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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마톨로지(Grammatologie)일상/book 2020. 8. 23. 00:25
이 제목 아래 어떤 생각을 품든 간에, 언어의 문제는 결코 여러 문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만큼 그 문제가 있는 그대로 가장 다양한 연구들과 그 의도, 방법,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가장 이질적인 담론들의 세계적 지평을 침입한 적은 없었다. ‘언어’라는 낱말의 평가 절하 그 자체, 그 낱말에 부여하는 신용에서 그 어휘의 졸렬함, 헐값에 농락하려는 유혹, 유행에 수동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것, 전위의식(conscience d’avant-garde), 즉 무지, 이 점들 모두가 그 점을 증언한다. ‘언어’라는 기호의 인플레이션은 기호 자체의 인플레이션이며 절대적 인플레이션이자 인플레이션 그 자체이기도 하다.
―p. 41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그 역설은 다음과 같다. 자연적 보편적 문자 언어, 즉 지성적 비시간적 문자 언어를 이렇듯 은유가 명명하는 꼴이다. 감각적 유한적 따위의 성격을 지닌 문자 언어는 고유한 의미의 문자 언어로 지칭된다. 따라서 그것은 문화, 기술, 인위적 수단으로, 즉 인간이 만들어낸 책략, 우연히 구현된 존재 또는 유일한 피조물의 술책이란 측면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은유는 난해한 수수께끼 상태로 남아 있으며, 최초의 은유로서 나타나는 문자 언어의 ‘고유한’ 의미로 귀결된다. 이 담론의 지지자들은 이 ‘고유한’ 의미를 여전히 사유조차 하지 않는다. 따라서 문제의 관건은 고유한 의미와 비유적 의미를 역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문자 연어의 ‘고유한’ 의미를 은유성 그 자체로 규정하는 것이다.
―p. 56
……만약 우리가 책과 텍스트를 구분한다면, 오늘날 모든 영역에서 예고되는바 그대로, 책의 파괴는 텍스트의 표면을 노출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필연적 폭력은 과거에도 역시 필연적이었던 모종의 폭력에 상응한다.
……기의의 질서는 결코 기표의 질서와 동시대적이지 않으며, 기껏해야 기표의 질서의 이면이거나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교묘하게 어긋난 평행(숨결의 시간)이다. 아울러 기호는 이질성의 단위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기의는 그 자체에 있어서 하나의 기표, 즉 하나의 흔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기의는 그 의미에 있어 가능한 흔적과 맺은 그것의 관계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다. 기의의 형식적 본질은 현전성이며 소리(phoné)로서의 로고스에 대해서 기의가 갖는 근접성의 특권은 현전성의 특권이다.
―p. 62~63
언어 과학은 언어 그리고 그것의 본질의 환원 불가능한 단순성에 있어서 소리(phoné), 입말(glossa), 로고스의 통일성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은 상이한 학파들의 술어 체계에서 돌발적으로 출현할 수 있었던 일체의 이론적 구분에 선행한다. (랑그/파롤, 코드/메시지, 언어 체계/개인의 사용, 언어학/논리학, 음운론/음소론/음성학/언리학) 비록 유성성(sonorité)을 감각적이며 우연적인 기표 쪽으로 제한시키기를 원한다 해도, 언어의 유의미성과 언어 활동의 토대를 이루는 직접적이며 특권적인 단위는 음성 속에서 소리와 의미가 분절되는 단위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단위에 견주어서 문자 언어란 언제나 파생적이며, 뜻밖에 일어나는 것, 특수하고 외재적인 기표, 즉 소리를 다시 반복하는 일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헤겔은 그것을 가리켜 “기호의 기호”라고 말했다.
―p. 111
“언어와 문자 언어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두 개의 기호체계다. 후자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전자를 대리 표기하는 데(representer) 있다.” 이러한 문자 언어의 대리적인 규정은, 아마 그것이 본질적으로 기호라는 관념과 소통할 뿐만 아니라 단지 하나의 선택 또는 평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며, 소쉬르에 고유한 심리학적/형이상학적 전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문자 언어의 유형 구조를 기술하거나 반영하고 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표음 문자이며, 그 문자의 환경 속에서 에피스테메 일반(과학과 철학), 특히 언어학이 창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구조보다는 모델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것은 구성되고 완벽하게 기능을 발휘하는 체계라기보다는 실제로는 단 한 번도 일관되게 도처에서 음성적일 수 없는 기능 작동을 명시적으로 유도하는 하나의 이상형이기 때문이다.
