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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의 책 사이에서 손끝이 허공을 맴돌았다. 『절망』과 『창백한 불꽃』. 모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책이다. 『롤리타』를 읽은 뒤로 사놓은 책들인데, 처음에는 『절망』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결국 『창백한 불꽃』을 집어들었다. 『절망』은 정말 절망스러울 때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그런 절망은 찾아오지 않았다. 또는 그런 절망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창백한 불꽃』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독서를 요구했던 책이다. 머리말에서부터 킨보트라는 인물이 편집과 출판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갸우뚱하기도 했고, 나보코프의 장난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은 크게 두 개의 구성으로 나뉜다. 하나는 킨보트의 절친한 벗인 셰이드가 쓴 총 네 편 1000행 짜리 시구절.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시를 출간하면서 킨보트가 달아놓은 주석. 따라서 이 책은 시(詩)와 더불어 그에 달린 주석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두 개의 책갈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의 화자인 킨보트는 머리말에서 일찌감치 책장을 앞뒤로 넘겼다 되돌아왔다 하는 수고를 줄이고 싶다면 똑같은 책(『창백한 불꽃』)을 두 권 미리 준비해두라는 충고―너스레에 가깝다―까지 한다. 그럼에도 이 『창백한 불꽃』은 시집(詩集)은 아니다. 시공간을 파헤치는 주석이야말로 이 책의 노른자를 차지하므로 엄연히 소설로 분류가 된다.
책을 읽다보면 여러 작가의 개성을 접하지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특출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에 견주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속 세계관이 깊고 웅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보코프는 말이라는 재료로 아주 근사한 콜라주를 만들어내는 작가임에는 분명하다. 우리말로 읽어도 그의 언어유희에 놀라는데, 알파벳으로 된 영문판으로 읽으면 정말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만큼 그는 언어에서 새로운 뜻을 찾아내고, 마치 한자의 부수와 첨자가 만나 아예 새로운 뜻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조어(造語)한다. 이렇게 쓰여진 글이 매우 입체적인 것은 자연스럽다.
킨보트의 착상(着想)과 셰이드의 문체로 탄생한 네 편짜리 시에는, 킨보트가 셰이드에게 전달했던 젬블라의 폐왕(廢王)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동시에 작가인 셰이드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다. 주석에서 킨보트가 후술하듯 시 속의 낱말 하나도 다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시의 어느 행(行)이 카를 크사노프(젬블라의 폐왕)의 이야기인지 셰이드 자신의 이야기인지 분리할 수가 없다. 또한 그런 다의적인 말의 아름다움 안에서, 굳이 원자를 분해하듯 각각의 뜻을 분리하고 추론하는 것 역시 나보코프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특히 셰이드라는 깐깐한 영문학 교수가 종종 자신이 속한 영문학계의 볼썽사나운 꼴에 대해 비난하듯, 이 글의 어느 구절은 이런 의미, 그 구절은 저런 의미 하는 식으로 도식화하는 것은 문학에 대한 이해를 훼철(毁撤)하는 지름길이다.
레퍼런스 또한 방대하다. 어느 대목에서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다뤄지는 가 하면, 어느 대목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또 어느 대목에서는 미국현대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언급된다. 물론 러시아 출신의 작가답계 도스토예프스키나 푸쉬킨에게서 받은 영감도 섞여 있는 듯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언어만 해도 기억나는 것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독일어다. 또 ‘Again’이라는 하나의 영단어를 두고도 영국식 발음과 미국식 발음에 따라 다채롭게 의미를 부여한다. 지적인 자극이 되고 흥미진진하기도 해서, 어릴 적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읽던 기억까지도 떠올랐다. 멋있는 책이다.
