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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문학비평서인 줄도 모르고 그저 소설로 알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소설이라 여기고 <도래할 책>이라는 제목을 접하면 굉장히 구미가 당긴다. 책은 뱃사람들을 영도(零度; zero degré)로 이끌어가는 세이렌의 이야기와 함께 포문을 연다. 제임스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의 그리스 신화를 차용했던 것이 떠오른 이 대목에서 모리스 블량쇼의 글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뒤이어 프루스트의 글에 나타난 시간 관념을 해제(解題)하는 과정에서부터는 건조하고 딱딱한 문학비평 이야기로 넘어간다. 문학비평이라기보다 철학에 가까운 그의 글―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음양(陰陽)의 무한궤도를 연상시키는 그의 사상은 동양적이고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풍긴다―이 실제 영양가가 있든 없든간에 개의치 않고 꾹꾹 읽어내려갔던 것은 아마도 독서로부터 얻는 즐거움보다는 마음을 다스릴 수단이 절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헤르만 헤세, 마르셀 프루스트, 로베르트 무질, 프란츠 카프카, 버지니아 울프처럼 친숙한 작가들도 여럿 등장하지만, 헨리 제임스, 스테판 말라르메, 조제프 주베르처럼 처음 들어보는 작가들의 글에 관한 분석이 더 주를 이룬다. 시간의 경계를 무너뜨려버리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글쓰기 방식에 천착한 글들은 이전에도 몇 차례 읽었기에, 관심을 끌었던 것은 오히려 가장 친숙하다고 느꼈던 헤르만 헤세에 관한 대목이었다. 사해동포주의자인 헤르만 헤세의 개인적인 면모, 자신을 극한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은둔의 삶을 자처했던 작가로서의 면모, 양차대전을 거치며 양심의 가책을 감내해야 했던 한 국민으로서의 면모까지.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싯다르타>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같은 이유에서 동양철학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던 그의 세계관에 대한 설명도 없다. 모리스 블량쇼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각자의 개성을 지닌 작가들―특히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고 중요한 족적을 남긴 작가들―이 문학이라는 것과 어떻게 접면(接面)하고 있었는지이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고,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작품들을 더 읽어보고픈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문학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어려운 주제다.
프랑스인답게 현학적인 논의에 온갖 미사여구와 비유, 은유, 형용사를 달아놓았지만, 요(要)는 문학이란 시작점과 끝을 알 수 없는 구체(球體)와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학의 존재를 의문시하지 않는 환경에서 나고 자랐지만, 문학의 의미와 형태는 장대한 시간을 거치면서 조금씩 변모해 왔다. 우리는 기계적으로 문학을 시, 소설, 희곡, 수필 등의 카테고리로 간편하게 나눠 버리지만, '문학'이라는 것은 본디 이들 장르로 체현된 것도 아니고 제본된 책이나 스크립트처럼 물화(物化)된 것 역시 아니다. 문학이란 저자와 독자의 관계에서 그 어딘가 점을 지어 부유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이다. 스스로 붕괴하는 가운데 모멘텀을 발견하며, 언어라는 거푸집으로 본뜬 주형(鑄型)인 동시에 낱말과 문장을 기각(棄却)해 간다. 인간의 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도 조화로운 음률(音律)은 절대불변이라는 모리스 블랑쇼의 말처럼, 또한 밤하늘을 수놓는 창백한 별 또는 성운에 빗댄 그의 말처럼, 문학이라는 것은 '말(parole)'과 '언어(langue)'를 빌려 겉을 안으로, 안을 겉으로 되돌려 놓고, 마찬가지로 유한을 무한으로 밀어붙이고, 다시 무한을 유한으로 수렴시키는 과정이다. 글쓰기의 과정이 죽음을 이겨내는 과정에 비유되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문학비평서를 읽었다기보다 프랑스 현대철학 서적을 읽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레퍼런스로 등장한 여러 작가들과 그들의 저서들을 보며 읽어보고 싶은 책도 늘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말라르메나 플로베르, 폴 발레리와 같은 시인들의 작품은 시중에 소개된 책도 많지 않거니와,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을 때 고유의 운율이나 아름다움이 이미 사라져 있다는 데 있다. 비록 모리스 블랑쇼가 근현대 문학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소설'이라고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가 그 먼 옛날 사람들을 예술적으로 고취시켰던 '시(詩)'를 언급할 때가 되면 격정에 휩싸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시를 음미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독서가 타성(惰性)에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fin]
