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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블랑쇼의 『도래할 책』 다음으로 읽은 이 책 역시 문학은 아니다. 이 책은 '오늘날 지성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안토니오 타부키(Antonio Tabucchi)와 베르나르 코망의 대담집이다. 소방관의 은유(隱喩)―화재가 났을 때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은, 첫째 소방관을 부르고, 둘째 현 지자체장이 아닌 후세대를 잘 교육해야 한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논설에 저자가 의문을 제기하며 글이 시작된다―에서부터 이 글이 예상했던 소설이 아니어서 흠칫했고, 그 다음으로는 '지성인'에 대해 논의한다는 점에서 좀 당혹스러웠다.
지성인. 젠체하며 고리타분하게 주제의식을 다루고 있는 건 아닌지,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오늘날 지성인은 무엇인지 여러모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프랑스 출간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이 이탈리아인의 글에 모리스 블랑쇼에 대한 언급이 꽤 비중있게 다뤄진다는 점이다. 앞서 읽었던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비평을 떠올리는 동안, 안토니오 타부키가 지성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무엇을 설파(說破)하고 싶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그리 긴 글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만 더 읽어내려가다 보면 자다 말고 봉창 두드리는(;;) 이 은유에 대하여 무엇을 반박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지성인의 잠정적인 기능은 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 위기 속으로 몰아넣는 것(p.40)
정치가에게서 동떨어져 있지 않은 채 물러나 있지만,
거기에 자리잡기를 통해 그를 벗어나 있는 이 근접성의 이점을 누리기 위하여,
그런 물러남의 공간과 물러남의 노력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p.48)
짧은 글 안에서 안토니오 타부키가 지성인의 역할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 가운데 위 두 문장 정도가 가장 적확하지 않을까 싶다. 모름지기 지성인이라는 것은 단지 규범적인 지식을 생산하고 전달하는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리오타르의 견해), 이데아에 다다르지 못해 실의에 빠진 예술가가 될지언정 치열한 지적 탐색과 현실인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몇 갈래의 물꼬를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모리스 블랑쇼의 견해)
이제 다시 위의 두 문장을 풀어보자면, 지성인의 기능은 위기를 만들어내는 것(문제인식을 갖고 해법을 환기하는 단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기 속으로 몰아내는 것(문제인식을 갖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다각도로 원인을 규명하고 시민들이 '살갗'으로 느낄 수 있는 수준으로 문제인식을 끌어올리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문장은 지성인이 사회의 보루(마지막 진리의 샘)를 자처할 것이 아니라 보루에서 망을 보는 보초 역할(보루에 있으면서 무엇을, 언제, 어떻게 전달할지 끝까지 때를 놓치지 않는 파수꾼)에 충실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 두 개의 해석 가운데 전자가 움베르토 에코의 주장인 반면 후자가 안토니오 타부키의 주장인데, 이 포스팅이 안토니오 타부키의 관점에서 지성인의 역할을 논한다고 해서 움베르토 에코의 주장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안토니오 타부키 역시 지성인의 사회"참여"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지성인이 기성 정치세력과 결탁을 하거나 포퓰리즘에 휘말리는 경우 올바른 길을 비추는 등대의 역할은커녕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목소리의 확성기로 전락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움베르토 에코나 안토니오 타부키 모두 지성인이 성급하게 사회에 참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끝으로 (이탈리아의 현대사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이탈리아의 현대정치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90년대까지 무정부주의자(극좌) 또는 파시즘(극우)에 의한 극단적인 테러가 빈발하는 가운데, 이탈리아 정치는 답보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나치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무솔리니 통치 하에서 이탈리아는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똑같은 무단통치를 경험했지만, 오늘날 화해와 용서의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나가는 독일과 달리 이탈리아는 덜 성숙한 아이처럼 쭈뼛대고 있을 뿐이다.
안토니오 타부키의 말처럼, 차라리 적나라하다 못해 사죄해야 할 사건들이 산적해 있었던 독일인들과 달리 어정쩡하게 종전(終戰)을 맞이한 이탈리아인들은 과거의 군국주의에 머쓱해 하면서도 이 현안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착수해야 할지 어수룩했다. 정치인들의 입맛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테러리스트를 사면(赦免)했다가도, 다른 불리한 상황에서는 바로 그 테러리스트를 끌어들여 방패막이로 사용한다. 따라서 온전한 용서와 화해라는 것이 없다. 아니, '인식'이라는 것이 없다. 여기에는 저돌적인 현실인식에 주저하는 이탈리아 지성인들의 직무 유기가 큰 몫을 차지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잠깐 우리나라의 현실정치가 떠올랐다. 북한과의 대치상황에서 더 이상 함의(含意)조차 알 수 없는 이념적 좌우로 피아(彼我)가 나뉘고, 다른 한 편으로 친일세력 청산에 관한 화두는 잿더미에 가려진 불씨처럼 문제의 뿌리가 어디에 매복되어 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이탈리아의 사례에서처럼) 이 두 개의 역사적 유산이 정당과 정치인들에 의해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원래의 뜻이 훼손되어서, 일반 시민들이 사회가 직면한 현실을 직시하는 데 희뿌연 연막(煙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연막을 걷어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예술가? 작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 결국 끝에 남는 질문은 책을 펼치며 떠올렸던 바로 그 질문이다. 우리사회에 지성인은 어디에 있는가?