사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킨보드=젬블라의 폐왕(카를 크사노프)’라고 간단히 생각했었는데, 역자의 말을 보면 이 글의 화자를 누구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도 관점이 여럿으로 갈린다고 한다. 킨보트의 이야기를 빌려 셰이드가 썼다고 하는 네 편의 천 행짜리 시는, 비록 킨보트가 그렇게 소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상당부분 킨보트의 구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킨보트 개인, 또는 그렇게 본다면 폐왕 자신이 직접 쓴 글일지도 모른다. 사실 셰이드(shade; 그림자)라는 이름부터가 빛의 이면에 가려진 모호한 느낌으로 가득하다. 단지 화자에 대한 부분이 아니더라도, 이 소설의 종결부에 대해서도 미진한 부분이 있다. 정확히 폐왕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가 고대했던 시의 탄생을 두고 마뜩찮아 하는 보트킨을 보며 어딘가 이 글에 빠진 구멍이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여러모로 수수께기 같은 책, 그래서 가치 있는 책이다. 수수께끼를 해독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어디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지 그 깊이를 가늠해보는 것만으로도 값진 독서가 될 것이다. [終]
나의 신은 요절했다. 신을 숭배하는 것은
굴욕이며, 숭배의 전제도 부적절하다고 여겼다.
자유로운 인간은 신이 필요 없다. 하지만 나는 자유로웠던가?
―p. 44
그리고 찾아온 검은 밤, 그 암흑은 장엄했다.
내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한 발은 산꼭대기에, 한 손은
끊임없이 물결에 쓸리는 해변의 조약돌 아래에,
한쪽 귀는 이탈리아에, 한쪽 눈은 스페인에,
동굴에는 내 피가, 별 무리에는 내 뇌가,
나의 트라이아스기에는 둔중한 맥박이,
후기 플라이스토세에는 녹색 시각 반점들이,
나의 석기시대에는 얼음장 같은 오한이,
나의 척골 끝에는 모든 내일이.
―p. 46~47
삼단논법 : 다른 사람들은 죽는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
―p. 50
개인의 언어로 공공의 운명을
번역하려는 노력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거룩하리만큼 간결한 시 대신
지리멸렬한 메모들, 불면증에서 비롯된 하잘것없는 운문이라니!
―p. 51
이따금 나는 내 안에서, 고막 안에서, 혈관 안에서, 두개골 안에서 가차없이 다가오는 암살자들을 따돌릴 유일한 길은 자살뿐이라고 생각했다.
―p. 124~125
101행 : 인간의 창의성의 역사 속에서 정신의 자유가 신앙으로 방해받기보다는 오히려 강화되던 무수한 사상가와 시인의 예를 떠올려보면, 이 안이한 격언에 담긴 지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p. 148~149
우리의 인물은 단순한 형태의 스프링과 코일로 내부가 작동하는 태엽장치 같은 인간이었다. 어쩌면 청교도라고 부를 만도 했다. 몸서리 쳐질 정도로 단순한 어떤 근본적인 혐오감이 그의 둔감한 영혼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가 혐오한 것은 불의와 기만이었다. 그는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고, 또 표현할 필요도 없을 만큼 무모하게 온 정열을 다해 둘의 조합―그 둘은 항상 붙어다니기 마련이지만―을 혐오했다. 그 자의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부산물만 아니었다면, 그러한 혐오는 칭찬받아 마땅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기만적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통념을 숭배했는데, 자못 현학적인 침착함을 발휘한 숭배였다. 일반성은 신성하고, 특수성은 악마적이다. 만약 한 사람은 가난하고 다른 한 사람은 부자라면, 문제는 대체 무엇이 한 사람은 빈곤하게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부유하게 했는지가 아니었다. 그 차이 자체가 불공평하며, 따라서 차이를 비난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은 차이를 무시하는 부자만큼이나 사악하다는 식이었다.
―p. 189~190
213~214행 : 소년이라면 이 삼단논법에 기뻐할지도 모른다. 나중에 인생을 더 살아가다보면, 우리가 바로 그 ‘다른 사람들’임을 배우게 된다.
―p.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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