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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위치에 커피로 저녁을 떼우는 날이다. 저녁식사 따로 카페에서 독서하는 시간을 따로 할애하기 아깝다 싶은 날은 종종 간소하게 저녁을 해결한다.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 조금씩 살이 불어나니, 운동은 못하더라도 식사는 거창하게 하지 않겠다는 핑계도 된다. 이날 내 가방에 들어 있던 책은 레몽 루셀(Raymond Roussel)의 <아프리카의 인상>이다. 알제리와 서아프리카, 넓게는 중앙아프리카까지 프랑스의 식민국이 많았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가 <슬픈 열대>를 통해 태평양 군도의 부족문화를 해부했던 것처럼 문화인류를 다룬 책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좋아했었다는 작가답게 범상한 내용이 아니다. 난해해서 초반에는 독서의 맥이 자꾸 끊긴다.
허구 위에 쌓아올려진 허구. 어느 유랑극단의 이야기. 터무니 없는 서커스. 한낮의 꿈. 꿈에서라면 언뜻 레몽 루셀이 묘사하는 장면들을 봤을 법도 하다. 책의 초반 3분의 1은 오로지 초현실주의적인 개개인의 재주와 묘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장(中章)을 지나면서부터야 비로소 이들 서커스의 연결고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수안의 슬하에 있던 두 아들 탈루와 야우스의 이야기, 야우스를 무찌른 탈루가 자신의 완전한 왕위를 자축하기 위해 벌이는 대단히 사치스러운 이야기다.
프랑스의 글들을 읽다보면 확실히 그들만의 감성이라는 것이 있다. 방드 데시네(Bande Dessinée)가 그렇듯, 독특한 유머와 빈티지한 개성, 세계관이 드러난다. 예전에 어떤 글에서 한 테마파크에 관한 글을 읽었다. 브르타뉴 지역의 낭트(Nante) 지역에 오랜 시간을 들여 조성한 기계섬(Les machines de l'île)이라는 곳에 관한 텍스트였다. 고급스런 나무―그게 아니라면 구리나 청동―로 만든 코끼리, 타란툴라, 용(龍), 새에 이르기까지 크기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안에 강철 프레임이 정교하게 골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해 동물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조작되고 관광객들은 여기에 탑승할 수 있다. 키네틱 아트 같기도 하고 그저그런 골동품 같기도 한 움직이는 나무동물들이 관광명소로 부상함에 따라 점점 쇠락해가는 낭트 경제를 소생시킨다는 글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프리카의 인상>을 읽고 있자니 낭트의 바로 그 테마파크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프랑스에 가본 것이라고는 스위스를 여행했을 때 잠시 스트라스부르를 갔던 것이 전부인데도, 글, 그림, 만화, 영화, 기사에서 접했던 프랑스인들의 남다른 예술감각과 사고방식이 보인다.
각설하고 결론적으로 <나는 내 책 몇 권을 어떻게 썼는가>까지 읽고 나면 이 책은 정말이지 원본으로 읽었어야 했구나 하는 생각에 이른다. 프랑스어라는 소리와 구문(syntax) 안에서 가장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는 언어유희로 가득한 글이기 때문이다. (이와 별개로 번역이 좋았다) 그런 말장난을 알아채지 못한 채 한글로 된 글을 읽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서사(敍事)는 분명 있지만 말이다. 어느 나라든 각운(脚韻; rhyme)을 이용해 독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저마다의 글들이 탄생하지만, 프랑스어는 연음(liaison)이 다양하고 묵음(默音)처리되는 발음이 많은데다가, 동사의 활용형까지 변화무쌍하다보니 일찍부터 '낱말(mot)'에 천착한 작업이 많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제네바 출신의 언어학자 소쉬르도 그러하지만, 레몽 루셀을 각별하게 생각했다는 미셸 푸코 역시 말을 분해하고 재해석하는 데 귀재이지 않았던가.
레몽 루셀은 평생 양극단의 반응―야유하며 조롱하는 쪽과 첨단서법에 응원을 보내는 쪽―속에서 신통치 않은 작품활동을 해야 했고, 사후에 재평가가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는 아니다. 한글과 한국어라는 무대 위에서 이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살바도르 달리처럼 작정하고 현실의 저 앞(尖端; Avant-garde)을 달렸던 그의 작품이 이렇게나마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정과 신념으로 가득찬 이 독특한 연주에서 기계적인 요소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벌레는, 민감한 해석이 논란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는 양가적인 악절을 그 순간의 영감에 따라 매번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는 거리의 명인 같은 인상을 주었다.
차르다시에 이어 긴 오페레타 메들리가 연주되면서 물이 또따시 바닥났다. 슈커리오프스키는 마지막 곡을 예고하면서 재빨리 물을 옮겨 담았다.
이번에 벌레는 강렬한 움직임으로 매혹적인 헝가리 랩소디를 시작했는데, 이 랩소디 소절들에는 극심한 어려움이 산재해 있는 듯 보였다.
경쾌함이 가득한 급속하고 화려한 악구들이 쉴새없이 이어졌다. 이 악구들은 트릴과 반음계로 장식되어 있었다.
