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와 중세에 유럽사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탈리아는 근현대사에 접어들면 그 존재감이 미약해진다. 이탈리아라는 나라는 그 자리에 계속해서 있어 왔는데도 불구하고 최근에 가까워져 올 수록 이탈리아라는 예전의 영광을 유지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
사실 근대국가로서 오늘날 이탈리아는 19세기에 뒤늦게 형성된 것이다. 이탈리아는 남북이 통일된 이후에도 두 지역은 사회경제적으로 제각기 서로 다른 발전궤적을 그렸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양차 대전 시기에 국왕은 파시즘이 득세하는 것을 막는 데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따라서 전후 이탈리아의 역사는 반파시즘과 함께 태동하지만 동시에 민족해방위원회의 소멸이라는 굴절도 함께 경험한다. 레지스탕스 출신인 페루초 파리가 총리가 되었음에도 민족해방위원회를 제헌의회의 틀 안에 포섭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처럼 이탈리아의 근현대사는 같은 시기 다른 유럽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닮은 듯 닮지 않은 복잡하면서도 일관된 이야기가 있다.
반파시즘 진영(공산당, 사회당, 행동당)과 연합군 진영(기민당, 미국정부)이 각축을 벌이는 과정이라고 이탈리아 근현대사를 뭉뚱그릴 수 있을까? 아니다, 이는 큰 비약일 것이다. 이탈리아공산당은 유럽 내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춘 공산주의 정당이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기성 정당정치에 타협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베를링구에르가 이끄는 공산당이 기민당과 ‘역사적 타협’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는 공산당의 정강과 이념에 대한 의심을 배가시켰을 뿐이다. 새로운 변혁은 없었다. 이는 공산당의 반대편에 서 있던 기민당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 교계 그리고 기업 엘리트들과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던 기민당은 전후 이례적으로 오랜기간 집권여당으로 현대 이탈리아를 이끈다. 하지만 책에서 언급하다시피 기민당이 대변했던 것은 단순한 이해관계였지 어떠한 ‘헤게모니’를 표방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글을 읽다보면 후견주의로 점철된 이탈리아의 정관계에서 기민당과 바티칸, 기업 엘리트들이 정말로 공통의 이익을 목표로 협력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은 그 반대다. 그들은 각자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중요했다. 기민당으로써는 집권이, 바티칸으로써는 종래의 신도 구성원이, 기업 엘리트들은 그들 기업의 이윤이 가장 중차대한 문제였다. 각자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통로를 찾는 과정에서 어쩌다보니 정치 영역에서 마주쳤을 뿐이다.
실제로 기민당은 네트워크와 정강을 통해 자신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꾼다. 이는 새로운 유권자를 확보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정강 자체를 추상적으로 만듦으로써 정당 자신의 정체성을 약화할 우려가 있다. 그럼에도 기민당이 오랜 기간 집권당으로서 연합정부를 이끌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대외적인 요소들을 빼놓을 수 없고, 그 가운데에서도 냉전이라는 요인을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어야 하는 법. 하지만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뒤 이탈리아의 정치 공백을 우려한 미국은 파시즘 정권 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들을 이후 새로이 설립되는 기관들에 그대로 수용한다. (이 대목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의 모습과도 매우 닮아 있다.) 또한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대적인 경제원조 정책, 이른바 마셜 정책으로도 알려진 대규모 경제원조를 실시한다. 공산당의 득세를 우려하여 자본을 해외로 도피시키려던 기업가들에게 미국의 이러한 정책은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기민당의 입장에서도 가장 강력한 야당인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협조를 구하는 것은 긴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경제원조라는 외형을 띠었지만, 미국의 경제적 지원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소비주의로 표방되는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삽입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것이었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관료와 행정기관의 파렴치한 비효율에도 불구하고 매우 빠른 경제성장과 사회문화 변동을 경험한다.
