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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 가벼운 여행(Resa med lätt bagage)일상/book 2020. 8. 3. 00:09
배가 드디어 잔교를 빠져나갈 때 나의 마음에 밀려오는 안도감을 묘사할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그때다. 아니 불러도 소용없을 만큼 배가 부두에서 멀리 떨어진 다음에…… 아무도 내 주소를 물어볼 수도, 무슨 끔직한 일이 벌어졌다고 소리를 칠 수도 없을 때……. 사실 여러분은 내가 느끼는 어지러울 정도의 해방감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외투의 단추를 풀고 담배 파이프를 꺼냈지만, 손이 떨려서 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어쨌건 나는 파이프를 잇새에 물었다. 파이프는 주변 환경과 나 사이에 나름의 거리를 만들어 준다. 나는 이물 앞으로 나아갔고, 도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둘도 없이 최고로 마음 편한 관광객처럼 난간에 기대어 섰다. 맑은 하늘의 작은 구름들은 장난스럽고 기분 좋게 무질서해 보였다. 모든 것이 멀었고, 지나갔고, 아무 의미가 없었다. 더 이상 아무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전화도 편지도 초인종도 없다. 물론 여러분은 내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또한 부차적이고, 나는 그저 가능한 모든 것을 정리하며 세밀한 데까지 신경 써서 저리했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할 뿐이다. 써야 하는 편지들도 다 썼다. 사실 나는 이미 그 전날 편지를 다 쓰고 갑자기 여행을 떠난다고 알렸다. 설명도 하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도 나의 행동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걸리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물론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밝히지 않았고, 내가 돌아올 시점을 암시하지도 않았다.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으니까. 건물 관리인의 부인이 집 안의 식물들을 맡아 주었다. 어떻게 다루어도 잘 자리지 않고 지쳐 보이는 식물들이 슬슬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제 뭐,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는 식물들이었다.
―p. 77~78
……여러분이 이해하셔야 하는 점이 있다. 나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 거의 혐오 대상이라서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호기심과 호감, 즉 나에게 격정을 쏟아 놓고 싶은 걷잡을 수 없는 욕구를 따라가도록 독려하는 그 감정이다……
―p. 83
아, 물론 사람들이 딱하기는 하다. 누구나 다 깊은 비밀, 극복할 수 없는 일, 실망, 어떤 형태의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같은 것들을 끌고 다니고, 그들은 즉각 내 냄새를 알아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은 이미 냄새를 맡아 다 아는 상태로 나를 찾아오는 것이다……. 음,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도망을 왔고.
―p. 87
가끔 인간이 가진 걱정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일상적인 문제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신다면) 머리 위에 지붕이 탄탄하고 먹을 것도 있고 직접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는 사람도 겪는 그런 문제들의 경우에는 그렇다. 실제로 눈앞에 대재앙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내가 관찰한 바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불행한 일들이 아주 단조롭게 계속 반복되는 것 같다. 누군가가 바람을 피우거나 지루해하고, 일에 흥미를 잃고, 야망 혹은 꿈이라는 거품도 모양이 일그러지고, 시간은 점점 더 빨리 가고, 가족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두려워지고, 우정은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금이 가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바쁜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은 멋대로 자기 갈 길을 가고, 책임과 의무는 우리를 갉아먹는다. 이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공포라고 하는데, 이런 불안한 상태를 제대로 정의하기란 힘들고 이를 시도한 사람도 별로 없다. 나도 잘 안다. 인생이 불행할 수 있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고, 나도 많이 접해 보았다. 이들은 끊임없이 돌아오며, 모든 슬픔이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나는 이러한 현실을 마땅히 알아야 하고, 옳은 대답을 알 때가 됐지만 지금도 모른다. 쓸 만한 대답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p. 88
“……당신 같은 사람은 거절을 못 한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당신 같은 사람들은 누구도, 정말 아무도, 모든 것을 관통하는 원칙이라는 걸 가진 사람이 없어요. 마실 것에도, 감정에도 다 물을 타 버리죠. 탄탄하고 희석되지 않은 원칙이라는 걸 이해 못 해요.”
―p. 134
“친애하는 플로랑스. 당신은 지금 좀 흥분했네요. 그런데 사람들을 두렵고 불안하게 하고, 숲에서 타잔 놀이를 하며 세상 모든 게 엄청 단순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는 밧줄을 못 탄다고 가서 목을 매는 건 쉬운 일이에요! 그건 기만이죠. 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불행하면서도 그런 줄 모른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불행한 줄 모르면 불행하지 않은 거죠!”
―p. 164~165
삼촌은 수련이 핀 연못을 마지막까지 아껴 두었다가 늘 마지막에 거기로 가셨다. 열대 식물 사이의 좁은 길을 지나가실 때면 정글이 그를 마주하고 끌어안았지만, 삼촌은 식물을 만져 보지도 않으셨고 식물들의 이름을 읽지도 않으셨다. 가끔씩 풍성한 꽃을 직접 만져 보고 싶은 마음, 경탄하며 다가가서 그저 바라만 보기보다 직접 느끼고 싶은, 설명할 수 없는 욕구가 생길 뿐이었다. 이런 위험한 욕구는 연못, 연꽃이 심긴 못에 오면 더욱 강해졌다. 바닥은 얕았지만, 솟아나는 샘에서 계속 투명한 물이 흘렀다. 신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로 걸어 들어가면 어떤 느낌일까? 천천히 연꽃들과 넓은 연잎 사이를 물로 가로지르면, 그리고 꽃과 잎들이 비켜났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다시 모여들면 어떤 기분일까? 아주 외로울 것이다. 온실에서는 따뜻하면서도 외로우리라.
―p. 183~184
“이 집에서는 시간이란 그냥 지나가는 무엇이랍니다. 시간은 더 이상 생명이 없지요. 책 속에서도 다르지 않아요. 나는 내가 원하고 노력한 것이 무엇이며, 이게 다 무슨 결과를 가지고 왔는지, 더 가치가 있는 건 뭘까, 분명한 그림을 보고 싶고 그게 급해요. 중요한 일이지요. 정말 의미 있을 수도 있는 그 무엇을 찾는 일, 그러니까 어떤 대답을 찾는 건 중요해요. 최종적이고 지속성 있는 결론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p. 191
무민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캐릭터이지만, 이 캐릭터를 그린 작가가 토베 얀손(Tove Jansson)이라는 것을 이 책을 펼쳐 들기 전까지는 몰랐다. 여행을 앞두고 책장에서 얇은 책을 쓱 훑었을 때, <두 손 가벼운 여행>이라는 책이 가장 그럴 듯해 보였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책에는 동심(童心) 가득한 무민을 그린 작가로서 토베 얀손과는 다른 면모가 담겨 있다. 블로그 포스팅처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짧은 글들에는 인간 토베 얀손의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내면에 도사린 불안, 상처, 괴로움. 다분히 자전적인 글들에는 각각의 글마다 다른 등장인물을 배치되어 있어서 은근히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재미가 있었다. 여행 틈틈이 무료함을 달래주었던 문장들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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