……세이렌들(Sirènes). 확실히 그녀들은 노래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은 사람을 만족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노래의 진짜 원천과 진짜 행복이 어떠한 방향으로 열려 있는지를 듣게 하기 위한 방식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아직 도래할 노래에 불과한 그 불완전한 노래를 통해, 노래하는 행위가 진실로 시작된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곳, 그 공간으로 뱃사람을 이끌어 갔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뱃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목적지를 향해 이끌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곳에 도착하고 났을 때 어떻게 됐을까? 그곳은 어떤 장소였을까? 그곳은 사라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그런 장소였다. 왜냐하면 이 원천적이고 근원적인 영역에서는 음악 그 자체가 세계 속의 다른 어떤 지점에서보다도 더욱더 완벽하게 사라져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영역은 생명존재들이 귀를 막은 채로 가라앉아 버리는 바다이며, 세이렌들도 또한 자신들의 선의의 증표로서 언젠가는 그곳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안될 바다인 것이다.
―p. 12
……요컨대 그 순간은 그에게 “번개만큼의 지속을―그가 결코 포착할 수 없는 것, 즉 순수상태에 있는 약간의 시간을―손에 넣고 격리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역전이 일어나는 것일까? 왜 시간 바깥에 있는 것이 순수시간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것일까? 베네치아에서의 한 걸음과 게르망트 가에서의 한 걸음, 과거의 그때와 현재의 지금을, 서로 겹쳐 놓아야 할 두 개의 지금으로 묶어 내는 이 동시성을 통해서, 시간을 소거시키는 두 현재의 이러한 결합을 통해서, 프루스트는 시간의 황홀경에 대한 독특하고 탁월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시간의 소멸을 체험하는 것, 한없이 멀리 떨어진 두 순간(“곧장이긴 하지만 차차”)이 서로 만나기에 이르는 이 운동, 욕망의 변신을 통해서 마침내 서로 동일화되는 두 현존으로 결합되는 이 운동을 체험하는 것, 이것은 시간의 모든 현실을 편력함으로써 시간을 공허한 공간 혹은 장소로서, 요컨대 항시 평소에 그것을 채우는 여러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 혹은 장소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어떤 사건도 없는 순수한 시간, 운동하는 공백,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거리, 시간의 여러 가지 황홀경이 어떤 매혹적인 동시성 속에서 배열되고 생성하는 내적 시간, 이것들 모두는 대체 무엇일까? 하지만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시간 그 자체이며, 이 시간은 시간의 바깥에(hors)는 없지만, 어떤 공간의 형태로 예술이 그곳에서 자신의 수단들을 이끌어 내고 배열하는 이 상상적 공간의 형태하에서 바깥으로서(dehors) 체험되는 것이다.
―p. 31~32
……예술작품은 일반적인 인간관계들에 대해 우리에게 밝혀 줄 수 있을 어떠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까? 거기서는 도대체 어떠한 요청이 예고되어 있는가? 그것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그 어떤 도덕 형태로도 포착될 수 없는, 그것을 위반한 자를 죄인으로 여기지도 않고 그것을 완수했다고 착각하는 자를 무고하다고 여기지도 않는, 또 해야 한다라는 모든 명령으로부터, 하고 싶다라는 모든 주장으로부터, 그리고 할 수 있다라는 모든 수단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요청이다. 이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기 위함인가?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자유롭지도 않고 자유를 빼앗기지도 않은 채로 두는 것이다. 이 요구는 마치 우리를 가능성의 기미조차도 고갈되어 버리고 벌거벗은 관계가 보이는 지점으로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것 같다. 이 관계는 어떤 종류의 능력이 아니며 모든 관계의 가능성에 선행하는 것이다.