이제 다른 한편으로 같은 시기 소련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탈린의 공산주의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스스로 정당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냈고, 이탈리아공산당의 정치적 정당성까지도 약화시킨다. 첫째, 모스크바를 중심축으로 하는 제3인터내셔널은 개별국가 차원에서는 그리 맞지 않는 외투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공산주의 진영 아래에 있던 동유럽국가들에서 공산주의 이념은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환경으로 인해 위기를 맞이한다. 둘째, 스탈린의 사후에 밝혀진 대로 스탈린의 공산주의는 철저한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모두가 해방된 평등한 상태로 나아간다고 예언하는 공산주의는, 한 지도자의 반인륜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인권 탄압으로 인해 정당성에 훼손을 입었다. 이탈리아공산당뿐만 아니라 유럽의 공산당들이 일대 혼란을 겪는다. 언급한 첫 번째 문제는 공산주의가 그들의 유토피아적인 이론을 지나치게 낙관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두 번째 문제는 권력 그 자체가 타락하고 부패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대내외적 여건 속에서도 이탈리아공산당은 비록 집권당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상당한 득표율을 이어나간다. 여기에서 다시 이탈리아 국내로 시선을 돌려 68~69년의 ‘뜨거운 가을’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 68운동이 맹위를 떨치던 같은 시기 이탈리아에서도 기득권과 자본가에 대항하는 운동이 널리 확산된다. 노동조합의 조직력과 전술은 종종 자본가들을 압도할 때가 있었고, 노동권, 인간다운 작업환경 등 그들이 쟁취하고자 했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탈리아의 사회사를 들여다보면 꼭 들어맞지는 않지만 우리나라보다 대략 20년 정도 앞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정권이 처음으로 들어서던 90년대의 길목에서 비슷한 노동운동이 크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이 이탈리아에서 전국적인 현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이탈리아의 북부와 남부는 경제 기반이 매우 다르고 가족 문화도 상이하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라치오와 에밀리아로마냐, 토스카나 등을 포함한 중부 지역을 따로 때어내어 분석하고 있다. 커다란 의미에서 남부는 근대 이전부터 이어져오던 라티폰도(대농장) 중심의 경제 기반이 근대화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소수의 지주와 절대 다수의 소자작농, 임노동 등으로 유지되던 라티폰도 시스템은 근대 이후에도 영속해 왔다. 이를 견디지 못한 다수의 남부인들이 새로운 일을 찾아 북부로 북부로 향하지만, 여전히 남부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원주민들은 한층 저 열악하게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칼라브리아 지역을 위시한 남부지역으로 산업기반시설은 크게 들어오지 않았고, 도시 계획은 난개발로 귀결되기 일쑤였으며, 반면에 마약과 총기 등 지하경제는 활개를 쳤다. ‘공장’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힘을 모았던 북부와 달리, ‘농장’ 기반의 경제를 지녔던 남부에서는 그러한 조직력이 목격되지 않는다. 오히려 남부인들은 자신들의 개탄스러운 상황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줄 정당으로 군주주의정당 등 극우파를 지지하기까지 한다. 한편 중부의 상황은 북부 또는 남부와는 조금 다르다. 이곳에서도 근대화가 진행되었지만 북부의 트라이앵글(토리노-밀라노-제네바)처럼 대규모 공장이 들어선 것이 아니라, 의류 또는 수공예품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공장이 들어섰고, 그 자체로 독특한 노자 대립 양상을 보여준다.
다시 68운동 시기로 되돌아온다면, 그 연장선상에 있는 78~79년의 학생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과 10년의 간격을 두고 있지만 이 때의 사회운동은 더 이상 68운동 시기의 사회운동과는 성격이 같지 않다. 고등교육의 수준은 올라갔지만 고용 없는 성장에 좌절한 청년들은 사회에 대해 불만을 성토한다. 페미니즘 등 새로운 사상적 조류가 합류했던 것도 이 시기이다. 이 시기는 ‘학생운동’이라는 점에서는 군사독재 시절의 우리나라를 떠올리게 하지만, 만성적인 실업과 청년들의 좌절감에서 촉발되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97년 외환위기 이후의 우리나라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학생운동은 지리멸렬하게 끝난다. 그들이 요구한 변혁의 목소리는 컸지만 걸맞는 성과가 뒤따르지 않았다. 여기에는 미국의 소비문화가 체티메디(중산층)에 뿌리 깊게 자리잡으면서 사람들이 물질적 안온함에 익숙해졌다는 요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주목했던 것은 폴 긴스버그가 지적한 대로 이들 학생들에게는 행동은 있었지만 이론이 없었다는 것이다. 폭력까지 서슴지 않았던 학생들의 사회운동은 운동하는 순간에는 커다란 동력을 이끌어냈으나 멀리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 자리에서 휘발되고 말았다. 저자는 이를 두고 그들이 이론적인 정교화를 도외시한 채 당면한 문제에 저항하는 것에만 천착한 데에서 비롯된 사회운동의 한계라고 지적한다.
