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나와 비슷한 나이에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싸우다 전사한 젊은 학도(學徒)가 이렇게 좋은 글을 남긴 걸 보면, 그의 천재성에 먼저 감탄하게 된다. 종교사회학이 내게 낯설다손 치더라도, '죽음'과 '오른손'이라는 소재를 사회와 연결지어 체계적으로 논리를 구축해나가는 그의 침착함과 담담함, 성실함이 정말 놀랍다.
1. 죽음
기존에 축적된 민속지적 연구를 볼 때, 에르츠가 내린 결론에 따르면 개인의 죽음은 단지 사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으며 사회적 차원의 의미를 띤다. 즉 집합으로서의 표상이 작용한다. 사회를 이루는 개인의 소멸은 영속(永續)이라는 사회의 존재 목적을 위배한다. 따라서 사회는 분리-주변화-재통합 과정을 통해 사회가 영속할 수 있는 의례를 규정한다. 첫째, 개인의 죽음이 발생하면 그 사체와 근친은 사회로부터 '분리(分離)'된다. 둘째, 일련의 애도 과정을 거치는 동안 죽은 자의 육체와 영혼은 물론 주변인들까지도 속(俗)도 아니고 영(靈)도 아닌 모호한 지대에 '주변화'된다. 셋째, 사체의 살이 완전히 부패하고 확실하고 견고한 상징으로서 뼈만이 남는 시점에 중간지대에 머물던 이들은 '재통합'된다. 즉 산 자들은 사회로, 죽은 자는 조상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중 장례라는 의례 행위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촉발시키지만, 사회적인 의미를 지니는 다른 여러 과정들—가령 성인식, 결혼식—또한 이중 장례와 동일한 양식으로 구성된 집합표상을 띤다.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심대한 실존적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을 규정하고, 원래에 영속되어 오던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평소대로 유지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하지만 에르츠가 또한 지적하는 것은, 성대하고 소란스럽게 벌어지던 장례 의식이 현대 사회에 와서는 간소해지고 형식적인 형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탈종교화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누군가의 죽음을 사회적 사건이 아닌 개인 수준에서 정리하는 경향이 있다. 간단한 조문과 짧은 애도 기간은 사회라는 거대한 구체로부터 박리된 개인들이 오늘날을 살아남는 방식을 보여준다.
2. 오른손
오른손과 왼손은 그 대칭적인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우를 너무나 당연시한 나머지 우리 인간의 신체에 각인된 사회문화적 압력의 영향을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과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손이 더 편했기 때문에 오른손 사용을 선호하는 것일까?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각국의 언어를 보면 '오른쪽'에는 긍정적 의미가, '왼쪽'에는 그 반대의 의미가 부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르츠는 유럽-인도어족들의 사례—예컨대 프랑스어의 droit(오른쪽)은 '쭉', '그대로', '옳은' 등의 의미를 지닌다—를 들고 있지만, 한국어도 비슷하다. '오른'은 '옳은'과 발음이 겹치고, '외-'라는 접두어는 동떨어진 사물이나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토록 대칭적인 왼손과 오른손을 구분하고 우열을 가르게 된 이유 또는 기제는 무엇일까? 마치 동양의 삼강오륜(三綱五倫)에서 상하(上下)—부자(夫子), 군신(君臣), 부부(夫婦), 장유(長幼)—가 자연히 존재하는 것처럼, 해가 동(東)에서 떠서 서(西)로 진다는 것,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 즉 모든 자연 현상과 사회 현상에 일원적인 것은 없다. 무언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대편에서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좌우(左右)는 음양(陰陽)만큼이나 이원성에 부합한다. 모든 사회가 그러하듯 짝을 이루는 두 존재가 있을 때, 사람들은 어느 한 쪽에 더 가치를 부여하고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에르츠는 종교 사회학 관점에서 이를 먼저 성(聖)과 속(俗)을 구분한다. 예를 갖춰야 하고(악수를 하고) 힘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칼자루를 쥐는) 일에는 오른손이 쓰인다. 반면 액운을 막고(왼손에 반지를 끼고) 자신을 막아내야 하는(방패를 쥐는) 일에는 왼손이 쓰인다.