―p. 58~59
……세계가 무너져 내릴 때에 말한다는 것이 말하고 있는 인간에게 각성시킬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의 경박함에 대한 의심뿐이다. 적어도 유용하고 진실하며 소박한 말을 발언함으로써 자신의 언어를 통해 순간이 갖는 무거움에 가까이 가고 싶다는 욕망만을 일깨울 뿐이다. ‘너는 파멸이다’는 다음과 같은 의미의 것이다. ‘너는 어떤 필요도 없는데 말하고 있으므로 필요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공허하고 자만한 유죄의 언어이다. 사치스럽고 게다가 빈곤한 언어다.’―‘그러면 나는 그만두어야만 하나?’―‘그렇지 않아. 만약 네가 그만둔다면, 너는 파멸이다.’
―p. 65~66
……언어(langage)는 이 세상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권력(pouvoir)인 것이다. 말하는 자는 역량을 갖춘 자이며 폭력을 행사하는 자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이름 붙여진 것을 멀리 떨어뜨려 놓고 그것을 하나의 이름이라는 편리한 방식으로 소유하는 폭력적 행위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행위만으로도 인간은, 다른 생명존재들은 물론이고, 침묵한다고 이야기되는 고독한 신들까지도 곤혹스럽게 하는, 불안과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기괴한 존재로 변하는 것이다. 이름 붙인다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에게만 주어졌다. 그 무(néant)를 하나의 권력으로 만드는 존재, 그리고 그 권력으로 자연을 절단하고 열고 지배하며 강제하는 결정적인 폭력으로 만드는 존재, 그러한 존재에게만 부여되었다.
―p. 67
……자신이 실제로 갖고 있는 사유는 자신이 “아직 생각하기 시작하지” 않은 것을 느끼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바로 여기에 그가 그의 진행 방향을 바꾸게 되는 중대한 고뇌가 있다. 소위 그는 자기자신을 거슬러 어떤 비장한 방황의 길을 따라감으로써―그의 절규는 여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사유하는 것이 언제나 그 이전부터 아직 사유할 수 없는 것, 그의 언어에 의하면 ‘힘없음’(impouvoir)으로 변하는 듯한 지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지점은 사유에서는 본질적 지점이지만, 그것은 사유를 극도로 고통스러운 결여로 변화시키고, 이 중심에 닿자마자 즉시 빛나기 시작하는 어떤 쇠퇴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것의 물리적 실체를 모조리 소진시키면서 모든 단계에서 수많은 특수한 불가능성으로 분할되는 것이다.
―p. 75
……이 싸움은 그에게 부분적으로는 멈출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공허’는 ‘활동하는 공허’이다. “나는 생각할 수가 없어요. 나는 사유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보다 깊은 사유의 부단한 압력, 잊혀지는 것을 용인할 수 없지만 보다 완전한 망각을 요청하는 망각의 부름인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이제 언제나 뒤쪽으로 내딛는 걸음이 된다. 그가 언제나 실패하는 이 싸움은 언제나 보다 아래쪽에서 반복된다. 무력은 결코 충분한 무력이 아니고, 불가능은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싸움은 아르토가 추구하려는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싸움에서 그는 결코 그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 분출, 이 빛나는 생기)을 단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삶의 상실을 묵과할 수 없으며 이 삶을 자신의 사유와 연결시키고 싶어 하고 있다. 장대하고 무시무시한 집요함으로 이 삶과 자신의 사유를 구별하기를 절대적으로 거부하고 있는데, 사유란 이 삶의 ‘침식’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이 삶의 ‘쇠약’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p. 80~81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모든 은신처로부터 차례로 나를 몰아내고, 이 지상을 끊임없이 헤매게 할 정도라면, 차라리 나를 언제나 붙잡아 두고 원하는 대로 다루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바라고 또 제안하였다.” 의미심장한 고백이다.
