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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부—하동(河東) 이야기를 읽고일상/book 2022. 2. 26. 07:34
『토지』 1~4권은 하동 평사리에서 전개되는 구한말 양반과 평민들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크게 첫 번째 부(部)를 이루게 된다. 박경리 작가는 1926년 출생으로 일제강점기이기는 하지만 경술국치로부터는 꽤 지난 시점에 유년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말기 또는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는 동안 하동 평사리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매우 현장감 있게 전개되어서 19세기 초 사회상을 어떻게 속속들이 아는지 궁금증이 든다. 윤씨 부인이 괴정으로 목숨을 잃는다든가, 서희가 간도로 넘어간다든가 하는 대목이 지나치게 생략되는 감은 없잖아 있지만, 그럼에도 손에서 『토지』를 놓을 수 없는 건, 바로 그러한 생생함 때문이다.
이야기가 주는 현장감은 토속적이고 적나라한 평민들의 사투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한말 조선을 바라보는 매우 다양하고 입체적인 시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양반과 평민, 외세와 자주라는 대립구도가 사분면을 이루고, 그 공간 위에 각 인물들이 저마다의 좌표를 점하고 있다. 가령 조준구는 양반이면서도 외세에 편승하는 인물(양반+외세)이고, 김훈장은 양반이면서 왕조에 대한 신념이 투철한 인물(양반+자주)이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사건을 두고 조준구나 김훈장이나 대동소이한 인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본다면, 구한말의 사회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즉, 조준구는 자신이 부정하게 축적한 재산이 강탈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동학군을 경계하는 반면, 김훈장은 양반을 처단하고 다닌 동학군을 괘씸하게 여기는 동시에 그들이 일본군이 개입할 명분을 제공함으로써 자중지란을 초래했다고 평가한다.
한편 양반에 비해 평민들의 스펙트럼은 보다 넓고, 따라서 의식의 흐름도 매우 역동적인 편이다. 평민들은 외세의 개입 이전에 기본적으로 양반들의 수탈을 감내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외양을 볼 때 평민들의 삶은 유교와 불교를 섞어 놓은 듯하지만, 동시에 무속신앙에 크게 의지하며 살아간다. ‘땅’을 숭상하고, 절손(切孫)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모습은 맹목적이지만 순수하다. 그들은 오백 년 조선왕조 내내 이어진 양반제도에 철저히 순응하면서 자조도 하고 체념도 하지만, 무서울 정도의 끈기로 땅을 일구며 산과 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평민들의 스펙트럼을 보자면, 쇠락해가는 양반제도의 틈을 비집고 한 재산 축적해보려는 귀녀나 칠성이와 같은 존재가 있는가 하면, 서자라는 신분을 넘지 못하고 화적민이 되어 버린 환이 같은 인물도 있다. 명목상 노비 신분이지만 일찍이 글을 깨우치고 사회에 자각을 가지고 있는 길상이 같은 인물(평민+자주)도 있으나, 급변하는 조선말 정세 속에서 평민들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양반들조차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시절이다. 하지만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저마다 진실을 일정 부분 담고 있다.
평사리의 구심점이 되었던 최참판댁은 가문을 계승할 자손이 없다는 내부적 사정과 외세 개입과 사회적 혼란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겹쳐 결국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된다. 쇠락하는 최참판댁의 이야기는 500년을 지탱해왔던 사회의 기간(基幹)이 수명을 다하고 맥없이 물러나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도덕 관념이 실추되고 인간성이 옅어져가는 당대 사회상도 엿볼 수 있다. 최치수의 죽음과, 별당아씨의 야반도주, 임이네의 귀환과 행패, 조준구와 홍씨 부인의 가렴주구는 혼란한 시대 속에서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밖에는 삶의 통로를 찾을 수 없었던 절박하고도 뒤틀린 사람들의 욕망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직까지 캐릭터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은 최참판댁의 마지막 후손—그러나 딸이기 때문에 가문을 이을 수는 없었던—인 ‘서희’라는 인물로, 강단있는 소녀지만 휘청이는 가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지 못하고 마침내 간도로 넘어간다. 2부에서부터는 공간적 무대가 하동 평사리를 벗어나 다롄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간도 일대를 바탕으로 한다. 자연히 시대적 배경도 더 진전이 이루어질 텐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