곧 파충류는 크게 요동치면서 가락이 풍부한 곡에 강세를 부여했다. 이 곡의 악보에서 각 음표는 아마도 세게 연주하라고 진한 ‘V’로 표시되어 있을 터였다. 마치 기본음처럼 구축되어 있는 이 주선을 둘레로 수많은 가벼운 장식음이 따라붙었는데, 이 음들은 유연한 몸뚱이의 단순한 떨림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동물은 화음에 취해 있었다. 지치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이, 스스로 유발한 소리의 발산을 끊임없이 느끼며 갈수록 점점 더 고양되고 있었다.
그의 취기는 청중에게도 전달되었다. 사람들은 울음과도 흡사한 표현적인 음색 때문에, 그리고 32분음표가 다양하게 얽힘으로써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 때문에 기이하게 동요되어 있었다.
-p. 67
빛나는 기원을 지닌 탈루7세는 자신의 몸에 유럽인의 피가 흐른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했다. 벌써 오래전에 그의 조상인 수안은 담대함에 힘입어 왕좌를 쟁취했고, 왕조를 창건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전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안이 즉위하고 몇 주가 지났을 때, 폭풍우에 떠밀린 커다란 선박에 에쥐르 해안이 보이는 곳에서 좌초했다. 난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열다섯 살의 두 소녀는 표류물에 매달려 무수한 위험을 겪은 뒤 마침내 육지에 도착했다.
이 조난자들은 스페인 국적의 매력적인 쌍둥이 자매로, 얼굴이 어찌나 비슷한지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수안은 그 매력적인 소녀들에게 반했고, 자식을 많이 낳고 싶은 성급한 욕심에 두 사람 모두와 같은 날 결혼했다. 그는 현재와 미래에 백성들의 물신주의적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안성맞춤인 유럽인 혈통을 추가함으로써 자기 가문의 우월함을 공고히 하게 되어 행복했다.
두 자매는 또 정확히 달이 찼을 때 각각 아들을 출산했는데, 그것은 한날한시였다.
탈루와 야우르는(아이들의 이름은 그렇게 지어졌다) 그들의 아버지에게 커다란 근심거리가 되었다. 두 아들이 동시에 태어나는 뜻밖의 일로 당혹스러웠던 아버지는, 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두 아내가 똑같이 닮았으므로, 수안은 누가 먼저 수태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만이 형제 중 한 명에게 우선권을 부여할 수 있는데 말이다.
두 어머니에게 물어 그 점을 밝혀보려고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어렵사리 익힌 토착민 단어 몇 개를 동원하여 각자 담대히 자기 아들에게 유리하게 증언했다.
수안은 위대한 정령의 결정에 맡기기로 했다.
그는 ‘트로피광장’이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장방형 광장을 에쥐르에 막 건립한 참이었다. 가장자리에 심은 무화과나무 줄기들에, 그가 권력으로 가는 길을 악착같이 막으려고 애쓰는 가공할 적들의 수많은 유해를 매달아놓기 위해서였다. 그는 새로운 광장 북쪽 끝에 가 서서는, 한쪽에는 종려나무 씨앗을, 다른 한쪽에는 고무나무 종자를 적당히 준비된 흙에 동시에 심도록 했는데, 각각의 씨앗은 증인들 앞에서 미리 지정된 아들과 결부되어 있었다. 신성한 의지를 드러내며 먼저 땅에서 나오는 나무가 미래의 군주를 지명할 것이었다.
씨앗이 심겨진 두 지점에서 감시와 함께 수분 공금 또한 공평이 이뤄지도록 했다.
오른쪽에 심은 종려나무가 먼저 지표면을 뚫고 머리를 내밀면서, 무려 하루나 늦은 고무나무의 야우르 대신, 탈루의 권리를 선포했다.
-p. 187~188
우리가 에쥐르에 도착한 이후, 헝가리인 슈커리오프스키는 마음을 흔드는 맑은 소리를 내는 치터를 날마다 연습했다.
절대로 벗지 않는 집시 유니폼을 몸에 꼭 맞게 입은 능란한 거장은 굉장한 곡들을 연주했고, 그 곡들은 연주만 했다 하면 토착민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그가 연주할 때면 다수의 주의깊은 포뉘켈레 사람들이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그 거추장스러운 청중이 거슬렸던 위대한 예술가는 작업을 위해 성가신 방문이 없는 외롭고 매력적인 은둔처를 찾고자 했다.
치터와, 그것을 받치는 접이식 받침대를 들고서 그는 베윌리프뤼앙을 찾았고, 높은 나무들 아래로 힘차게 들어섰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주저하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걸은 뒤, 그는 샘 가장자리에 그림 같은 매력적인 장소에 멈추었다.
슈커리오프스키는 고독과 신비의 그 장소를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빛나는 운모질 바위들 위로 무수한 반영을 일으키며 흐르는 투명한 시냇물에서 목욕을 할까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물의 저항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것의 비범한 밀도가, 조금이라도 깊이가 있는 모든 침투를 막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릎고 손을 짚고, 수면 위에 지탱된 몸이 젖지 않은 채, 무거운 강물을 사방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슈커리오프스키는 이제 그 이상한 시냇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의자로 사용할 수 있는 나지막한 바위 앞에 치터와 받침대를 설치했다.