―p. 89
……그렇다면 왜 시의 언어가 사물을 생겨나게 하며, 왜 사물을 공간 내에서 변환시켜 그것들의 격리와 공허를 통해서 그것들을 명백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요컨대 저 아득함이 사물을 점유하고 있으며 그 공허가 이미 사물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통해서 사물을 파악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리고 말은 그 진정한 의미작용의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서, 그것들을 이끌어 내는 것을 그 소명으로 삼고 있다. 그림자를 통해서 사람은 물체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이 그림자의 희미한 빛을 통해서 그림자가 사라지는 일 없이 빛이 드리워지고 스며드는, 흔들리는 경계 지점에 도달했을 때에 물체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말이 이러한 경계에 도달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말 자체도 또한 “한 줌의 빛”이 되어야 한다. 또한 자신이 가리키는 것의 이미지, 자기자신과 상상적인 것의 이미지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 극단적인 가벼움 속에서 지탱하고, 그 투명함을 통해서 한정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을 완전한 구체의 원만함으로까지 끌어올림으로써 공간의 무한정한 외연으로 녹아 들어야 한다.
―p. 116
예언적인 말은 모든 체류, 모든 정착에 반대하고, 휴식이 될 만한 뿌리내림에 반대하며, 운동의 근원적 요청으로 되돌아가는 방황하는 말이다. 앙드레 느에르(André Neher) 씨가 지적하고 있듯이 8세기의 예언자들이 슬쩍 훔쳐 본 사막으로의 회귀는 9세기에 레갑의 방랑하는 종파들에 의해 실천된 사막으로의 회귀의 정신적 대응물이었다.
……느에르 씨의 의미심장한 지적에 의하면 이 방랑적 정신은 ‘공간의 가치를 유지하는’ 것의 거부와 이스라엘의 천성적 특질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긍정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천성이 신과 맺는 관계는 비시간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느에르 씨가 말하는 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막의 경험과 대지가 단순히 약속의 땅에 불과하다는 방랑의 나날을 상기하는 것이 더욱 복잡하고, 더욱 불안하고, 더욱 불확실한 어떤 경험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할 수는 있다. 사막은 아직 시간이 아니며 아직 공간도 아니다.
그것은 장소를 가지지 않는 공간이며 아무것도 생성하지 않는 시간이다. 거기서 사람은 단지 방황할 수 있을 뿐이다. 지나가는 시간은 자신의 뒤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를 가지지 않는 시간이며 현전을 가지지 않는 시간이고 어떤 약속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하늘의 공허와, 사람이 결코 그곳에 있지 않고 언제나 바깥에 있는 어떤 벌거벗은 땅의 불모성 안에서만 현실적인 약속인 것이다. 사막은 이 바깥이다. 사람들은 여기에 머무를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 있다는 것은 언제나 이미 바깥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예언적인 말은 가능한 관계가 아직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떤 황량한 힘을 갖는 시원적 무력, 허기와 추위의 비참, 바깥과의 헐벗은 관계가 그 안에서 표현되는 말이다. 이 벌거벗은 관계는 계약, 즉 거기서부터 상호성의 놀라운 올바름이 나타나는 말의 교환의 기본원칙인 것이다.
―p. 156~158
……요컨대 모든 상징은 하나의 경험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체험해야만 하는 근본적인 변화이며 완수해야만 하는 비약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상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경험이 있는 것이다. 상징은 그것이 지향한다고 하는 보이지 않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에 의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오히려 역으로 상징은 이 움직임 속에서 일상세계가 결코 자신에게 부여한 적이 없는 어떤 현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이면 일수록 더욱더 나무가 되고, 그 숨겨진 본질 때문에 더욱더 가시적인 것이 된다. 또한 그것은 어떤 순간적인 결정을 통해 우리를 그 곁에 나타나도록 하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수다스럽고 표현적인 것이 된다.