―p. 112~113
“사람들은 글쓰기를 배우기 전에 말하기를 배운다는 사실을 끝내 망각하며, 그래서 자연적 관계가 거꾸로 뒤집힌다.” 망각의 폭력이며 기억술의 수단인 문자는 훌륭한 기억과 자연 발생적 기억을 대신하는데, 그 이름은 바로 망각이다. 『파이드로스』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플라톤은 문자와 소리를 히포므시네스(hypomnesis)와 므네메(mnéme), 즉 보조 기억술과 살아 있는 기억에 비유한다. 문자를 망각이라고 한 이유는 문자가 로고스 자체를 벗어난 것이자 중개이기 때문이다. 문자 없이도 로고스는 그 자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 문자는 로고스 속에서 영혼에 존재하는 의미가 자연적 일차적으로 현전하는 것을 은폐한다. 문자의 폭력은 영혼에 무의식으로 다가온다.
―p. 123~124
소쉬르가 이 점에서 형이상학의 전통 일체를 이어받으면서 보지 못했으면서도 보았고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알았던 것은, 일정한 문자 언어 모델은 필연적으로, 그러나 잠정적으로 언어 체계의 대리 표기의 도구와 테크닉으로부터 부과되었다는 점이다. 그 스타일에 있어서 독자적인 이 운동은 너무 근본적인 것이어서 언어 체계 안에서 기호, 기술, 대리, 언어 따위의 개념을 생각하도록 했다. 표음-알파벳 문자와 연상된 언어 체계는 존재 의미를 현전으로 규정짓는 로고스 중심적 형이상학이 탄생시킨 체계다. 이러한 로고스중심주의, 즉 충만한 음성 언어의 시대(époque)는 본질적 이유에서 문자 언어의 기원과 위상에 대한 일체의 자유로운 성찰과 문자 언어에 대한 학문을 괄호에 집어넣고, 그것을 지연시키고 억압했다.
―p. 134
또 다른 여기-지금의 부재, 또 다른 초월적 현전의 부재,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또 다른 근원의 부재, 흔적의 현전 속에서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부재로 나타나는 세계의 근원. 이 모든 것은 에크리튀르(문자)에 대한 과학적 개념을 대신하는 형이상학적 정식이 아니다. 이 정식은 형이상학 자체에 대한 이의 제기일 뿐만 아니라 자연과 규약, 상징과 기호 등의 파생된 대립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생각할 때 ‘기호의 자의성’이 함의하는 구조를 기술한다. 이 대립들은 흔적의 가능성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다. 기호의 ‘무동기성’은 또 다른 총체가 있는 그대로 타자 속에서 고시되는 종합을 요청한다. 있는 그대로 예고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p. 140
……시간적 경험의 최소 단위 속의 과거 파지(rétention) 없이는, 즉 동일자에서 타자처럼 타자를 파지하는 흔적 없이는 어떤 차이도 자신의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어떤 의미도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관건은 구성된 차이가 아니라 일체의 내용 규정에 앞서 차이를 생산하는 순수한 운동이 문제인 것이다. (순수한) 흔적은 차연이다. 흔적은 어떠한 청각적, 시각적, 음성적, 문자 표기적인 감각적 충만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반대로 그것들의 조건 자체이다.
―p. 168
사이두기(이 단어는 공간과 시간의 분절, 시간의 공간화(le devenir-espace la temps), 공간의 시간화(le devenir-temps de l’espace)를 말한다.)는 언제나 비지각된 것, 비현재적인 것, 비의식적인 것이다. 있는 바 그대로, 즉 비현상학적 방식으로 이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면 사이 두기로서의 원문자는 현전에 대한 현상학적 경험에서 있는 그대로 주어질 수 없다. 원문자는 살아 있는 지금 현재에서, 일체의 현전에 대한 형식 일반에서 죽은 시간을 표시한다. 죽은 시간이 작동하는 것이다.
―p. 177
……흔적은 아무것도 아니다(La trace n’est rien.) 그것은 현전하는 것이 아니며,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넘어선다. 따라서 나는 더 이상 사실과 당위의 대립을 신임할 수 없다. 그러한 대립은 일체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초월적인 형식 안에서, 즉 무엇이냐라는 질문 체계 안에서만 작동했을 뿐이다. “무엇이냐”라는 원형-질문에 대한 물음의 위험천만한 필연성에 모험을 걸지 말고 문자학 지식 마당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자.
