意味になってしまった。「永遠の青春‘がこれほど辛い物だとは全盛期までは誰も予想していなかった。
老人たちは若い人の看護をし、家族の食べるものを確保するだけで精一杯で、投げ口からも怒る力もない。「地獄草紙」という言葉がよく使われるようになったが、身を焼きつくす炎や流れる血が目に見えるわけではない。悲しみも苦しみも形にないまま老人たちの心に蓄積していく。いくら一生懸命に介護しても、若い人から順に姿を消していく。未来のことを考える余裕などないうちに、次の大地震が襲ってきた。新たに壊れた四つの原子炉からは何も濡れていないと政府は発表したが、何しろ民絵羽化された政府の言うことなので信用していいのかどうか分からない。
—p. 193~194
瀬出は深緑色の海面を敷くしみを込めて睨んだ。海には責任がないことは十分承知していた。責任を取らなくてもいい主体を人が「自然」と呼ぶ。
—p.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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