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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줏집을 나선 길상은 아무도 없는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든다. 역시 강아지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길, 사람도 시가도 모두 피곤한 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불타버린 폐허 옆을 지나간다. 군데군데 쳐놓은 이재민의 막들이 보채다 잠이 든 아기같이 적막 속에 엎드려 있다. 구릉진 곳을 휘청휘청 올라간다. 자작나무 몇 그루를 지나서 바위 옆에까지 간 길상은 바위에 등을 기대고 가물거리는 별들을 오랫동안 올려다본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별들은 저렇게 가물거리고 있었더란 말인가. 시가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방금 지나온 그 자리가 희미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무너지고 재가 되고 폐허로 변한 곳, 저 잿더미는 죽음일까? 저 사물의 변화는 과연 죽음일까? 끝이 없는 세월과 가이 없는 하늘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끝이 없고 가이 없는 것이라면 없을 것이다. 근원의 생명도 항구불멸이라면 근원의 생명이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도 없는 것이다. 다만 영원한 것이 어둠 속, 잠든 이 시각에도 쉬지 않고 숨을 쉬고 있을 뿐이란 말인가. 저 하늘의 별도 숨을 쉬고 있고 거적으로 둘러진 움막 속에 잠든 사람들도 숨을 쉬고 날개를 접은 가냘픈 벌레들도 숨을 쉬고 한 뿌리 풀잎, 한 줌의 흙까지 영겁의 위대하고 묵중한 시간을 호흡하며 더불어 가고 있을 뿐이란 말인가. 영겁으로 흘러가버린, 아니 지금도 흐르고 있을 그 숱한 사람들, 세월과 팔짱을 끼고 가던 사람들, 마음 바닥을 구르며 지신을 밟던 사람들, 그들은 과연 죽은 사람들일까?
—p. 67~68
“그러덩이 어느 날 아침에 깨달아지더라 말입꼬망. 잊어부리자. 아무리 해도 소앵이 없는 일 앙이겠능가. 사램이란 서두는 게 앙이오. 목수가 대피질하듯이 설설 살아야지비.”
—p. 155
“자고로 천하는 도적이 다스리는 게 아니고 성현이 다스리는 게야. 성현은 도덕이 높으시고 지혜로워서 도적의 침범을 용서치 않지. 그러나 도덕이 땅에 떨어지면 지혜로움도 땅에 떨어지고 그리하여 나라가 망하는 법이야. 홍수를 막기 위해서는 산에 나무를 심듯이 흑심 품은 이웃이 있으면 양병(養兵)을 하여 대비를 하고 이웃이 옳지 못할 때는 한발 더 나아가서 칼을 뽑아 칠 수도 있는데 학문이란 원래 사람으로서 옮게 가는 길잡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도적의 방편도 될 수 있고, 칼도 마찬가지, 우리가 뽑는 칼은 내 나라를 찾기 위한 충성과 희생이지만 왜놈의 칼은 탐욕과 죄악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둑의 무리 못지않게 경계를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현의 길을 배웠으되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모르는 무리 말이다. 이들이 도둑과 합세하여 나라를 망해 먹은 셈이야. 첫째는 왕실, 왕실은 왕실의 안녕만을 위해 백성을 배반했다. 둘째는 고관대작, 일신의 영달과 일문의 무사태평을 위해 백성을 배반했다. 셋째는 선비들, 제 한 몸 닦기 위해 청탁(淸濁)만을 가려 백성들을 이끌지 못했으니 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배움에의 길은 내 나라를 위한 것, 내 겨레를 위한 것, 총도 될 수 있고 칼도 될 수 있고 분필도 될 수 있고.”
—p. 168
“자결을 했다는 대부분의 유생들이 육순, 칠순의 고령이라니, 허 참,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나는 본시 옹졸하고 편협한 유생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나라를 이 지경으로 이끌어온 그네들 책임을 용서할 수도 없거니와 그러나 생각해보니 절식을 해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목을 찔러 죽고 아편을 먹고…… 칠순, 육순의 늙은이들이 말입니다. 늙은이들한테는 참말이지 자결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게요. 그러고 보니 유교적 윤리관 속에는 확실히 무슨 비밀이 있긴 있는 모양이오. 나는 어디까지나 그런 행위를 퇴영(退嬰)으로밖엔 생각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니까요. 뭔지 몰라? 꽃잎이 할랑할랑 지는 것 같고 설원(雪原)에 한 마리 사슴이 서 있는 것 같고, 왜놈들이 배때기 갈라 제치고 죽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게 있단 말입니다. 그 살기(殺氣)하고는 자못 다른,”
—p. 192
……도대체 어찌하여 새끼 한 마리만 나뭇가지에 남아 있어야 했으며 꾀꼬리가 날아가는 곳은 어디일까? 길상은 꾀꼬리가 날아가는 하늘을 멀거니 쳐다본다. 엿새쯤 지났을 때 꾀꼬리는 새끼를 찾아오질 않았다. 새끼 새는 제법 털에 윤이 나고 노랑과 검정의 빛깔도 선명해졌다. 나리야? 하고 부르면 여전히 삐욱! 하고 대답을 했고 방을 오래 비웠다가 돌아오면 횃대에서 뛰어내려 너무 기뻐서 입을 벌린 채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는데 참으로 열광적인 애정의 표시였다. 그런데 하나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무수한 살생을 자행하게 되는 것은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이거니와, 한 마리의 꾀꼬리 새끼를 키우기 위해선 날개가 상한 한 마리의 벌[蜂]을 위해 슬퍼하던 길상도 매일 살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하찮은 미물에게조차 각기 다른 성정이 있는 것을 알았다. 여치란 놈도 그 성정이 각기 다른 성싶었다. 아주 지독히 반항하는 놈이 있었다. 새 주둥이 속에서도 결사적으로 투쟁으로 먹지 못하고 내뱉는 일이 번번이 있었는데 이럴 때는 여치의 목을 비틀 수밖에 없다.