―p. 223
……우리가 전략적으로 흔적, 예비 저장 또는 차연 등으로 별명을 지은 것들의 명명될 수 없는 운동은 역사적 울타리, 즉 과학과 철학의 한계에서만 에크리튀르(문자)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 ‘사유’는 아무것도 의미하는 바가 없다. 모든 개시와 개방과 마찬가지로, 이 지표는 보여지는 그 자신의 얼굴을 통해서 지나간 시대의 안쪽에 속한다. 이 사유는 그 어떤 무게도 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체계의 놀이에서 결코 그 어떤 무게도 나가지 않는 것 자체이다. 사유하기, 그것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에크리튀르의 키로 재며, 단지 에피스테메 내부에서 개시될 뿐이다.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ie). 이에 대한 사유는 여전히 현전이라는 벽에 갇혀 있을 것이다.
―p. 258~259
……반복의 지배에 맡겨진 현전의 동일성은 과거에는 에이도스(eidos, 형상)라는 관념성 또는 우시아(ousia, 현존)라는 실체성의 ‘객관적’ 형식 아래에서 성립되었다. 이 객관성은 그때부터 자기 자신에게 현전하고,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순간에 자기 자신을 그대로 의식하고 확신하는 실체의 변형으로서 재현전화(représentation), 즉 관념(idée)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자신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 내부에서 현전의 지배는 일종의 무한한 확신을 획득한다. 에이도스와 우시아가 구비하는 반복력은 절대적 독립을 획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관념성과 실체성은 생각하는 실체(res cogitans)라는 요소에서 순수한 자기 정서의 운동에 의해 그 자체로 귀결된다. 의식은 순수한 자기 정서(자기 촉발)의 경험이다.
―p. 272
……데카르트는 기호를 코기토의 밖으로, 그리고 명료하고 분명한 명증성의 밖으로 내쫓았다. 이 명료하고 분명한 명증성은 영혼에 대한 관념의 현전이며 기호는 거기서 부차적인 것으로 낙인 찍혀 감각과 상상의 지대로 추방된다. 헤겔은 관념의 운동 속에서 감각적 기호를 재전유한다. 그는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면서 절대적으로 스스로에게 현전하며 자기 자신에게 머무르는 로고스의 지평 속에서 표음 문자를 찬양한다. 표음 문자는 자신의 말과 개녀믜 통일성 안에서 스스로에게 가깝게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나 헤겔은 문자의 문제와 맞붙어 싸우지 않았다. 문자 언어와 더불어 전투가 시작되고 그로 인한 위기가 촉발된 장소는 바로 18세기라 부르는 곳이다.
―p. 273~274
……음성 언어는 자신을 내놓으면서 자신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즉 기호의 경제(économie des signes)가 조직화된다. 이 기호의 경제 역시 기만적이며 기만성의 본질 자체와 필연성에 좀더 가깝다. 우리는 그 부재를 억제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일이 돼 가는 대로 놔둘 수밖에 없다.
……음성 언어를 문자 언어로 대체하는 조작은 아울러 그 가치로 현전성을 교체한다. 즉 ‘나는 존재한다’ 또는 이렇게 희생된 ‘나는 현전한다’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현재 모습 또는 내가 갖고 있는 가치를 선호한다. “현전하는 나, 사람들은 결코 내 가치를 알 수 없었으리라.”(Moi présnet, on n’aurait jamais su ce que je valais.) 진실과 가치의 관념성 속에서 나를 인지시키기 위해 나는 현전하는 나의 삶, 현실적, 구체적인 나의 실존을 포기한다. 이것은 잘 알려진 도식이다. 싸움은 나의 자아에서 일어나며 싸움을 통해 나는 내 삶을 넘어서서, 하지만 자아의 인지를 향유하기 위해 그 삶은 간직하면서, 나를 고양시키기를 원한다. 글쓰기는 바로 이 싸움의 현상이다.