곧 악기 앞에 앉은 거장은 애틋함과 나른함이 감도는 헝가리 멜로디를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벌써 몇 소절을 연주한 슈커리오프스키는 픽의 왕복에 몰두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 쪽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움직임을 시각적 직관으로 포착했다.
그는 빠른 눈길을 통해 거대한 벌레를 보았다. 물에서 나온 그것은 둑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연주를 중단하지 않은 채, 집시는 일련의 빠른 시선으로 새 도착자를 살폈는데, 그는 치터 쪽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중이었다.
벌레는 받침대 밑에서 멈추더니 헝가리인의 발 사이에서 겁 없이 똬리를 틀었고, 시선을 아래쪽으로 향한 헝가리인은 벌레가 땅바닥에 붙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일을 금세 잊어버린 슈커리오프스키는 연주를 계속했고, 무려 세 시간 동안 그의 시적인 악기에서는 화음의 물결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저녁이 되자, 연주자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비가 내릴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맑은 하늘을 보고는 다음 연습을 위해 치터를 그 자리에 두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한데 은둔처를 막 떠나려는 순간, 그는 벌레를 보았다. 그것은 온 길을 되짚어 둑 쪽으로 향하더니 금세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슈커리오프스키는 또다시 이상한 샘 곁에 자리잡고는 변화무쌍한 느린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후렴을 연주하는 동안, 거장은 그 거대한 벌레에게 얼마간 주의를 빼앗겼다. 그것은 물 밖으로 몸을 내뻗고 전날 있던 자리로 곧장 와서는, 음악 연습이 끝날 때까지 우아하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슈커리오프스키는 자리를 떠나기에 앞서 그 온순한 파충류가 멜로디를 포식한 채 고요한 시냇물에 소리없이 잠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똑같은 수작이 여러 날 동안 재연되었다. 뱀을 부리는 사람처럼 헝가리인은 그의 재주로 멜로디를 좋아하는 벌레를 어김없이 유인해냈다. 벌레는 한번 매료된 다음에는 더이상 그 황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집시는 파충류에게 강한 흥미를 느꼈다. 그의 신뢰가 그를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 일이 끝났을 때, 그는 손으로 파충류의 길을 막고 그를 길들여 보려고 했다.
벌레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기 앞에 들이민 손가락을 타고 기어올랐다. 그리고 헝가리인이 소매를 걷어올림에 따라 그의 손목을 여러 차례 휘감았다.
슈커리오프스키는 자기를 누르는 어마어마한 무게에 깜짝 놀랐다. 강물의 밀도 높은 환경에 적은된 벌레는 몸이 유연함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무게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p. 299~301
나는 (메타그람을 생각나게 하는) 거의 비슷한 단어 두 개를 골랐다. 예컨대 ‘billiard당구대’와 ‘pilliard약탈자’가 그것이다. 나는 이것들에다가 비슷한, 그러나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 단어들을 덧붙였고, 그렇게 해서 거의 같은 두 문장을 얻었다…
1. Les lettres du blanc sur les bandes du vieux billard 오래된 당구대 쿠션에 초크로 쓴 글씨들
2. Les lettres du blanc sur les bandes du vieux pilliard 늙은 약탈자가 이끄는 무리들에 관한 백인의 편지들
-p. 359
<시인과 무어 여인>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거기서 내가 사용한 것은 샹송 <나는 좋은 담배가 있어>다. 첫 구절 "J’ai du bon tabac dans ma tabatière내 코담뱃갑에는 좋은 담배가 있어”는 내게 “Jade tube onde aubade en mat (objet mat) a basse tierce옥玉 파이프 물결 오바드 희끄무레한(희끄무레한 물건) 3도 낮은 음"을 주었다. 이 마지막 문장에는 이야기 서두의 모든 요소가 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구절 "Tu n’en auras pas너는 그것을 맛볼 수 없을 거야”는 내게 “Dune en or a pas (a des pas) 황금으로 된 사구에는 발자국들이 있다"를 주었다. 여기서 오는 것이 사구에 찍힌 발자국들에 시인이 입을 맞추는 장면이다. ―"J’en ai du frais et du tout râpé 나는 신선한 것과 온통 가루가 된 것을 갖고 있어”는 내게 “Jaune aide orfraie édite oracle paie 흰꼬리수리의 도움을 받은 황인종이 점을 치고, 복채를 지불한다”를 주었다. 여기서 오는 것이 중국인 가게의 일화다. ―“Mais ce ‘nest pas pour ton fichu 하지만 이건 네 고약한 코를 위한 게 아니야”는 내게 “Mets sonne et bafoue, don riche humé 요리가 울리고 비웃고, 풍요로운 선물의 향기를 맡는다”를 주었다. 여기서 오는 것이 샤니자르가 냄새를 맡는 종소리가 울리는 요리다.
-p.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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