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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Il disperezzo)일상/book 2020. 9. 13. 23:35
『영화란 무엇인가』를 읽는 동안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읽은 『경멸』이라는 책은 누벨바그의 거장인 장 뤽 고다르에 의해 영화화된 글이기도 하다. 이 책을 덮고 나서 떠오른 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경멸’이라는 테마로 인간 심리를 입체적으로 파헤친 이 글은 사랑하는 여자를 그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동시에 고전 『오디세이』에 대한 다채로운 분석이기도 하다. 어느날 남편 리카르도를 경멸하게 된 아내 에밀리아와 그런 에밀리아의 마음을 되돌려보려는 리카르도의 이야기가 『경멸』의 뼈대를 이룬다. 그리고 여기에 세속적 인물인 영화제작자 바티스타와 우울한 독일인 감독 레인골드가 합류하면서 『오디세이』 속 율리시스라는 인물이 여러 각도에서 조명된다.
분명 어떤 까닭에 의해 에밀리아는 리카르도를 철저히 경멸한다. 경멸이라는 것은 감정이기도 하지만 이성적 판단이기도 하다. 혐오, 질투, 시기,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과는 무언가 다르다. 때문에 에밀리아는 리카르도를 경멸한다고 하면서도 형식적인 부부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경멸’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율리시스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 남자가 바라본 경멸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르지만, 내 나름대로 경멸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성적 판단’이 개입된다는 점에서 경멸은 불신과도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불신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부정직한 사람을 불신하기도 하지만 신념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신을 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불신의 관계항을 형성하는 두 주체는 대등하다. 하지만 경멸은 그렇지 않다. 경멸을 하는 사람은 우위에 있고 경멸받는 사람은 열위에 있다. 이들의 관계는 대등하지 않다.
그렇다면 경멸할 만큼 상대를 열등하다고 규정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경멸감을 부추기는 것들은 대체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불신과 다르다. 불신은 신뢰관계로 개선해 나갈 수 있지만 한 번 시작된 경멸은 뒤집기 어렵다. 실제로 에밀리아는 끝까지 리카르도에 대한 경멸을 거두지 않는다. 다시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태도나 마음가짐처럼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들은 경멸감과 연결짓기 어렵다. 그 사람과 떼어놓고 볼 수 없는 기질이 저열하거나 차원이 다르다고 느낄 때 경멸감은 싹튼다. 어찌 보면 경멸은 일상에서도 흔한 경험은 아니다. 그런 주제를 이 책은 다룬다.
이 책이 경멸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독창적이다. 페넬로페를 고향에 남겨두고 10년간 전투를 위해 방랑한 율리시스를 빗대어 리카르도와 에밀리아의 꼬인 관계를 설명해 나간다. 호탕한 성격의 바티스타에게 율리시스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남편이 무사귀환하기를 지고지순하게 기다리는 페넬로페와 영웅으로 귀환한 뒤 페넬로페에게 구혼했던 자들을 무참히 학살한 율리시스의 이야기 그대로.
한편 독일인답게 세상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레인골드는 이와 정반대의 논리를 펼친다. 다분히 프로이트적인 그의 분석에 따르면 전투에 나간 율리시스가 실은 일부러 귀향을 서두르지 않은 것이다. 전장에서 보낸 10년의 시간은 율리시스가 자의로 지연한 시간이다. 비록 페넬로페에 대한 부채의식과 거부감을 본인이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율리시스는 '무의식'의 저변에서 올라오는 지령(指令)에 따라서 페넬로페를 외면한 채 전투와 방랑에 매달렸던 것이다.
다음으로 문제의 관계 속 주인공인 리카르도의 자체적인 해석이 좀 모호하다. 그에 따르면 율리시스는 그저 ‘무력했지만 진지한’ 인물이었다. 내 나름대로 살을 더 붙여보면, 율리시스는 시대 또는 환경이 요구하는 대로 전사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사적 의무를 다 했을 뿐이고, 그러한 현실적 제약 안에서 페넬로페와 개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도 늘 마음을 기울였다. 그런 점에서 율리시스는 무력했음에도 진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리카르도는 순수한 극작가를 꿈꾸는 시나리오 작가였지만, 에밀리아의 세속적 행복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는 비겁할지라도 잠시 꿈을 접어두고 시나리오 작업에 매진한 남자였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관점 모두 리카르도와 에밀리아의 관계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주지는 못한다. 그 결말은 아주 관능적이면서도 커다란 슬픔이 급작스럽게 찾아와서, 리카르도가 ‘아름다운 세상은 내게는 영원히 닫힌 문인 것 같았다(p.318)’고 서술했을 때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그만큼 자신을 경멸하는 한 여인에게 순수한 열정을 쏟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관능적이면서도 고결하고, 간결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글이었다. 이탈리아 문학은 가끔씩 찾아보는데도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終]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사륜마차에 비유할 수 있다. 말 네 마리 중 기운 센 한두 마리가 힘차게 끌면, 나머지는 함께 끄는 척하지만 실은 끌려가는 것이다. 나는 이 작업이 환멸을 느낄 정도로 싫었지만 언제나 마차를 끄는 힘센 말이 되곤 했다. 감독이나 다른 작가들은 어려움에 부딪히기만 하면 내가 해결해주길 바랐다. 속마음은 나 자신이 지나치게 솔직한 것도, 우유부단한 것도 너무 싫었지만, 좋은 해결책이 떠오르면 주저하지 않고 제시했다. 내가 잘하는 것을 보여주려는 경쟁심 때문이 아니라 그냥 솔직한 성격 때문이었다. 돈을 받으면 일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 일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탐욕과 더불어 내 능력을 다른 곳에 쓰면 더 가치 있을 텐데, 보잘것없는 돈을 위해 나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후회스러웠다.
