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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와 그런지 그 생각이 문뜩문뜩 나누마요. 그때 나는 고라니 한 마리를 잡았는데 말입니다. 그기이 암놈이었소. 거참, 희한한 일이었소. 다음 날 고라니를 잡은 자리를 지나갔다 말입니다. 그랬는데 암놈 피가 흐른 자리에 수놈 한 마리가 나자빠져서 죽어 있더란 말입니다. 총 맞은 자리도 없고 멀쩡한 놈인데……. 그, 그기이 다, 허 참 그기이 다 음양의 이치 아니겄소?”
—p. 39
그는 백성을 우중(愚衆)으로 보았었고 배우기를 잘못한 권력자들이 배부른 돼지라면 우매한 백성들은 배고픈 이리라 하였다. 체모 잃은 욕심, 권력을 휘두르며 권태로운 삶을 즐기려는 수탈자에게 우중들은 쓰기 좋은 도구요, 우중이 만일 깨쳤다고 보면 무지스런 파괴의 독소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 계기가 와서 이 상호간의 자리가 뒤바뀌었을 때 소위 그것을 혁명이라 일컫기는 하나 정신적 영역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는 악순환의 되풀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p. 74 ~75
“문어란 놈이 제 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잘라 먹고 대가리만 남아서 먹물을 뿜어낸다고 제 몸이 보전되겠소? 모리만 가지고 안 되지요. 운신을 해야…….”
—p. 130
왜 치수는 막연하게 기약도 없이 산속을 헤매려 왔던가. 분노하고, 추상같이 마음이 떠들썩하게, 그게 싫었던 것일까. 자기 혼자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자기 혼자서 손상된 권위를 찾았다 생각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절대적인 권위의식에, 그러나 치수는 자기 전부를 투신할 정열을 잃고 있었다. ……끝장을 내기 전에는 치수에게 그 문제는 괴로운 숙제이다. 싫든 좋은 의무이기도 했었다. 아무리 싫어도 싸움터에서 등을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사랑하는 정열도 없으면서 적병을 향해 치달릴 수밖에 없는 하나의 관념, 굳어져버린 관념의 관습, 거의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된 윤씨부인과 구천이, 우관선사와 김개주, 문의원과 월선네와 바우와 그의 아낙이 얽섞여져서 형태가 만들어진 있을 법한 사실은 자신이 지금 추적하고 있는 구천이를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게 될지 그것은 치수 자신도 명확히는 알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이었다.
—p. 179
천지 만물이 시작과 끝이 있음으로 하여 생명이 존재한다고들 하고 탄생은 무덤에 박히는 새로운 팻말의 하나라고들 하고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에서 집념은 율동이며 전개이며 결실이라고들 하고, 초목과 금수와 충류(蟲類)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들 한다. 인간의 죽음은 좀 사치스러워서 땅속 깊숙이 묻혀지고 혹은 풍습에 따라 영혼의 천상행(天上行)을 위해 편주(片舟)에 실어 물 위에 장사지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짐승들같이 고기밥이 되는 일도 있고 짐승에게 창자를 찢기기도 하고 까마귀밥이 될 수도 있다. 이 갖가지 죽음의 처리를 앞두면서, 헛된 탄생에 삶을 잇는 그동안을 집념의 조화는 참으로 위대하여 옷을 걸치고 언어를 사용하고 기기묘묘한 연극으로써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비극과 희극이 등을 댄 양면 모습이며 무덤의 팻말을 향해 앞뒤 걸음을 하는 눈물 감춘 희극배우, 웃음 참는 비극배우의 일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p. 200~201
‘시꺼멓게 구워서 진이 다 빠져버린 숯덩이도 불을 붙이면 붉게, 뜨겁게 타오르지 않습디까? 사마천이 사내자식으로서 그의 근본을 잃고도 소금덩이 핥듯이 세월을 아껴서 핥았습죠. 아무리 세월이 일장춘몽이라지만 그자에게는 꽤 쓸모 있고 오붓했을 겝니다. 그것도 싫으시다면 연산군이 되십시오. 그까짓 것 참외 씹어돌리듯 와작와작 먹어치우시오. 만석 들판에서 뒹굴어보는 겝니다.’
—p. 203
환이 다시 깨달은 것은 평풍이 둘러쳐진 것 같은 산속과 넓은 산 밖의 세상을 비춰주는 해와 달이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산속은 차갑고 고요한 달의 세계요, 산 밖은 지글지글 타는 해의 세계, 하나는 환(幻)과 같이 적막한 평화, 하나는 고뇌의 몸을 떨어야 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p. 308
‘하온데 선생님, 이 영신이 가득 차 있을 법한 적막한 산중에서 한 발만, 사람 세상으로 나갈 것 같으면 사람이 아닌 자신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어인 까닭이오니까. 기름이 잦아드는 등잔 같고 곰팡이 슨 서책 같고 벌레 먹은 기둥 같고 사람들의 얼굴은 온통 물건으로만 보이니 말입니다. 누굴 미워합니까. 아니올시다. 미워하는 척했을 뿐입니다. 영신도 없고 목숨도 없고 오로지 영원불멸의 세월만이 영신을 보고 조롱하며 목숨을 보고 딱해하는 것이겠습니까. ……선생님은 세월의 뜻을 아시고 세상과 하직하실 수 있겠습니까.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지금 눈앞에는 흰 눈보다 잿빛 나뭇가지가, 그리고 푸른 소나무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 저기, 저기 노루가 한 마리 뛰고 있습니다!’
—p. 318~319
“말 말게. 기백 년 세월 동안 골수에 박힌 생각은 어느 나무에다 걸어놓고? 수백 수천의 잔뿌리가 골수에 박혀서 이것을 치면 저것이 솟아나고 저것을 치면 이것이 솟아나고 지금의 나라 꼴이 그 모양일세. 양반들 머리통하고 흡사하지. 그러니 하나를 알면 그것이 전부인 줄 아는 상민들의 우직함이 부럽다 그 말 아닌가. 지켜야 할 체통이 태산 같은데,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아래 위 훑어보고, 그러다 보면 이도 저도 아닌 게 양반이며 글줄이나 읽었다는 그게 또 우환이라. 쇠스랑이든 곡괭이든 들고 나설 수 있는 상민 천민이 얼마나 홀가분할꼬? 그네들은 짐승이 적을 만났을 때 그것을 습격하듯이 잽싸고 교활하고 용감하거든. 삼강오륜의 법은 몰라도 그네들은 뭐가 옳고 그른가를, 무엇을 막아야 하고 무엇을 몰아내야 하는가를 심장으로 느끼거든.”
—p.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