톨리아티의 뒤를 이어 '역사적 타협'으로 정당의 노선을 수정했던 베를링구에르의 공산당 아래에서는, 애초에 그들이 과업으로 삼았던 민중 해방이나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목적의 달성이 요원해졌다. 학생운동이 실패한 것에 환멸한 일부 젊은이들은 테러리즘으로 눈을 돌린다. ‘붉은 여단’의 젊은이들이 기민당에서 41대 총리를 지낸 알도 모로를 납치하여 협상을 시도하고, 수일 후 살해한 사건은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폭력을 통해 자신들의 언어를 정당화하는 사회운동이 어떤 기형적인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이탈리아 국민들은 두눈으로 확인하였다. 이 사건은 매우 비민주적이고 과격한 이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국민으로 하여금 민주적인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근현대사를 읽으면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관심이 참 많다는 것이다. 다른 서유럽 국가들보다도 이탈리아의 투표율은 전반적으로 높은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자국의 정치가 민주적으로 작동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아니오’라고 답한 이탈리아인들의 비율 역시 다른 서유럽 국가들보다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현재의 정치가 불만스럽기 때문에 열심히 투표장에 나가는 것인지, 인내심을 갖고 투표에 참여하지만 자신이 보내주는 관심에 비해 정치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지 그 선후관계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이탈리아인들의 정서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우리나라에서도 상황이 비슷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얼마전 586 세대를 분석한 시사 프로그램을 보았다. 특정 ‘세대’를 두고 우리 사회 전반을 분석하기에 우리 사회에는 세대 뿐만 아니라, 지역과 성별, 종교 소득수준 등 다른 복잡다단한 균열도 많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586 세대’라는 단어가 회자되고 분석의 대상이 되는 데에는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민주화로 나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맞서 싸웠지만, 숙의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민주적 가치를 수호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기성세대를 보며, 젊은이들은 70년대 후반 이탈리아의 젊은이들이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변혁을 외쳤지만 군인 또는 경찰(카라비니에리)과 대치하며 폭력과 완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70년대 후반의 이탈리아 청년들과 우리나라의 586세대는 묘하게 중첩된다.
우리가 흔히 ‘불평등’한 사회라고 할 때, 또는 양극화의 골이 깊어진다고 할 때, 이는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다. 다만 이탈리아의 근현대사를 보면 향후에 예측해볼 수 있는 시나리오가 몇 가지 보인다. 첫째, 생존적 불안에 시달리던 남부 이탈리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에 불만이 많은 이들이 극우정당에 의지할 수 있다. 다만 우리나라에는 유럽과 같은 극우정당이 없을 뿐인데, 특정 타깃에 대한 ‘혐오’ 분위기가 쉽게 형성되는 요즈음의 세태를 보면 사실 극우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서가 확인되기도 한다. 둘째, 젊은이들의 좌절감과 분노는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해칠 정도로 심각한 것인지는 몰라도, 70년대 후반의 이탈리아의 학생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막상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젊은이들의 요구는 매우 다양하고, 서로의 요구에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 역시 많으며 어떠한 변혁으로 나아가기에는 집단적인 동력이 없다. 셋째, 이탈리아의 고도성장기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소비문화와 물질문명은 매우 견고해서 사회적 연대로 나아가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예전처럼 끼니 걱정을 하지는 않는 이 시대에 현재 그나마 누리고 있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요구를 하려는 사람들은 드물다.
지금까지 9,000km나 되는 거리에 우리나라와 닮은 국가의 이야기였다. 두 나라 모두 반도에 자리잡고 있고 냉전시기 극심한 이념 대립을 겪었다. 이탈리아의 인구는 6천만 명으로 남한보다는 많고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는 작다. 또 남북간에 사회경제적인 격차가 크다. 1인당 GDP는 3만 3천 달러로 우리나라(3만 2천 달러)보다 약간 높다. 공동체보다는 가족을 우선시하는 가족주의까지도 비슷하다. 이처럼 이탈리아의 근현대사는 귀기울여 들을 만한 역사적인 내러티브를 가득 가지고 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