―p. 56~57
“난 당신을 경멸해. 이게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야. 이게 당신을 사라앟지 않게 된 이유야. 난 당신을 경멸해. 당신 몸이 닿을 때마다 언제나 몸서리쳐졌어. 진실을 말했어. 난 당신을 경멸해. 난 당신이 싫어!”
―p. 146
……에밀리아를 보면 어떤 때는 둔한 것 같기도 했고, 가끔 속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상식만으로는 할 수 없는 수준 높은 비평을 한다거나 칭찬을 하곤 했다. 노동 계통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직관에 의존하여 표현해 어떤 편견이나 관습에 판단히 흐려지지 않은 탓이다. 에밀리아는 늘 깊이 생각하고 솔직했으며, 그녀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솔직하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자신의 말하는 스타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생각을 표현할 때면 늘 수줍어했다. 그런 에밀리아가 “나는 당신을 경멸해”라고 외쳤을 때,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 깊이 나를 경멸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p. 147~148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이 노력을 하지 않고 살려면 몸의 움직임 대부분을 무의식중에 반응하는 무조건반사에 의지해야 한다. 발을 내딛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근육이 움직여야 하지만 이런 현상을 의식하지 않는 건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 둘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내가 에밀리아에게 사랑 받고 있다고 믿는 동안 우리 사이의 행복은 저절로 발생했다. 그래서 의식할 때만 표면으로 드러났을 뿐, 나는 다정한 모습이 마치 어둠에 묻혀 있듯 내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 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사랑 받고 있다는 확신이 허망하게 사라진 지금은 아주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게 됐다. 에밀리아에게 술을 권하거나 소금병을 건네며 그녀를 쳐다볼 때 눈을 돌리는 등의 모든 행동에 언제나 우울이 동반된 고통과 격분의 감정이 뒤따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묶인 것 같았다. 또 제정신을 못 차릴 만큼 멍청하게 마비된 것 같았다.
―p. 153~154
“사실 율리시스는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 걸 두려워한 사나이었어요. 그의 잠재된 의식은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 게 싫어서 앞길에 장애물이 생기길 바랐고, 또 그렇게 된 거죠. 율리시스의 모험 정신은 조금이나마 고향에 늦게 돌아가고 싶은 그의 무의식적 욕망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아요. 모험을 하다 보면 시간이 지체되고, 자연스럽게 귀국이 늦어져 고향 가는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얘기죠.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니, 칼립소와 페니키아 사람들이니, 폴리페모스나 키르케라든가 그 밖의 여러 신들이 율리시스의 귀환을 방해한 것이 아닙니다. 조금 앞으로 나아가다가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 여기서 지내다 또 저기서 머문 건 율리시스 자신의 무의식적인 명령이었다는 거죠.”
―p. 186~187
“자네처럼 나도 꿈이 있었어. 그 이상이 뭔지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분명히 있었어. 그러다 신세지게 될 분을 만났지. 그분이 나를 깨우쳤지만. ……나도 오늘 저녁의 자네와 비슷하게 말했지. 그런데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아나? 자기가 원하는 걸 분명히 알 때까지는 이상적인 생각은 잊고 지내는 게 좋다고 했어. 자기 기분을 분명히 확인한 후, 인고 지낸 이상을 실현할 힘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꿈꾸던 이상이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지.”
―p. 225~226
“……아시다시피 율리시스는 질투가 많거나 복수심에 불타 피를 보길 즐기는 남자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점잖게 설득해서 구혼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 했죠. 아내의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구혼자들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걸 깨닫지 못한 거죠. 그렇게 해야만 페넬로페가 더 이상 그를 경멸하지 않을 거고, 다시 남편을 사랑할 수 있게 될 텐데 말이죠. 그런 식으로 율리시스와 페넬로페는 오랜 이별 뒤 다시 사랑하게 되며 참된 결혼 생활을 하게 된 겁니다. 말하자면 피비린내 나는 축하연을 베푼 셈이죠.”
