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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ion “п” (P세대)
피즈뎃(пиздеть) : 시덥잖은 말을 지껄이다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 1985년 고르바초프 취임 이후 추진된 개혁개방정책
펩시콜라(пепси-кола) : 코카콜라와 더불어 자유시장경제와 자본주의의 심벌
매우 괴짜 같은 문체, 난해한 어휘들. 이 책을 읽은 뒤 빅토르 펠레빈이 오늘날 러시아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작가라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느낌이 약간 가미된 것 같기도 하고,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소설은 소련붕괴 이후 러시아 시민들이 직면했던 인지부조화(?)를 다루고 있다. 특히 세계에서 처음으로 인공위성(스푸트니크)을 쏘아올렸던 소련의 기세등등한 옛 영광을 기억하고 있는 구세대보다는, 유년기를 소련과 함께 보냈지만 어른이 되어 소련의 붕괴를 목격한 세대를 겨눈다. 이들 세대는 그 이전 세대만큼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시장경제체제의 도입과 함께, 물밀 듯 들이닥치는 자본주의의 물결 앞에서 삶의 지표를 일찍부터 상실한 세대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인공인 보바 타타르스키는 이른바 카피라이터다. 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광고. 이들 광고의 문구를 만드는 것이 그의 직업이다. 다만 소설 속에서 그의 직업이 번듯하게 소개되지는 않는다. 읽는 이를 현혹할 수 있는 글귀, 당장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게 만들 수 있는 글귀, 자본주의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흔쾌히 돈을 쓰게끔 하는 글귀를 만드는 것이 타타르스키의 직업이다. 좋은 문구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하여, 타타르스키가 그 자신이 속한 세계로부터 읽어내려고 하는 것들은 어찌 된 일인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하다. 은둔형 작가인 빅토르 펠레빈의 세계관을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그가 밑도 끝도 없이 자본주의가 표방하는 가치를 폄훼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가 지적하는 것은, 무방비상태에서 수용한 시장경제체제 속에서 풍화(風化)되어 가는 인간성에 대한 부분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가 천착하고 있는 소재가 있으니 바로 ‘미디어’다.
사실 나는 이 미디어라는 지점―특히 매스미디어―에서 그의 글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이 작품이 1999년도이므로 아직 인터넷이나 SNS가 상용화되기 전이고, 그가 언급하는 것은 주로 텔레비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의 소설 안에서 그려지는 이 매스미디어는 대리경험을 가능케 하는 매개물이다. 전원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저 육면체의 새카만 객체에 지나지 않지만, 전원이 들어오는 순간 인간 앞에는 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인다. TV 속 세계에서 인간은 실제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원하기도 한다. 미디어를 통해 흘러나오는 메시지들을 콜라주 삼아 나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하고, 타인을 바라보는 기준을 정한다. 굳이 육성(肉聲)을 통해 사람과 대화하지 않아도, 나안(裸眼)으로 사물을 관찰하지 않아도, 맨손으로 물건을 만져보지 않아도,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은 대충 얼개가 짜여진다. 오늘날 인터넷과 SNS가 삶 구석구석에 아주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세대는 텔레비전 세대보다도 더욱 파편화되어 있고 더욱 피상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읽은 직후여서 그런지, 매스미디어에 휘둘리는 군상을 조롱하는 듯한 빅토르 펠레빈의 글은 더욱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인간의 목소리를 대리(représentation)하는 문자는 인간을 본래의 정념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을 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를 수없이 분절시킨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채널을 통해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모르는 외국어로 된 텍스트라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분화되고 다원화될수록, 본뜻(그것이 사물이든 사고이든)은 수용자에게 여러 갈래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다. 즉, 의미 있는 파동을 만들어낼 만큼 울림 있는 목소리를 만들기가 어려운 시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사회의 부정의한 면들은 잠깐 노출되었다가도 금세 시들해질까) 빅토르 펠레빈의 글을 읽는 동안, ‘표현의 자유’라고 할 만한 영역의 토대마저 희박해져 가는 시대에 돌입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즉 나와 에딕은, 다른 사람들을 무엇에 관여시켜야 할지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라고 타타르스키는 생각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분명하다. 그것은 직관이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조사할 필요는 없다. 어느 수준의 절망에 도달하면 스스로 지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즉 허기진 배로 중요한 경향을 감지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 자체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만약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에딕처럼 그것을 지각하려 하거나 팔려고만 한다면, 혹은 번드르르한 잡지의 편집자들처럼 추측하거나 인쇄하려고만 한다면, 대체 어느 누가 그것을 고안하는가?’
―p. 85~86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그려넣은 벽은 그 자체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채색된 태양이나 감청색의 작은 만, 조용한 저녁이 보이는 창문 너머의 전망은 많은 돈을 지불하면 살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짧은 글의 작가 역시 에딕일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창문을 위해 전망을 구매하기는 했지만 그 창문 역시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벽도 그린 것인가? 하지만 누가, 무엇을 위해?
―p.92~93
러시아는 항상 문화와 문명 사이의 갭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제 더 이상의 문화는 없다. 문명도 없다.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갭이다. 당신들을 바라보는 방식.
―p. 108
이원성이라는 것이 세상을 주체와 객체로 조건을 두어 분리함으로써 비롯된다고 했을 때, 부처는 주체-객체 분리 1번을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암흑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부처의 시대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주체-객체 분리 2번이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객체 1번과 객체 2번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텔레비전이라는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텔레비전이 꺼져 있을 때 그것은 객체 1번이다. 이것은 우리가 봐도 안 봐도 상관없는, 유리 표면을 가진 단순한 상자이다. 인간의 시선이 검은색 화면에 닿았을 때 그 눈의 움직임은 오로지 내부의 신경 충동이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과정에 의해 조종된다.