―p. 357~358
자연의 조물주는 어린아이들에게 능동적 활동의 원리를 부여하는 동시에 어린아이가 제멋대로 활동할 수 없게 그들에게 작은 힘만을 부여함으로써 별로 해가 없도록 배려한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자기 주위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도구쯤으로 생각하자마자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부리려 하고 자기 약점을 대리 보충하는 데 이용한다. 그것이 어린이들이 통제 불능의 폭군, 버르장머리 없는 고집쟁이가 되는 이유다. 이 같은 진보(le progrès)는 천성적인 지배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그런 지배욕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남의 손을 통해 행동하고 우주를 움직이기 위해 단지 혀만 놀리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를 느끼기 위해서는 긴 경험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p. 366~367
……사람들은 맹목화에서 대리 보충으로 옮아간다. ……대리 보충에 대한 맹목화(l’aveuglement au supplément)는 법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개념에 대해서 눈멀고 만다. 더구나 그 의미를 보기 위해 그 작동을 식별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대리 보충은 의미가 없고 어떤 직관으로도 파악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그 기묘한 희미함(pénombre)으로부터 대리 보충을 빠져나오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여분을 말할 뿐이다.
―p. 370
……내게는 “전부와 전무 사이에 결코 중간적인 것(매개)이 있을 수 없다.” 중간적인 것, 그것은 곧 정가운데이며, 총체적 부재와 현전의 절대적 충만함 사이의 매개로서, 중간항이다. 주지하다시피 매개성은 루소가 끈질기게 소거시키고 싶었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이름이다.
―p. 385~386
근원 또는 자연이라는 개념은 따라서 첨가의 신화, 순수하게 첨가적인 폐기된 대리 보충성의 신화일 뿐이다. 그것은 흔적 지우기, 즉 부재도 현전도 아니며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근원적 차연의 신화일 뿐이다. 근원적 차연은 구조로서의 대리 보충성이다. 구조란 여기서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복잡성을 뜻하며 그 복잡성 내부에서 단지 현전 또는 부재의 놀이를 굴절시키거나 이동시킬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 놀이에서 형이상학이 생산될 수 있지만 형이상학은 그 구조를 생각할 수 없다.
……문자 언어는 흔적 일반의 대리자이자 흔적 자체는 아니다. 흔적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이동은 일정한 방식으로 결단의 장소를 숨기는 동시에 매우 확실하게 그곳을 지향한다.
―p. 415
……기호들과 외관들의 능력인 상상력은 일체의 현실적이며 외부적인 영향에서 벗어나면서 자기 자신을 타락시킨다. 그것은 타락의 주체이다. 그것은 잠재적 능력을 일깨워주고, 곧이어 그것을 위반한다. 그것은 예비 저장되었던 힘을 세상에 드러내지만 그 힘을 넘어서는 것을 보여 주고, 그것을 ‘초월하면서’ 그 무기력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활성시키지만 욕망과 힘 사이의 차이를 각인시킨다. 만약 우리의 만족 한도 능력을 넘어서기를 욕망한다면, 이 잉여와 차이의 기원은 상상력이라고 명명된다. 이 점은 우리에게 차연 또는 원시성이라는 개념의 기능을 규정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것은 예비 저장과 욕망 사이의 균형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균형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균형을 깨는 상상력에 의해서만 일깨워질 수 있고 그 예비 저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p. 447
……도덕성의 조건은 유일한 존재의 유일한 고통을 통해서, 그 경험적 현전과 존재를 통해서, 인류에게 측은지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연민의 정은 부당한 것이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상상력과 시간성은 개념과 법의 왕국을 연다.
―p. 457
“최초의 이야기, 연설, 법률은 서로 이루어졌다. 시는 산문에 앞서 존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념이 이성에 앞서서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애초에는 선율을 제외한 어떤 음악도 없었고, 음성 연어의 변화된 소리 이외의 다른 선율도 없었다. 악센트가 노래를 형성했다.”
―p. 497
……대리 보충성은 바깥쪽이 안쪽이기를 원하며 타자와 결핍이 결핍된 것을 대체하는 잉여로서 첨가되기를 원하지만, 무엇인가에 첨가된 것은 없는 것을 대신해서 있으며, 안쪽의 바깥쪽인 결핍은 이미 안쪽의 안쪽에 있기를 원한다. 루소가 기술하고 있는 것은 잉여에 잉여로서 첨가되면서 손대지 못한 채 완전하게 남아 있을 활력에 결핍이 손상을 끼친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위험한 대리 보충으로서 약하게 만들고, 예속화하며, 말살하고, 분리시키며, 왜곡시키는 대체물로서 그 활력을 손상시킨다.
