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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이나 사램이나 버려지라 카더라도 이 세상에 한분 태어났이믄 다 같이 살다 죽어얄 긴데 사램은 짐승을 부리묵고 또 잡아묵고, 호랭이는 어진 노루 사슴을 잡아묵고 날짐승은 또 버러지를 잡아묵고 우째 모두 목심이 목심을 직이가믄서 사는 것일까? 사램이 벵드는 것도 그렇지마는 짐승들은 와 벵이 드까. 사람은 약도 지어묵고 침도 맞고 무당이 와서 굿도 하지마는 말 못하고 쫓기만 댕기는 짐승들은 누가 그래 주꼬. 늘 혼자 사는데, 벵이 들믄 짐승들은 산속이나 굴속에서 혼자 죽겄지. 혼자 울믄서 죽겄지. 아아 불쌍한 짐승들아! 사람같이 나쁜 거는 없다.’
—p. 95~96
사철이 음산한 바람과 빛깔에 덮여 있는 것 같았고 두텁고 무거운 외투자락과 털모자와 썰매의 북국(北國)에서 이동진은 그네들의 문물제도를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바라보면서 생각한 것은 겨울 여름이 다 온유하게 지나가는 고향 땅, 철 따라서 물빛이 변하는 아름다운 섬진강 백사장의 솔내음 실은 바람은 아니었다. …….국호(國號)는 비대해져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요 왕은 황제로, 왕세자는 황태자로 승격한 동방의 조그마한 반도를, 어마어마한 현판 뒤에서 찌그러져가고 있는 초옥과 다름없는 나라의 주권(主權)을 생각했던 것이다.
……강토와 군주와 민죽에 대한, 오백 년 세월 유교에서 연유된 윤리, 그 윤리감은 또 얼마나 끈덕진 것이었던가. 본시 이성에서 출발하여 오늘날 굳은 감정으로 화해버린 그 윤리 도덕을 이동진은 한번 거역해보고 싶었다. 어떤 것에도 예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가치의 허실을 맹렬히 통박하며 천 근이나 되는 무게의 무위(無爲) 속으로 잠적(潛跡)한 최치수의 전철을 밟느냐, 아니면 이리떼 속에 스스로 몸을 던져 무리 속의 한 마리 이리가 되어 현실의 야망에다 몸을 살라버리느냐, 그것은 물론 모든 사태가 비관적이라는 데 대하 절망의 몸부림이기는 했다. ……결국 그는 서재인(書齋人)도 못 되고 행동하는 의인(義人)도 못 된다는, 보다 가혹한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p. 269~271
“어윤중(魚允中) 그 양반은 아까운 분이었소. 이십 년이 넘었구먼.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있을 때 말이오. 그때 청나라 정부에서 도문강(圖們江) 동북에 있는 조선사람들을 쫓아내려 했었거든. 그래서 어윤중이 그 양반이 종성(鍾城)의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시켜서 백두산을 탐색하게 하고 정계비(定界碑)를 찾았는데 정계비가 있는 곳은 도문강이 아니요 토문강(土門江)이었더란 말이오. 그 강은 북쪽으로 흘러서 송화강(松花江)으로 빠지거든. 그러니 청나라 사람들 말문이 막혀버린 게요.”
—p. 272
농촌의 백성들은 좀 이상한 습성이 있다. 몇천 몇만의 볏섬을 들이는 거부들, 물론 그들은 모두 양반이요 문턱이 높은 탓도 있겠으나, 그네들 문전에는 되도록이면 아쉬운 말을 하러 가는 것을 꺼린다. 같은 상사람, 농사꾼으로서 볏섬 백이나 오심쯤 하는 집을 따습다 하고 어려운 경우 신세를 지려고 한다. 하인배들이 우글거리는, 대문과 울타리가 겹겹 싸인 집보다 항상 문이 열려 있고 발만 들여놓으면 집 임자의 얼굴을 대할 수 있다는 무관함 때문일까. 하기는 농민들만은 아닐 것이다. 일반 서민들은 여전히 권위를 무서워하고 또 외면하려 한다.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가진 자들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만큼 수탈만 당해온 역사였으니까. 그래서 흉년이 들면 자농가(自農家)를 괴롭히지만 지주들 고방을 습격하는 일이란 드물다. 그리고 도방에 있는 서민들과 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삼강오륜을 완명(頑冥)하게 받아들인 농민들은 아사를 했으면 했지 걸식을 수치로 여기는 의식이 강하였다.
—p. 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