―p. 174
……작가에게 있어서 이 거리는 바로 작품 속에 있다. 쓰는 행위를 통해서만 그는 이 거리를 그곳에 자신을 맡기고, 그곳에 자신을 방치하여 그래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서 유지하는 것이다. 바로 작품 안에 비로소 절대적인 바깥이 존재하며―이 근본적인 외부성의 시련을 통해 작품이 형성되는데, 이것은 마치 작품을 쓰는 자에게 작품의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이 언제나 작품의 가장 안쪽 지점인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지점, 이와 같은 순간에 그에게는 또한 이미 자신이 쓰도록 허락받은 그 작품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작품과도, 그 자신과도, 다른 그 무엇과도 이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문제인 것 같다.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대지이고, 암묵의 늪(Mare tenebrarum)이며, 어떤 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이미지이며, 그 집요한 개입이야말로 이후에 자신을 생기 있게 하는 모든 것인 지고의 ‘감각’인 것이라고 말이다. ……자신의 예술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에게는 그곳을 통해 예술을 피해 달아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은폐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샛길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문학이란 이 은폐인 것이다.
―p. 178~179
방황, 결코 걸음을 멈출 수 없고 언제나 도중에 있다는 사실, 이러한 것이 유한을 무한으로 바꾼다. 이에 덧붙여 다음과 같은 기묘한 특질이 더해진다. 즉 유한은 닫힌 것이긴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그곳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 할 수 있다. 그런데 광대한 무한은 감옥이며 어떤 출구도 없다. 마찬가지로 절대로 출구가 없는 장소는 모든 무한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 방황의 장소는 직선을 모른다. 거기서 사람들은 결코 어떤 지점으로부터 다른 어떤 지점으로 가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서 저기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출발점도 없을뿐더러 전진을 위한 어떠한 단서도 없다. 시작한다는 행위가 완료되기 전에 이미 다시 시작되고 있고, 완수되기 전에 지겹게 되풀이되고 있다. 결코 출발하지 않고서 되돌아온다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이런 일종의 부조리가 ‘나쁜’ 무한성에 대응하는 ‘나쁜’ 영원성의 비밀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아마도 생성의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다.
―p. 185~186
토머스 스터슨 엘리엇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인데, 삶의 길 중간쯤에 이르면 사람은 다음의 세 가지 선택에 직면한다. 즉 더 이상 아무것도 쓰지 않거나, 아마도 언제나 고도의 것으로 성장하는 기예와 사고의 노력을 통해 자신을 반복하여 이렇게 이 ‘중년’에 적응하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방식을 찾는다는 선택이다.”
―p. 201
그러나 더 중대한 일이 있다. 즉 물음의 억누를 수 없는 힘에 의해 움직이는 연역적이거나 변증법적인 이성은 절대를 지향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것은 초합리적인 것이 되려고 한다. 논리적 운동은 정지와 균형점을 용인하지 않고, 더 이상 형태를 허락하지 않는다. 논리적 운동은 모든 내용을 분해시키고, 어떤 꿈과 같은 추상의 싸늘한 지배를 구성한다. 철저한 악의 순간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이성은 자율적인 것이 되면 비합리적인 것보다 훨씬 더 ‘악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 가지는 분해작용을 도입하고, 모든 것은 이미 가치의 중심이 없는 추상적인 안개 속으로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각 개인은 비관용적인 습관의 공허한 장난에 맡겨지고 이성의 환상 사이를 헤매며 움직이는데, 여전히 그 환상을 계속해서 자신 이상의 확실한 것으로 여긴다. 그 경우 그는 형이상학적으로는 쫓겨나고 물질적으로는 소유권을 빼앗긴 무에 속하는 인간이며, 자신의 꿈속을 헤매고 또 꿈으로부터도 쫓겨나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잠들지도 못하는 밤의 불안 속으로 내던져진 몽유병자인 것이다.