―p. 499~500
……욕구는 세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호구지책’과 ‘자기 보존(양식, 수면)에 집착하는’ 욕구, ‘안락함’에 집착하는 욕구가 그것이다. 이 세 번째 종류의 욕구는 엄밀하게 말하면 욕망에 불과하지만 격정적인 욕구들이라 진정한 욕구보다 더 고통을 준다. ……마지막 욕구가 나타나려면 앞선 첫 번째 욕구와 두 번째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루소는 적고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또는 부차적 욕구가 매번, 긴급함과 무력으로, 일차적 욕구의 자리를 취해서 대신한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이미 욕구들의 타락, 그것들의 자연적인 질서의 도치가 있게 된다.
―p. 508~509
……무차별적으로 생명의 힘 또는 죽음의 힘이라고 고려할 수 있는 두 개의 힘이 여기서 대립된다. 북방의 인간은 욕구의 긴박함에 부응하면서 단지 기근에 맞설 뿐만 아니라 남방적 욕망의 방종스런 자유 뒤에 오는 죽음에 맞서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한다. 그는 관능성의 위험에 맞서 자신을 지킨다. 하지만 반대로, 그는 또 다른 죽음의 힘으로서 이러한 죽음의 힘에 맞서서 투쟁한다. 이런 점에서 생명, 에너지, 욕망 등은 남방에 속한다. 북방 언어는 생명력이 덜하고, 덜 활성화되었으며, 노래에 덜 가깝고, 더 차갑다.
……그런데 문자 언어는 북방에서 태어났다. 문자 언어는 냉혹하고, 빈약하고 추론적이며, 죽음을 향하고, 힘의 회전에 의해 생명을 간직하려 하는 힘의 우회를 통한다. 실제로 한 언어가 분절되면 분절될수록, 분절은 거기서 영역을 더 넓혀 가고 엄밀하고 원기왕성하게 획득하며, 문자 언어에 적합하면 적합할수록 더욱더 그것을 요구한다.
―p. 516~517
……우리는 루소가 동물 언어의 고정성이라고 간주했던 것과 인간 언어의 진보 사이에 있는 유일한 차이는 어떤 기관 어떤 감각에도 기인하지 않으며, 가시성의 차원에서도 청각 차원에서도 모색되지 않는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그것은 신체 기관을 다른 신체 기관으로 대체시키고, 공간과 시간을, 시각과 목소리를, 손과 정신을 분절시키는 힘이며, 여러 언어의 진정한 ‘근원’은 바로 이 대리 보충성의 능력이다.
―p. 543
신과 우리의 차이는 신은 나누어 주고 우리는 피해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루소의 도덕적 신학은 모두 신의 정성이 언제나 정당하게 피해 보상하려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신만이 그가 변제하는 대리 보충으로부터 면제된다. 신은 대리 보충의 면제이다.
네우마, 자기 자신을 향한 현전의 매혹, 시간의 미분절된 경험, 이 모든 것은 유토피아를 말한다. 그 같은 언어는 엄밀하게 따져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 언어는 사이 두기와 장소들의 조직을 필수적으로 요하는 분절화를 모른다. 지역적 차이 이전에는 언어도 없다.
―p. 559
따라서 “원초 시대”라는 표현과 그 시대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지표는 어떤 날짜, 사건, 연대기도 참조하지 않는다. 구조적 불변 요소를 변경시키지 않으면서도 기정사실을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것은 시간 이전의 어떤 시간이다. 가능한 일체의 역사적 구조에서 언제나 적나라하게 노출시켜야 할 선사적, 선사회적, 선언어적 지층이 있을 수 있다. 분산, 절대 고독, 무언의 침묵, 반성 이전의 감각에 놓인 그 순간, 기억도, 예고도, 상상력도, 이성과 비교의 힘도 없는 경험, 그것이 바로 모든 사회적, 역사적, 언어적 모험의 처녀지다. 사실적 예증, 심지어 기원과 동떨어진 사건들에 의뢰하는 것은 순전히 허구적이다.
―p. 561
인간이 사회화되기를 원했던 신은 손가락으로 지축을 만지고 우주의 축 쪽으로 그것을 기울게 만들었다. 이 가벼운 동작이 지구의 표면을 변화시키고 인류의 소명을 결정짓는다.
