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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명(開明)에의 물결은 시시로 일고 있었으나, 그것이 일개 정권욕을 위한 이용물이든 외래 문물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이든 혹은 진실한 우국충정의 개혁운동이든 하여튼 개명의 물결은 오백 년 왕실을 주축으로 하여 썰물 밀물같이 밀려왔다가 밀려가곤 했는데 물론 역사의 필연의 과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 혹은 신의 의지는 공명정대의 역학(力學)을 기간(基幹)으로 하되 잔가지 잔뿌리는 역사의, 신의 의지 밖에서 우연과 변칙이 시간 공간 속을 소요(逍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고 다만 필경에는 우여곡절하여 그 기간으로 귀납될 것을 신이나 역사 그리고 예지의 사람들이 알고 있으며 믿고 있을 뿐이다. 지금 동방의 작은 등불 같은 조선의 백성들은 동트는 하늘을 바라보기 위해 새벽잠을 깨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 무거운 오수(午睡)에서 눈을 뜬 혼미한 얼굴이며 한밤중 뇌성벽력에 잠이 깬 경악의 얼굴이며 주야를 헤아리지 못하고 어디까지 왔는가를 알지도 못하며 밀려오고 밀려가는 개명의 물결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꽤 여러 해 동안을.
중국의 정신문화, 그 속에서도 유교를, 유교 중에서도 철학과 인륜 도덕의 정주학(程朱學)을 숭상하였던 이조 오백 년 동안 그 이지적이며 귀족적인 사상을 골육으로 한 절도 높은 선비들과 왕실에 밀착된 명문 거족들은 기존의 정신적 가치를 옹호하며 또는 외향적 기득권을 주장하며 지금도 수구(守舊)를고집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참으로 부수기 어려운 거대하고 준엄한 조선의 산맥 그 자체는 아니었는지. 설령 개명했다는 나라가 총칼을 들이대어 난도질을 한다 하더라도 그리 쉬이 부서질 성질의 것은 아닌 성싶다. 지금 일본은 이 땅에 와서 모든 것을 장악하려 하고 또 장악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갖가지 이권과 국가의 권리와 국토, 인명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친일내각을 내세워 아무리 제도를 고쳐보아야 오백 년을 구석구석까지 배어든 사상은 졸지간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소수의 조선인들이 단시일에 만들어진 민주주의라는 자[尺]를 미국서 가져와 만민공동회를 열고 독립협회를 만들고 신문을 낸다 하여 이 나라 백성들 몸에 맞는 옷이 되어질 리가 없고, 지난 갑신년(甲申年) 일본도 총 나부랭이로써 혁명을 일으켰다 하여 일본에서철머 일본도가 양총으로 바뀌어짐으로써 무사도(武士道)가 군국주의로 탈바꿈하듯 용이할 수는 없다.
—p. 59~60
……백성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연 종교 또는 무속(俗)의세계인데, 유교에서 비롯된 삼강오륜의 도덕과 예 숭상에서 온 관혼상제의 제도조차 무속의 빛깔을 띠었다 하여도 무리한 얘기는 아닐 성싶다. 제반의 행사는 항상 무속을 동반했으며 최고 도덕인 효 사상은 조상으로 하여금 자연 종교에서의 제신(諸神)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였으니 신앙의 대상이라면 그 어느 것도 주저하지 않는 저 유교와 불교가 오랜 세월 아무 알력도 없이 공존해왔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었고 어느 하나만을 믿는 사람도 드물었다. 저 서학(西學)이 있기까지는. 상호 연관되고 서로 얽혀서 그러면서도 불가사의하며 모호한 것을 맹신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재앙에 대한 두려움, 천벌에 대한 무서움으로 가득찬 소박하고 선량한 체념의 무리가 이 서민들이다.
—p. 62
‘기가 막히는 밤이고나. 사램이라고는 어느 구석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만 같다. 무섭다. 낮에 들끓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이꼬? 어디 가기는 가아? 모두 이녁 집으로 돌아갔겄지. 날짐승도 해가 지믄 제 둥우리로 찾아가고 산짐승도 제 구멍으로 들어가는데 나만 갈 곳이 없네. 내가 사는 집 그기이 어디 사람우 사는 집이건데? 허깨비들, 음 그래 허깨비들이 사는 집일 기다. 나도 허깨빈지 모르겄다. 아마 나도 허깨빌 기다…….