끝으로 에르츠는 모두가 '양손잡이'가 되는 사회를 떠올려본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좌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치밀한 분석과 정교한 논리 전개에 따른다면 이 세상에 반대되는 두 성질이 현존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을 아래에서 위로 흐르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다만 우리가 단순히 생리학적인 결과라고 치부해 왔던 것들이, 사실은 사회문화적 압력에 의한 것일 수 있음을 제시하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이 그러한 사회적 역할을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살아나가야 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fin]
……최종 매장은 임시 매장과 뚜렷이 대조된다. 최종 의식에서 유해를 수습해 이전하는 것은 단순한 장소 변경이 아니라 죽은 이의 상태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다. 유해를 옮김으로써 죽은 이는 사후부터 처해 있던 고립 상태에서 빠져나와 조상의 몸과 재결합할 수 있다.
—p. 37~38
……한편에는 죽은 자를 씻기고 새 옷을 입혀 조상들의 세계로 보내는 의례가, 다른 한편에는 죽은 자의 가족을 산 자들의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의례가 존재한다. 또한 이 양자 사이에는 완전한 대칭성이 성립한다.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단 하나의 해방 행위가 [죽은 자와 산 자라는] 서로 다른 두 범주의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고 보는 편이 낫다.
—p. 48
청소년이 그에게 가해진 시련을 극복해야만 집단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죽은 자도 의례에 의해 죽고 다시 태어나야만 비참한 상태에서 평온한 상태로 이전해 참된 영혼의 지위에 올라설 수 있다.
—p. 57
죽음이 그러하듯, 배제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사회는 자기 자신을 믿고 있다. 따라서 정상적인 사회라면 자기 실체의 일부였고 자신의 표식이 각인된 개인이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삶이 이기는 것이다.
—p. 62
죽음을 이루는 물리적 현상들, 혹은 죽음에 이어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들은 그 자체로 집합적 표상과 감정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표상과 감정에 일정한 형태를 부여하는 데는 일조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 현상들은 집합적 표상과 감정에 물질적 기반을 제공한다. 사회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그 고유의 사고와 감정의 방식들을 투사한다. 그리고 역으로 세계는 그 방식들을 시간적으로 고정하고 규제하고 제한한다.
—p. 67
우리의 두 손만큼 완벽하게 닮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두 손은 또한 얼마나 불평등하던가!
명예와 돋보이는 칭호, 특권은 오른손으로 향한다. 오른손은 행위하고 명령하고 장악한다. 반대로 왼손은 멸시받고 비천한 보조 역할을 맡는다.
왼손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은 거들고 보좌하거나 아니면 잠자코 있을 따름이다.
오른손은 모든 귀족의 상징이자 전형이며 왼손은 모든 서민의 상징이자 전형이다.
오른손에 부여된 작위는 무엇인가? 왼손이 겪는 예속은 어디에서 오는가?
—p. 73
신성한 힘의 상실과 해로운 힘의 획득 사이에는 눈에 띄지 않는 이행이 있다. 따라서 종교적 의식을 그 시초부터 점진적으로 지배해온 분류체계 안에는 속된 것과 불순한 것의 자연적 친화성이 존재한다. 그 둘은 거의 동등하다고 말할 수 있다. 속과 불순은 서로 결합해 성스러운 것의 반대편에서 정신세계의 부정적인 극을 형성한다.
—p. 79
‘오른쪽’과 ‘왼쪽’이라는 단어의 의미에도 같은 대립이 나타난다. 오른쪽은 체력과 ‘재주’, 지적 ‘정확함’과 양식, ‘올바름’과 도덕적 청렴, 행운과 아름다움, 법적 규범과 같은 관념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반면 왼쪽은 이와 반대되는 대부분의 관념을 연상시킨다.
—p. 84
……생득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승리를 거둔다. 오른쪽과 왼쪽에 관한 지적・도덕적 표상들은 모든 개인 경험에 선행하는 진정한 범주들이다. 왜냐하면 그 표상들은 사회적 사고의 구조 자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험론자들도 옳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불변의 본능도 형이상학적이고 절대적인 소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범주들은 개인과 관련해서만 초월적이다. 그런데 집합의식이라는 자신의 발생 환경에 놓이게 되면, 이 범주들은 변화하기 쉽고 복잡한 조건에 의존하는 자연적 사실처럼 나타난다.
—p. 9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