―p. 217~218
……‘성격 없는 남자’가 어떤 ‘성격’의 내용들을 신기하게 기술하고 있는 초기의 계획이 있는데, 이 성격 속에서 저자 자신의 성격을 발견할 수 있는 듯하다, 즉 정념에 찬 무관심, 그가 자신의 감정들과 자기자신과의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 어떤 것에 가담하여 자기자신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거부, 난폭함에 불과한 냉정함, 정신의 엄밀함과 남자다운 억제력, 게다가 이 엄밀함이나 억제력은 이 책의 관능적인 급반전이 때때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어떤 종류의 수동성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성 없는 남자란 조금씩 구체화되는 가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즉 그것은 하나의 사유가 된 생생한 현전이고 유토피아가 된 현실이며, 특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자신의 특성을 차례차례로 발견해 나가는 특수한 존재인 것이다. 이 존재는 이 결여를 체현하려고 시도하며 그것을, 그를 어떤 새로운 존재로, 아마도 미래의 인간 혹은 이론적 인간이라고도 몰해야 하는 것이 된 듯한, 어떤 탐구로까지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본래적으로 자기자신이 되려고, 즉 단순히 하나의 가능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모든 가능성에 열려진 존재가 되려고,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p. 269~270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낯선 존재가 되어 버렸으며, 그 말들은 단지 이 낯섦을 통해서 우리의 말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고 또 마찬가지로 모든 순간에 사람들은 우리에게 응답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 응답들이 우리를 향한 것이면서도 ‘우리와 관계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p. 284
……인간은 논리를 넘어서면서도 동시에 논리 이하이기도 한 이 법칙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바로 이 논리의 이름 아래 변함없이 피고인인 채로 있으며, 엄격한 논리를 지키는 의무를 지게 되고, 모순된 수단들에 의해 여러 모순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할 때마다 자신을 유죄라고, 언제나 한층 더 유죄라고 느끼는 고통스러운 놀라움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이 이야기 전체에서, 자신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그 흔들리며 움직이는 아주 작은 이성만을 가진 이 인물에게 선고를 내리는 것도 또한 논리이며, 이 논리가 어떤 비웃는 투로 내리는 결정을 통해―그는 이 결정 속에서 이성의 심판과 부조리한 심판이 다시금 손을 잡고 그를 적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그에게 논리의 적으로서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p. 298
……유희는 여러 미술관을 모은 미술관이다. 유희가 행해지는 매 순간 이 유희 속에서 모든 작품, 모든 예술, 모든 지식이 한없는 다양성, 변화하는 여러 관계, 일시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활기를 띠고 깨어난다. 그것은 분명히 지고한 완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의 대단원에 있는 것일까? 미네르바와 헤겔의 새가 야간비행을 시작하면서 낮은 밤으로 만들고, 활동적이고 창조적이며 성찰하지 않는 낮을 밤의 고요하고 침묵하는 투명성으로 변화시키는 이 황혼의 순간에 이른 것일까? 낮이 입을 열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끝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자기자신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낮은 엄밀히 말해 밤인 것이다. ……창조적 정신은 자기자신으로 역류해야 한다. 이후에 모든 작품들의 무한한 현전만이 유일한 작품이 될 것이다. 예술은 지식·음악·명상과 같은 예술 전체를 노래하는 의식이다. 더욱이 이 모든 것에 숨겨진 모든 것의 의식이다. 이 반쯤은 미학적이고 반쯤은 종교적인 집전 속에서 어떤 지고한 기분 전환을 하며 모든 거싱 공연되고 모든 것이 문제가 된다.
―p. 347~348
……이 유희란 무엇일까? 그것은 생생한 통일성 속에 모든 작품과 모든 시대의 창조물을 함께 모으는 데 있는 지고한 창조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 일차적인 것은 무엇일까? 통일성인가, 전체인가? 그것은 신이라는 통일성인가? 아니면 완결된 인간의 환인인 전체인가?
―p. 349
사람들은 여러 기묘한 질문이 던져지는 것을 듣는 일이 있다. 이를테면 ‘현대문하그이 경향들은 무엇인가’ 따위의 질문, 혹은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질문이 그것이다. 그렇다. 확실히 이것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점은 만약 답이 있다면 그 답은 쉬운 것이라는 점이다. 즉 문학은 그 자신으로 향하는 것이다. 사라짐이라는 그 본질로 향하는 것이다.