—p. 104
‘생각할수록 모르겠어. 섣달그믐 날 밤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지 않어? 그래서 꼬박이, 음, 자정까지 있어도 말이야. 어디 세월이 찾아와서 한 해를 보내고 떠난다는 작별 인사를 한 일이 있었나? 어째서 세월을 간다 하는고? 정월 초하룻날 떡국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는다 하는데 마찬가지 아냐? 세월이 찾아와서 한 해 동안 함께 있게 되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어? 그래도 사람들은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온다고 말들 한단 말이야. 날마다 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고, 그게 세월이란 말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늙어가고 죽고 또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걸까? 세월, 시간, 그게 뭐길래?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또 지고 사람이 죽고 아이가 태어나고, 알 수 없군. 정말 윤회라는 게 있다면 왜 사람이나 짐승이나 벌레나 초목이나 그런 것들이 빙빙 돌아야 하는 걸까? 세월은 바람일까? 바람이 사람들을,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어디로 자꾸 몰고 가는 걸까?’
—p. 171~172
이튿날 저녁때 환이는 제 입은 저고리를 벗어 시체를 싸고 이름조차 기억하기 싫은 북쪽 끄트머리 어느 깊은 골짜기에 여자를 묻었다. 얼음조각같이 싸늘한 달이 능선 위에 댕그머니 걸려 있었다. 꺼무꺼무한 능성과 맞붙은 하늘을, 환이는 그 푸른 은빛 나는 하늘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환(幻)이다. 바람개비같이 돌고 있는 지나간 지상의 세월은 지금 없는 것이다. 진실로 없는 것이다. 자취 없는 허무의 아가리였던 것이다. 여자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져버린 바람이었던 것이다. 능선을 감싸듯 푸른 은빛의 밤하늘,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있을 저 머나먼 곳에서 다시 여자를 만날 수 있는가고 환이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본다.
—p. 261
“나도 모르겠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백성을 위하는 것도 하나의 도(道)가 아니겠느냐? 나는 그 도 밖에서 이는 일시적 삭풍일 게다. 혼돈 속에서만 말을 몰 수 있는 위인이야. 화평스런 대로를 시위 소리 들으며 대교 타고 갈 위인이 못 된다 그 말이니라. 내 그동안 수많은 군졸을 거느리고 탐관오리를, 악독한 양반들을 목 베고 추호 가차 없었으나 그게 사명감에서 한 짓인지 진정 자신 못하겠다. 그 밀물 같은 시기가 지나가면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바닥 모를 허무의 아가리가 밤새껏 나를 괴롭히는 게야. 실은 내 속에 이는 원한도 진정 그게 원한인가 믿을 수 없구나. 불민한 너를 위한 아픔도 진정 그게 아픔인가 믿을 수 없구나.”
—p. 272~273
‘사람우 사는 이치가 이러저러하고 여사여사하다고 글쟁이들은 말도 많더라마는, 날씨도 갠 날 흐린 날 눈비 오고 바람 불고 노성벽력 치고 하듯이 사람우 살아가는 펭생도 그 같은 거 아니겄나. 그런 거를 낚싯대 들고 강가에 앉아서, 그거는 좀생이 겉은 인생인 기라. 사시장철 갠 날만 있다믄 그기이 어디 극락이겄나. 산천초목도 사람도 다 말라 죽어부리는 지옥이지 머겄노 말이다. 그러니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오는 그기이 땅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이치이듯이 사람으 경우도 매한가지 이치일 기니 우찌 낚싯줄이나 내리놓고 가만 있겄노. 용천지랄을 해보는 기다. 사나아 자섯으로 태어나서, 하기야 상놈으로 태이나서 받은 거는 천대밖에 없다마는 내가 그래도 이 강산에 태이났이니 아, 멩줄이야 탄탄하게 태이났지. 용천지랄을 하다가 아무래도 그렇그름 죽는 기이 나한테는 걸맞을 기구마. 용천지랄을.’
—p. 316~317
……거듭되는 학정에 거듭되는 민란, 그 악순환의 정점(定點)이 저 거대한 분화구 동학전쟁을 겪은 뒤 피곤한 농토와 농민은 겨우 그 명맥을 잇고 있었을 뿐 눈부시게 급변하는 정치적 현실에서—거의 주인 부재의 수렵장이었다 할지라도—망각된 존재였었고 농민들 스스로도 뜰 안의 한 그루 과목에 세금을 붙이던 무서운 가렴주구(苛斂誅求)에 과목을 베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그와 같은 포기의 자학을 씹으며 가사상태(假死狀態)로 도피한 시기,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은 일본제국으로 넘어갔고 새로운 실권자를 추종하는 새로운 세력군(勢力群)이 형성되는 혼돈 속에 권력과 동반하게 마련인 경제의 유동, 그 중에서도 후일 대다수가 농민들이 피땀에 전 땅을 버리고 남부여대 기약 없는 유량의 길을 떠나게 한 악명 높은 착취기관 동양척식회사 설립의 소지는 다져지고 있었다.
—p. 337~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