―p. 568
……야만적 인간은 좀 더 앞으로 나가기 위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휴식은 자연적이다. 기원과 목적은 타성이다. 불안은 휴식 상태에서는 생겨날 수 없었고, 따라서 야만적 상태와 야만성, 그리고 끝없이 계속되는 봄에서는 오직 파국을 통해서만 도래한다. 지상의 체계에서, 엄밀하게 말해 예측 불허의 어떤 힘의 결과로 인해서만 불안감이 발생한다. 그런 이유에서 태만의 인간학적 속성은 타성의 지리적-논리적 속성에 상응해야 한다.
……부정성, 악의 기원, 사회, 분절화 등은 외부에서 온다. 현전은 자신을 위협하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한편, 이러한 악의 외재성이 무이거나 거의 무에 가까워야 한다는 것은 필수 불가결하다. 또 자극, “가벼운 운동”은 무로부터 격변을 산출한다. 손가락을 지출을 만지는 이의 힘은 지구 바깥쪽에 있는 것으로 족하다. 거의 무에 가까운 힘은, 그것이 움직이게 하는 체계와 무관할 때부터 거의 무한정한 힘을 발산한다. 이 운동은 그 힘에 어떠한 저항도 대립시키지 않고, 적대적인 힘들은 지구의 내부에서만 작동한다. 가벼운 자극은 지구를 공허 속으로 이동시키기 때문에 강력한 것이다. 따라서 악 또는 역사의 기원은 무이거나 거의 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손가락으로 세계의 축을 경도시킨 이의 익명성을 설명한다. 그것은 아마도 신은 아닐 것이다.
―p. 569
……더운 지방에서 출현하는 한 근원적인 언어와 사회는 절대적으로 순수하다. 최초의 언어와 사회는 이 포착 불능의 한계에 가장 가깝다. 그곳에서 아직 사회가 타락하지 않은 채 형성된다. 거기서 언어는 설정되었지만 여전히 순수한 노래, 순수한 악센트로 된 언어, 일종의 네우마로 남아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동물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념을 표현하기 때문이며, 완전히 계약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절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기원은 계약이 아니다. 그것은 조약, 계약, 외교관, 대리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축제이다. 그것은 현전 속에서 소모된다.
―p. 578
……우리가 근친상간의 금기라는 이름 아래 말하고, 명명하고, 기술하는 것은 놀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기표가 더 이상 기의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체계에는 한계가 있고 이것은 그 결과 어떤 기표도 그렇게 대체될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비치환 지점은 모든 의미 체계의 방향점이며, 기본적 기의가 모든 반사의 종착점으로 약속되는 동시에 기호 체계를 파괴시키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감추는 점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기호에 의해서 언급되는 동시에 금기시된다. 언어는 금기도 위반도 아니며, 끝없이 하나를 다른 하나와 짝짓는다.
―p. 585~586
……감수성 또는 경험이라는 존재론 신학적 관념, 수동성과 능동성의 대립은 형이상학 체계들의 다양성 아래 숨겨진 근본적인 동질성을 형성한다. 언제나 부재와 기호는 최초와 최후의 현전 체계 속에서, 하나의 외관적이며 잠정적이고 파생적인 흠집을 낸다. 그것들은 욕망하는 현전의 조건이 아니라 우발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기호는 언제나 타락의 징조이다. 부재는 언제나 신으로부터 소원함과 관계를 갖는다.
―p. 639
부패 타락의 원리로서 대리자는 피대리자가 아니며 피대리자의 대리자일 뿐이다. 대리자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대리자로서 그것은 단순히 피대리자의 타자가 아니다. 현전의 대리자, 또는 현전의 대리 보충의 악은 동일자도 타자도 아니다. 주권 의지가 위임되고, 따라서 법이 쓰일 때, 그것은 차연의 계기에서 도래한다. 따라서 일반 의지는 양도된 권력, 특수한 의지, 편애, 불평등이 될 위험이 있다. 법을 대신해서 칙령, 즉 문자언어가 자리 잡을 수 있다. 특수 의지를 대표하는 칙령 속에서 “일반 의지는 침묵을 지킨다.”
―p. 661
희망이라는 초조함으로부터 해방되어, 또 조금씩 욕망의 초조감을 잃어버릴 것을 확신하면서, 또 과거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터득하면서 나는 새롭게 삶을 살기 시작하는 사람의 상태에 들어가려고 애썼다. 나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실제로 우리는 오직 시작할 뿐이며 우리 존재에 있어서 오직 현재 순간들의 연속 관계만이 있을 뿐이며 그 최초의 순간은 언제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순간이다. 우리는 삶의 매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또 죽는다.
―p. 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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