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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일상/book 2020. 6. 5. 22:52
아주 오랜만에 한국소설을 집어들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읽었던 한국소설이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였으니까, 어언 3년만이다. 한국소설을 멀리 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막상 책을 읽으려고 할 땐 새로운 것이 끌린다. 내게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이 무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아직까지 읽지 않은 해외의 고전을 찾아 읽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낯익은 문제에 낯익은 소재일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낯설고 색다르게 다가올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펼쳤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말에서 따온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책을 펼치면 이내 세 점의 그림이 나온다: <마라의 죽음>, <유디트>, <사르다나팔의 죽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그림은 소설 속 챕터들과 고리 지어지는 독특한 구성을 이룬다.
거창하게 말해 삶의 한 조각이 파괴된 자들이 타인을 파괴해 나가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이 글에서 가장 파괴적인 성격을 띠는 인물은 자살청부를 맡는 C도, 즉흥적인 성격의 유디트(세연)도 아니다. 이들은 차라리 자기파괴적일지언정 평범한 예술가이자 C의 형인 K만큼 유순하고 온화한 냉혈한들은 아니다. 그런 분석을 해나가면서 어쩐지 이 책에서 나와 가장 먼 캐릭터는 C이고 가장 닮은 캐릭터는 K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가깝고 멂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C와 K를 가르는 것이라고 해봐야 그야말로 한 끗 차이다. C는 실행하는 자이고, K는 그저 방관하는 자일뿐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빚는 효과는 다르다. 그들이 실행하거나 방관하는 대상이 악인지 선인지는 이 소설에서 부차적인 문제로 다루어진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동시대 한국작가들의 작품을 읽다 보면 의외로 저돌적인 면모에 흠칫 놀랄 때가 있다. 우선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겪은 거식증이나, 김영하의 이 소설에 담긴 대리자살이라는 소재 자체는,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에 그려지는 자결과 같은 극단성과는 다가오는 느낌이 분명히 다르다. 이들 작품에서 다뤄지는 삶의 부정(不定)은 애를 끊는 원통함이나 결연한 자기의지와는 거리가 있다. 이들의 글 안에서는 무심코 ‘지옥’이라는 어휘가 동원되는가 하면, 힘들임 없이 죽음의 이미지를 그리면서도 생(生)에 대한 아주 강렬한 집착을 함께 그린다. 그런 면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각각의 살갗이 찰과상을 일으키며 속이 메스꺼울 만큼 생사를 고민해보게 만드는 영화 <곡성>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곡성>의 어느 캐릭터에 가까울까? 한국 근대소설이야 고등학교 때부터 익히 읽어왔지만, 동시대의 작가들이 그려내는 이러한 풍경들이 진정 한국적 감성인 걸까 하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과연 정말로 그런 것도 같다는 생각에 글이 참 마음에 든다는 감상이 덧붙여지고, 그러면서도 내가 정말 가까이에서 느끼고 호흡했던 공기(l'air)였던가 하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한다.
미미의 끝을 바라보는 C의 관점으로 소설은 결말을 짓지만, 이것이 아주 얇은 양면종이에 불과한 삶과 죽음의 성격을 암시하는 열린 결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제한된 등장인물간의 관계 안에서 대단히 밀도 있게 톱니바퀴처럼 딱 들어맞게끔 맞물려 돌아가는 플롯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급한 마음으로 신촌 거리 어느 벤치에 앉아 사르다나팔의 죽음 마지막 페이지를 뒤적이고 마침내 책을 덮었을 때, 그 결말에 소름이 돋으면서도 조금 더 나를 나락으로 내몰아줄 수는 없었는지 일말의 거품 같은 아쉬움이 일었는지도 모르겠다.
단 한 번 패가 돌아가고 그것으로 그 판의 운명은 결정된다. 그다음은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일만이 남는다. 좋은 패가 들어와도 좋아해서는 안 된다. 나쁜 패가 들어왔다고 해서 우울해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좋은 패일 때마다 항상 우울한 척하면, 그 다음은 아무도 속지 않는다. 아무 표정 없을 것. 그게 관건이다.
p. 27
"그랬구나. 세상은 재밌어. 진실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거짓말은 사람을 흥분시켜. 안 그래?“
p. 31
그에게 할당된 매혹이라는 이름의 채권. 그 첫 전주(錢主)는 박제된 나비들이었다. 몸통에 핀을 꽂은 나비들이 다시 태어나서도 핀을 꽂은 채로 날아다니는 환상에서 아직까지도 그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왜 그는 가장 사랑하던 것에 핀을 꽂았을까. 지금이라면 하지 못했을 일을 그 시절의 그는 어떻게 해치웠을까. 그는 어쩌면 나비보다 포획, 그것에 매혹되었던 것은 아닐까.
p. 102
결코 이 거리를 좁히지 못하리라. 세계와 자신, 오브제와 렌즈. 그가 만나왔던 여자들과 자신. 그들 사이에 놓인 강을 결코 좁히지 못할 것이라는 비감한 절망이 올려들었다. 그는 북극으로 걸어간 유디트를 생각했다. 나이 서른이 되면 사랑도 재능인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p.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