+ 책의 제목인 '플라톤의 위염'이라는 것도 하나의 은유이다. (*아래 문장 참조)
간단히 말해 만약 어떤 플라톤 같은 사람이나 다른 누군가가 심지어 법률까지 위장병으로 고생할 정도의 위염을 유발했다면, 그리고 만약 혹시 당신도 위 날문(幽門)에 약간의 위산과다를 느낀다면, 지성인 대 지성인으로서 당신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요? 매일 아침 위장약을 한 숟가락씩 20년 동안 복용하고 증상이 사라지는지 보라고 할까요?
“……지성인들은 사회에 유익하지만, 단지 오랜 기간 동안에만 그렇다. 짧은 기간에는 단지 언어 전문가와 연구전문가가 될 수 있고, 학교를 운영하며, 정당이나 회사의 출판 업무를 담당하고, 혁명을 위해 피리를 불 수도 있지만, 지성인의 구체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일할 경우라고 한 것은, 사건의 이전이나 이후에 자신의 기능을 수행할 뿐,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p. 33
……나는 지성인들이 위기를 해결한다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지성인의 잠정적인 기능은 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 위기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위기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입장에 대해 확고하게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나 사건을 말입니다.
―p. 40
……그(파르메니데스)는 진리를 우주 천체들과의 조화로운 화음으로 이해했던 피타고라스와는 반대로 바로 일탈과 퇴행적 긴장에서 인식의 순간을 찾아냈지요. 또한 ‘질서’와 ‘아름다움’의 동의어인 ‘코스모스’는 오히려 카오스와 추함이라고 생각했던 헤라클레이토스에 속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배치는/우연히 쌓아둔 쓰레기 더미일 뿐이다.”)
―p. 41
……블랑쇼는 예술가와 작가가 자신의 실패와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지성인의 ‘작업’에 근본적인 도움을 주는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적당한 유보와 함께 블랑쇼는 지성적 행위로서 문학과 예술의 기능에 대한 믿음의 관념을 표현하고 있으며, 반면에 리오타르는 놀랍게도 작가와 예술가의 가장 훌륭한 창조적 부분을 잘라냄으로써 그들을 지성인으로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간단히 말해 창조적 충동의 공헌을 보착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들을 땅속에 파묻었습니다. ……비록 ‘이성에 대한 염세관’으로 통제되고 있지만, 모호한 낭만적 풍미가 있는 블랑쇼는 생명력 넘치는 입장을 표현하고, 반면 실질적으로 백과사전 같은 풍미가 있는 리오타르의 입장은 문화에 대해 기능적이고 불류학적인 견해를 갖고 있으며, 우울한 입장을 표현한다고 말입니다. 지성인을 이해하는 이런 두 가지 상이한 입장에서 무엇을 고찰할 수 있을까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블랑쇼에 지성인의 기능은 새로움을 창출하는 것이고, 리오타르에게는 지식을 전달하고 확산시키며, 경우에 따라 지식을 운영하고, 있는 그대로 유지시키며, 규범으로 환원시키는 것이지요.……
―p. 46
“……지성인은 행위에 개입하거나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만큼 일반적인 행위와 권력에 가까이 있다. 하지만 거기에 무관심한 건 아니다. 정치가에게서 동떨어져 있지 않은 채 물러나 있지만, 거기에 자리잡기를 통해 그를 벗어나 있는 이 근접성의 이점을 누리기 위하여, 그런 물러남의 공간과 물러남의 노력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마치 보초가 오로지 감시하기 위해, 자신이 깨어 있기 위해 그 자리에 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염려를 보여주는 능동적인 관심으로 헌신하는 것처럼.
……지성인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정신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쉽게 믿지 않고 의심하며, 필요할 때 동의하지만 열광하지 않는다. ……지성인은 참여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성인이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중요해 보이는 생각, 위험에 대한 생각과 위혐에 반대하는 생각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집요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생각의 용기보다 더 강한 용기는 없기 때문이다.“
―p. 48~49
……국가란 교회와 달리 윤리적 제도가 아니며 또한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국가가 용서를 구하는 방식은 교회의 방식보다 덜 엄숙하고 덜 경건해야 하며, 약간 더 시의적절해야 합니다. 교회는 후스주의자들을 화형에 처하고 위그노 신자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반성에 몇 세기를 허용할 수 있지만, 국가는 다음 세대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시민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탈리아의 시민적 불행은 바로 그 점에 놓여 있습니다. 세속 공동체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행여나 사법적 판결이나 조사로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p. 86
……공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에 의한 위법은 개개인에 의한 위법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심각하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관용에 대한 논의 같은 수많은 논의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치적 광신으로 저지른 죄들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법의 이름으로 저지른 죄들, 국가의 방 안에서 저지른 죄들은 훨씬 더 심각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국가적 위법의 책임자들, 그리고 공권력을 갖고 있으면서 위법을 저지르게 방치한 자들은 자신의 위법을 정당화하고 지우기 위해 ‘테러리스트들’의 죄를 이용했습니다.……
이러한 이탈리아, 용서를 구하는 것을 상상할 줄 모르면서 힘없고 두들겨맞은 자들에게 끝없이 의례적으로 용서를 구하라고 강요하는 이탈리아는, 자체의 엄격함을 강화하기를 좋아합니다. 온갖 종류의 부분 사면과 완전 사면으로 살아온 이탈리아가 모든 관용이나 사면, 용서의 집요한 적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p. 91
……그 상태로 남아 있거나 또는 스스로를 지키려는 공동체에는 휴식, 정지, 휴전, 아니면 어떤 인식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황이 용서라고 부르는 문제는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감옥에서 정의에 이르기까지, 분리주의에서 언어와 행동의 추악함에 이르기까지,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곳과 나머지 다른 곳 사이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이 편지에서 제기한 문제들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p.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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