―p. 243
“……오디세이의 율리시스가 어떤 사람이고, 그가 한 일이 뭡니까? 그는 문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여러 영웅들 가운데 유일하죠. 어떤 점이 문화인이라는 걸까요? 편견이 없고 이성적이어서 문화인이라는 건 아니죠. 문화는 불편한 겁니다. 가령 개화되지 않은 사람이 명예라 부르는 것의 중요성조차 쉽게 무시당하는 거죠. 페넬로페는 개화된 여자가 아니라 인습에 젖어 있는 여자예요. 그 여자는 이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오직 본능과 가문, 자존심만 아는 사람이었어요. 몰티니 씨, 내 얘길 잘 생각해보고 이해해주세요. 문화는 개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겐 부도덕하게 보이는 겁니다.”
―p. 246
……바람의 방향이 바꾸자 물빛이 달라졌다. 푸른빛인가 하면 진한 보랏빛, 또 초록으로 빛났다.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잔잔한 수면 위로 깎아 세운 듯 수직으로 솟아오른 섬 바위들이 나를 반기듯 날아오르는 것도 같았고, 헤엄쳐 오는 것도 같았다. 그건 마치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날아오는 화살처럼 보였다. 이런 경치를 보고 있자니 느닷없이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았다. 바다에 몸을 던지면 가장 멋지게 죽을지 모른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죽으면 삶에서 얻지 못했던 순수성을 되찾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 250
……에밀리아는 어쩌면 자신이 왜 나를 멸시하는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를 형편없는 속물이라고 여기고 싶어서 일부러 그 이유를 알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어떤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나 혹은 그녀의 행동 때문도 아니고, 검은 머리 색이라든가 푸른 눈처럼 그저 그냥 무시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까? 나는 내가 바라던 바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가 없다는 것을 아무리 밝혀봤자 믿지 않으려는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p. 288
……나를 판단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나에 대해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모순적이라는 것이 분명한 증거였다. 처음에 나를 경멸하게 됐을 때 솔직하게 진실을 털어놓았다면 우리 애정에 금이 간 원인을 찾아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에밀리아는 오해를 풀려 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고함을 지른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계속 나를 경멸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이제껏 긴 의자에 누워 있다가, 그런 생각에 마음이 뒤숭숭하고 불안해져 나는 거의 기계적으로 일어났다. 난간 옆으로 걸어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밤의 고요함을 지켜보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하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 내음 풍기는 바닷바람에 뜨거운 얼굴이 식는 순간 나는 내가 그렇게 안심할 수 있는 인간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경멸당한 남자는 그 멸시가 끝날 때까지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고, 또 안심할 수 없음을 깨닫고 후회했다. 죄를 지은 뒤 “산과 바다가 나를 숨겨줄 것이다”라고 말해봤자 영혼 깊숙이 파고든 경멸은 아무리 외진 곳에 숨어도 따라왔다.
―p. 295~296
나는 에밀리아와 나의 관계가 레인골드가 분석한 율리시스와 페넬로페의 관계와 흡사하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런 해석이 역사적 사건에는 적용될 수 있다 해도 시공간을 초월해 개인의 윤리적인 문제로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순 없었다. 우리의 내면만이 그 무엇인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역사라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세계에서는 개인이 옳다고도, 죄가 없다고도 판단할 수 없다. 과거의 사람들이 자신이 놓인 처지를 스스로 깨달아 어떤 판단을 내렸다 한들 내가 지금 갈망하는 그런 종류의 상황이 아닌 건 확실했다.
에밀리아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걸까? 왜 나를 경멸하게 된 걸까? 그런 문제들이 나를 경멸할 이유가 될까? 갑자기 그녀가 던진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남자답지 못해”라는 말이었다.
―p. 287~298
……우리 세 사람이 생각한 율리시스의 모습은 왜 각각 다를까? 생활이 다르고, 인간에 대한 이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티스타가 그리는 율리시스는 피상적이고 천박하고 임기응변적인 인간으로, 그의 생활과 취미가 바로 그렇다. 레인골드의 이상은 보다 현실적이지만 퇴폐적인 인간의 모습인데, 그의 예술관과 도덕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린 율리시스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고상하고, 진실한 동시에 가장 시적이고 멋진 모습의 인간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율리시스는 무력할지는 모르지만 진지하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일그러진 생활에 오염되지 않았고 돈의 영향도 받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었다.
―p. 299