……예술에겐 이미 절대적인 것을 향한 욕구를 지탱할 힘이 없다. 절대적인 형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 세계의 완성이고 행동이 가지는 중요함이며, 현실의 자유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예술이 절대와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은 과거의 일일 뿐이다. 그것이 여전히 가치와 힘을 가지는 것은 미술관에서만의 이야기이다. 혹은 또 이것은 더 중대하게 실종된 상태인데, 예술은 우리에게 단순히 미적 쾌락이나 교양의 보조수단이 될 정도로까지 떨어져 있는 것이다.
―p. 368~369
문학이 일관성을 가진 영역이며 공통의 장이라는 것은 오직 그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한에서의 일이다. 실제로 그것 자신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몸을 숨기는 한에서의 일이다. ……일반적으로 지적되고 있듯이 오늘날에는 소설이 문학을 지배하고 있고, 문학은 이 소설형식 내에서 언어가 가지는 습관적이고 사회적인 여러 지향에 대해 언제나 충실하다. 문학은 그것을 국한하고 특수화하는 힘을 가진 한정된 장르의 한계 속에 언제나 머물러 있는 것이다. 소설은 때때로 괴물적이라고 말해지고 있는데,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그것은 잘 훈육되고 길들여진 괴물이다. 소설은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명확한 기호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경험이라는 말을 사용해 보더라도 우리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겠지만, 오늘날 문학이 이전 시대들이 알지 못했던 흩어진 상태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문학을 언제나 새롭게 반복되는 여러 시도의 장으로 만들고 있는 그 방종 때문인 것이다. 오늘날 글을 쓰려 하는 사람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마도 어떤 한없는 자유의 감정이리라. 즉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모든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고,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란 엄청난 것이 아닐까? 그러나 모든 것이라고 말해도 그것은 결국 아주 적은 것에 불과하다. 그를 무한의 지배자로 만드는 무관심 속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는 자도 결국 어차피 자신은 자신의 전력을 단 하나의 점을 추구하는 데 바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p. 384~386
……언어체계란 우리들 각자에게 시간상의 어떤 시기에 또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 내의 일정한 영역에 따라 부여되어 있는 공통어의 상태를 일컫는다. 작가와 작가가 아닌 자도 동일하게 이것을 공유하고 있다. 이 공통어를 어렵게 받아들이던, 늘 기쁘게 받아들이던, 의도적으로 거부하던,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언어체계는 실제로 그곳에 있으면서, 우리가 내던져져 있고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우리를 넘어서고 있는 어떤 역사적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p. 387
……문학적 글쓰기가 단순히 투명한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우상이 군림하고, 여러 편견들이 잠들어 있으며, 모든 것을 변질시키는 여러 힘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 숨쉬는 고립화된 세계라는 것을 예감하는 순간, 이 세계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필수적인 일이 된다. 그 이전의 모든 관습을 깨끗이 씻어 낸 이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이 세계를 파괴하고 싶다는 것, 아니 더 잘 된다면 그 장소를 빈 채로 두고 싶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유혹이 된다. ‘글쓰기’(écriture) 없이 쓴다는 것, 문학이 사라지고 우리가 허위라는 문학의 비밀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그 부재의 지점으로...
―p. 390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은 바로 무한을 소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에게는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즉 특별한 것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것은 애매한 작업이다. 아무것도 이야기할 게 없고, 다른 사람의 말밖에 없는데도 말해야만 한다. 말하는 법도 모르고, 말하고 싶지 않은데도 말해야만 한다.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고 있지 않고 아무도 없다. 이것은 우연의 사건으로, 하나의 사실이다. 결코 그 누구도 나의 이 작업을 면제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발견해야 할 것도, 아직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을 줄여 주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바다를 마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다가 있는 것이다.”
―p. 403
“나는 나 자신의 작품을 언제나 삭제만을 통해 만들어 왔다. 후에 얻었던 모든 진실은 어떤 인상의 소설로부터 비로소 생겨난 거야. 이 인상은 반짝반짝 빛난 후에 불타 버리고 말았지만, 그것이 해방한 어둠 덕분에 나는 ‘절대적인 어둠’(ténèbres absoues)의 감각 속으로 더욱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파괴’가 나의 베아트리체였던 거야.”