“나무아미타불!”
목이 비틀린 여치를 새 입에 넣어주고 다시,
“극락왕생하여라.”
하는 것이다. 지렁이를 꼬챙이로 자를 때도 손끝에 전해오는 생명의 꿈틀거림.
—p. 208~209
……산새는 산에 두어 자연의 섭리에 맡길 일이었다. 병이 났다 하더라도 어미에게는 병에 대한 처방이 있었을 게 아니냐. 그러고 보면 살려야 한다는 마음이 죽인 결과가 되었다. 때에 따라서 애정이란 이렇게 참혹한 것일까?
……어제부터 꾀꼬리 새끼의 죽음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윤보의 죽음을 생각한 것도 죽음이 갖는 동일한 뜻에서인지 모른다. 한 생명에 대한 자비와 다른 생명에 대한 잔혹, 꾀꼬리 새끼를 위해 여치의 목을 비틀어 죽인 일, 이 이율배반의 근원은 어디 있으며 뭐라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도 약육강식의 원칙이냐? 아니다. 사랑의 이기심이냐? 아니다. 애정의 의무냐?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선택이냐?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이 이율배반의 자비와 잔혹은 영원한 우주의 비밀이냐?
—p. 210, 214
풀잎에 손을 부벼 닦고 점심꾸러미를 망태 속에 집어넣은 용이는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아 담배를 넣는다. 영팔이처럼 희망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용이는 호되게 넘어져서 일어나질 못하다가 겨우 땅을 밟고 일어선 것 같은 느낌이긴 했다. 전신에 멍이 들어 얼얼한 아픔이 상기도 계속되고 있지만 발바닥이 땅에 붙어 있다는 안도감에 심신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수렁 속에 빠져들어 가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는 용이 머릿속에 불현듯 십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날마다 마을에서 송장이 나가던 무서운 그해,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스러지던 그 황막한 시기를 살아남았을 때 용이는 방종과 무기력의 수렁에서 기어나와 자기 자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번에는 용정을 휩쓸고 지나간 화재 뒤끝의 폐허 속에서 생활에 순응하던 구역질 나는 자기 자신과 작별할 수 있었다. 그 치욕스러운 생활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은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사치요, 희망이 없어도 좋았다. 내 자리에 내가 돌아왔다는 안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느냐. 용이 생각은 그러했고 잘게 갈라졌던 신경이 굵게 뭉쳐지면 메말랐던 바닥에 물이 고여드는 것을 깨닫는다. 사내로서의 자부심이 풍요한 사랑의 물길이 되어 흐르는 것을—용이는 월선의 체취를 강하게 느낀다.
—p. 323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큰 약점인가. 절망에서의 탈출 뒤에 온 희열이란 또 얼마나 서글픈 찰나인가. 희망이 일렁이는 금녀 가슴에는 뜻하지 않았던 조바심이 아프게 저 바다의 파도가 방천을 치듯 쉴 새 없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빼앗길 그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불안이 없다. 지금 금녀가 가져보는 앞으로의 자기 운명에 대한 기대와 흥미가 과연 희망적인 것인지 그 어떤 실마리도 잡아보지 못한 채 방향도 알지 못한 채 악몽 속에 허덕여온 여자는 희망 그 자체를 겁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만금을 가졌어도 높은 베개에 깊숙이 잠드는 사람이 허다하거늘 때묻은 염낭 속의 찌그러진 구리 돈 한 푼을 갖고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다는 그것은 아마도 지금 금녀와 같은 처지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금녀에게는 절망 그 자체가 삶이었는지 모른다. 순간 불꽃 튀기듯 뻗치어온 절망과의 대결, 그 긴박한 찰나 찰나가 삶의 증거였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서러움이나 근심이나 불안은 절망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온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를 바라보고 앉은 금녀는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치밀어오르는 오열을 참고 있는 것이다.
—p. 354~355
“……아무리 남에게 좋게 보여도 정이 없는 자는 거짓말쟁입니다. 네, 거짓말쟁입니다. 가증한 거짓말쟁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건 거짓말쟁입니다. 자신을 슬프게 생각해본 일도, 불쌍하다 생각해본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슬픈 것처럼, 불쌍한 것처럼 읊조리지요. 남에게는 대자대비한 것처럼 몸짓이 아주 큽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한테 하는 거짓말입니다. 나는 언젠가 어느 주막에서 눈물 한 방울을 쪼르르 흘리며 이 보란 듯 옷고름으로 찍어내는 늙은 영감쟁이를 본 일이 있소. 눈물은 아니 흘려도 슬픈 것이요 비 오듯 쏟아져도 슬픈 것인데 어거지로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을 소중하게 옷고름으로 찍어내는 그 품을 보고 구역질을 느낀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네, 의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p.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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