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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bi! 친한 친구여!
Vale et me ama! 작별을 고한다!
Dilectissime! 나의 소중한..
Amicus amico! 친구여,
Tibi eximo, carissime! 너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자크와 다니엘의 풋풋한―정말로 '풋풋하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다^-^―우정을 읽어가면서, 나에게는 유년시절 이런 친구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가톨릭 교계에 권세를 행사하는 유권계급인 앙투안 자크의 집안과 프로테스탄티즘을 표방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안정적이지 않은 다니엘의 가정은 겉보기에 확연히 대비된다. 하지만 이들의 치기어린 사랑―사랑이라고 표현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은 파리에서 마르세유로 향할 만큼 생생하고 하나의 지점을 향해 달려간다. 그것은 理想.
파리로 되돌아온 자크가 억압적인 아버지를 향해 이를 꽉 깨물며 비장한 결심을 세우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어쩐지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또한 자크-다니엘의 관계는 파리의 이 거리 저 거리를 쏘다니며 일을 꾸미곤 하는 앙투안(Antoine Doinel)과 르네(René Bigey)의 관계와 꼭 닮았다) 소년원을 탈출한 뒤 노르망디 해변의 끝에 다다른 앙투안이 허공의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헤매고 또 서성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돌파구를 찾지 못해 한계에 부딪힌 소설 속 자크의 모습과 꼭 닮았다. 마음이 아팠다, 많이.
다른 한편으로 회색 노트를 압수당한 뒤 파리에서 마르세유로 도주하려는 자크와 다니엘의 발칙한 발상에서 장 콕토의 『무서운 아이들』에 짙게 깔린 신경질적이고 음험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좌절되는 도항(渡航)과 길에서 마주친 어느 여성과의 짧은 만남. 담배향처럼 그 뒤에 찾아오는 씁쓸한 뒷맛.
끝을 예견하면서도 자크가 찾는 것은 오로지 다니엘 뿐이다. 책을 읽는 나로서는 이런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가..질문을 되뇌이고 되뇌일 수밖에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불행인지 모르겠는 건 그 친구가 나를 바라보는 생각까지는 완벽히 읽어낼 수 없기에 남는 티끌만한 공백 때문이다. 그 정도로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순수하다. 쏜살문고에서 나온 책은 이번에도 짧지만 묵직한 한방을 안겼다. [終]
사랑만이 인간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은 상처입은 내 마음의 부르짖음이고, 그것은 나를 속이지 않으니까! 사랑하는 친구야, 네가 없다면 나는 한낱 열등생, 바보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이상을 열망하게 된 것은 순전히 너의 덕택이다!……Vole et me ama!
―p. 70
오, dilectissime!
……아, 때때로 나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세상을 떠나서 살고 있는 핏기 없고 창백한 얼굴을 가진 수녀들의 법열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 감옥의 쇠창살에 부딪쳐 꺾여야만 하다니! 나는 저의로 가득한 세상에 홀로 있는 느낌이야. 사랑하는 아버지도 나를 이해하지는 못해. 내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내 뒤에는 벌써 얼마나 많은 부러진 초목과 비로 변한 이슬과 애타는 욕망, 쓰디쓴 절망이 쌓여 있는지……!
―p. 72~73
……벗이여, ‘이상’이란, 내 생각에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내 생각에는 지상의 가장 비천한 것에까지 고귀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 조물주의 입김이 신성한 능력으로 우리 속에 불어넣어 주신 모든 것의 완전한 발전이다. 내 말을 이해하겠니? 이것이 바로 내 마음속 깊이 깃들어 있는 ‘이상’이야.
―p. 74
너는 나의 진지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 그러나 반대로 그것이야말로 나의 비참함이고 나의 저주받은 운명이야! 나는 이 꽃에서 저 꽃으로 꿀을 찾아다니는 꿀벌은 아니야. 나는 마치 단 한 송이의 장미꽃 속에 틀어박힌 검은 풍뎅이 같아. 풍뎅이는 장미꽃 속에서 살다가, 마침내 장미꽃이 꽃잎을 아물어 버리면, 이 마지막 포옹 속에서 질식하여, 스스로 선택한 꽃에 안겨 죽잖아. 오, 벗이여, 너에 대한 나의 애정도 그처럼 충실해! 너는 이 황량한 세상에서 나를 위해 피어난 다정한 장미꽃이고, 너의 정다운 가슴속 깊이 나의 어두운 슬픔을 파묻어 줘!
―p. 77
세상에는 낮이면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는 관능의 만족으로도 채우지 못한 무서운 공허를 느끼고, 머릿속에서는 모든 능력이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환락의 좌석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모든 친구들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갑자기 시커먼 날개를 펼친 고독이 자기의 마음을 뒤덮는 것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 있어. 또한 세상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증오하면서도 그것을 버릴 용가가 없는 사람이 있어. 이 사람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인거야!!!
―p. 78
그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기 생활 깊숙이 숨은 진실에 한순간 도달해 보려는 그 헛된 노력에 기운이 빠져 버린 사람처럼 그는 다시 머리를 들었다. 퐁타냉 부인은 자기 얼굴 위로 제롬의 스치는 듯한 시선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보기에는 퍽 가벼운 시선이었으나 지나가면서 상대방의 시선을 끌어, 말하자면 그 시선을 낚아채어 그에게 얼마 동안 얽어매는 힘을 지닌 시선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석이 너무 무거운 쇠를 끌어 올리다가 얼마 뒤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았다.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당신 역시’하고 부인은 생각했다. ‘본성은 당신의 생활보다 나을지도 모르지요?’
―p. 141
자크는 목구멍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그리고 얼굴 근육 하나에라도 그 표정이 나타나지 않도록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턱을 가슴께로 바싹 끌어당겼다. 용서를 빌지 못한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으며, 자기도 다니엘처럼만 맞아 주었더라면 얼마나 따뜻한 눈물을 흘렸겠는가를 아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렇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아버지에 대한 자기의 심정, 원한이 섞인 이 동물적인 애정,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된 뒤로 오히려 더 복받치기까지 하는 이 동물적인 애정을 결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해야 했다!
―p.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