―p. 424
책은 저자 없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책은 저자가 화자로서 소멸된 후에 비로소 쓰여졌기 때문이다. 책은 작가를 필요로 하지만, 작가가 부재하고 또 작가가 부재의 장소인 한에서만 그러하다. 책은 그것을 읽는 인간 고유의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썼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의 이름으로 더럽혀져 있지 않고, 그 존재로부터 자유로우며 그러한 누군가에게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 경우에 책인 것이다. 우연적인 인간―특수한 인간―이 저자로서 책 속에서 그 위치를 점할 수 없다면 왜 그가 독자로서 거기서 중요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비인칭화된 책으로부터 사람들은 저자로서 떨어져 나오는데 이 책은 독자의 접근도 원하지 않는다. 책은 이러한 것으로서,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여러 인간적인 부속품 사이에서 단독으로 발생한다. 요컨대 만들어지고, 존재한다.”
―p. 430
……모든 예술은 언어이고 또 언어는, 존재를 소거시킴으로써 표현하게 되는 존재와, 의미의 비가시성에 현태를 획득시켜 주고 말을 계속하는 유동성을 획득시켜 주기 위해 언어가 자기자신 안으로 모으고 있는 존재의 외현 가운데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 움직이는 비결정성이 바로 언어에 고유한 공간의 현실성 그 자체이며, 또한 시만이―오직 이 미래의 책만이―이 공간이 갖는 운동과 시간의 다양성을 확립시킬 수 있다. 이 운동과 시간은 이 공간을 모든 의미의 원천으로서 유지하면서 그것을 의미로서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책은 비전으로서의 독서와, 독서할 수 있는 투명성으로서의 비전의 거의 동시적인 교차작용이 형성시키는 이해에 집중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와의 관계에서 항시 중심을 벗어나고 있으며, 그것은 그저 단순히 완전히 현전함과 동시에 완전히 운동상태에 있는 작품이 문제가 되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작품을 전개하는 생성 자체가 작품 속에서 형성되고 작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p. 454~455
영광에 이어 명성이 온다. 명성은 이름 속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공인된다. 명명할 수 있는 힘, 지시할 수 있는 힘, 이름의 위험한 확보(명명하는 데는 위험이 있다), 명명할 수 있는 자신이 명명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자의 특권이 된다. 합의는 공명에 속한다. 말은 글 속에서 영원성을 획득하고 어던 불멸성을 약속한다. 작가에게는 죽음을 이기는 것과 연관된 부분이 있다. 작가는 일시적인 것을 모른다. 작가는 영혼의 친구, 정신적인 인간, 영원한 것의 보증인이다. 오늘날 많은 비평가들은 여전히 예술과 문학이 인간을 영속화하는 것이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는 것 같다.
―p. 462~463
……저자는 한도 끝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말에 대항해, 하지만 이 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표현한다. 공적인 관심, 산만하고 불안정하며 보편적이고 전지한 호기심에 반하여 독자는 글을 읽게 된다. 읽기도 전에 이미 읽어버린 최초의 이 독서로부터 간신히 빠져나오면서 말이다. 요컨대 이와 같은 최초의 독서에 반하면서도 이 독서를 통해 독서를 하는 것이다. 독자는 중립적인 합의에 참여하고, 저자는 중립적인 말에 참여하며, 더욱 잘 합의된 내용에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독자와 저자는 잠시 멈추어 선다.
―p. 464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세계의 폭발 속, 기적이여! 무너지는 조각들이 살아 있는 듯하구나.” “우리가 예견하고 있지도 않고 밝혀 드러내지도 않은 것, 그것이 갖는 수단만으로 우리 마음에 말을 걸려 하는 어떤 것, 그것이 실현될 때, 우리 안의 모든 것은 기쁨 넘치는 축제에 다름 아니리라.” “죽도록 시달리는 밤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 안에서 자족해 나가시라.”
―p. 4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