……그러나 전원을 켜면 텔레비전은 객체 1번에서 객체 2번으로 변형된다. 완전히 다른 속성의 현상이 되는 것이다. 비록 화면을 보는 사람이 이런 습관화된 변형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굉장한 사건이다. 시청자에게 무게와 크기, 그 밖에 다른 물리적 성질을 가진 물질적 객체로서의 텔레비전은 사라진다. 대신 시청자에게는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다른 공간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생겨났다.
―p. 132~133
광고를 안 보려고 한 프로그램에서 다른 프로그램으로 재빨리 채널을 돌리는 것을 ‘재핑(zapping)’이라고 한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시청자들의 리모컨으로 변해버리는 강제적인 재핑은 단순히 영상을 조직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니라, 텔레비전 방송의 토대이자 광고-정보의 영역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주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제2유형의 주체는 이제부터 ‘호모 자피엔스(Homo Zapiens)’ 혹은 HZ로 언급될 것이다.
―p. 137
……각각의 인간은 고대 경제학자들이 마몬이라고 불렀던 유기체의 세포다. 최종의 완벽한 해방 전선 교육 자료들에서는 이것을 오라누스(러시아어로는 ‘로토조파’)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그 자체의 실제 본성에 더 많이 부합하며 신비로운 사색을 위한 여지는 많이 남겨놓지 않는다. 각각의 세포, 즉 경제적인 실재로 고려되는 각각의 인간은 돈(돈은 오라누스의 유기체 속에서 혈액과 림프액의 기능을 한다)이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하는 독특한 사회-심리적 세포막을 가지고 있다.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마몬의 각 세포가 맡은 임무는 세포막 안으로는 돈이 더 많이 들어오게 하고, 밖으로는 더 적게 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오라누스의 지상명령은 자신의 세포 구조가 늘어나는 돈의 흐름에 계속 둘러싸여 있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오라누스는 자신의 진화 과정에서(아직 연체동물 수준의 발전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가장 단순한 신경계와의 유사물, 즉 텔레비전을 기본으로 하는 ‘미디어’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러한 신경계는 가상의 유기체를 통해 세포들의 활동을 조종하는 신경충동을 전달한다.
이 신경충동에는 세 종류가 있다. 구강 와우-충동, 항문 와우-충동, 대체 와우-충동(와우는 상업적 감탄사 ‘와우(wow)!’에서 나온 말이다)이 그것이다.
구강 와우-충동은 자신의 이미지와 광고가 만든 이상적인 ‘초자아’ 이미지 사이의 충돌이 야기하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세포에게 돈을 삼키기를 강요한다. ……항문 와우-충동은 위에서 언급한 이미지들과 일치함으로써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세포에게 돈을 배출할 것을 강요한다. ……대체 충동은 오라누스 세포와의 완전한 동일시를 방해할 만한 모든 심리 과정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억누르거나 밀어내는 것이다.
―p. 139~141
주체 2번을 위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단지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저런 차를 타고, 이런저런 집에 살며, 이런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다’라고. 자기 정체성은 소비된 상품의 목록을 통해서만 규정되며, 변형은 목록의 변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보편적으로 구강-항문 자극은 자기 꼬리를 무는 뱀이라는 유명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를 물게 된다. 100만 달러가 필요한 이유는 비싼 지역의 집을 사기 위해서이고, 집이 필요한 이유는 빨간색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니기 위해서이며, 빨간색 슬리퍼가 필요한 이유는 집을 사서 그 안을 빨간색 슬리퍼를 신고 냉정함과 자기 확신을 찾아 돌아다닐 수 있도록 100만 달러를 벌게 해줄 냉정함과 자기 확신을 찾기 위해서이다.
―p. 146~147
……현대 매스미디어에서 자주 사용하는 ‘데모크라시’라는 단어는 19세기와 20세기 초 널리 퍼진 ‘데모크라시’와는 완전히 다른 뜼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동음이의어일 뿐이다. 옛 단어 ‘데모크라시’는 그리스어 데모스(demos)에서 나왔지만 새 단어 ‘데모크라시’는 데모버전(demo-version)이라는 표현에서 만들어졌다.
―p. 153~154
“삶의 고동(鼓動)을 느껴보고 싶어서.” 타타르스키는 이렇게 말하며 흐느껴 울었다.
―p. 196
“인간은 천성적으로 아름답고 위대하다.” 시루프가 말했다. “거의 시루프만큼이나 아름답고 위대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걸 모르고 있다. 쓰레기란 그의 무지를 말한다.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이덴티티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자기 아이덴티티의 쓰레기 소각장에 출석한다. 인정하라, 산 채로 타는 것보다는 옆에서 불꽃을 쬐는 편이 더 낫다고 말이다.”
―p. 200~201
주요한 죄악은 사람들이 무의미하고 정신 산만한 잡담이나 하면서 서로 간의 교제를 유지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자신의 항문 충동이 누군가에게는 구강 충동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그것을 탐욕스럽고 교활하고 비인간적으로 잡담에 끼워넣는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면 사람은 주신제(酒神祭)와 같은 전율의 상태에 이르고 몇 초 동안은 소위 ‘삶의 고동’을 느낀다.
―p.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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